< 실력과 능력 (6) >
차지은의 일침을 들은 이도원은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새벽 세 시가 넘어갈 무렵 이도원은 따뜻한 믹스커피 한 잔을 타서 차지은에게 내밀었다.
차지은이 받아 후루룩- 마셨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이도원이 중얼거렸다.
“아직 밤은 쌀쌀하네.”
“네. 제가 추위를 많이 타서 그런지도…….”
하긴, 추위를 많이 타지 않는 이도원은 별로 춥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사람이 바뀌는 게 가장 어렵다고들 하지.”
“그렇죠.”
차지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오빠가 바뀌라는 건…….”
“아니.”
이도원이 말을 자르며 덧붙였다.
“난 연기에 완전히 빠져있었다. 난 지금껏 앞만 보고 달렸지. 하지만 깨달았어. 내가 쫓고 있었던 게 신기루였다는 걸.”
이도원은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그를 보며 차지은은 입을 다물었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보였기 때문이다. 이도원이 상념에 빠져있는 동안, 차지은은 저수지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네.’
처음에는 지루할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의외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정적이 감도는 저수지는 철저히 혼자된 기분을 선사했다.
어스름하게 날이 밝아왔다.
이도원은 옆을 보았다.
차지은이 새근새근 잠이 들어있었다.
‘앉아서 잘도 자네.’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그녀를 깨우지 않았다.
‘마음의 여유. 상대를 배려하는 연기.’
성공을 위해 달리기보다 순간을 즐기는 것.
이도원은 맑게 개는 하늘을 보았다.
*
영화 <바람>의 촬영이 다시 시작되었다.
경기도 촬영현장과 대학로연습실을 오가며 생활하던 와중, 이도원은 짬을 내서 차수희가 있는 미래정신과의원을 방문했다. 전에는 빈손이었지만 이제는 과일바구니를 들고 찾았다.
“뭘 이런 걸 다.”
차수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도원은 병원 내부를 둘러보며 대답했다.
“인테리어가 좀 바뀌었네요? 지난번 사건 때도 도움을 받았고, 꼭 감사하단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네가 오빠 때문에 억울한 상황에 처했고,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했을 뿐인데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차수희는 오히려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도원은 차수희와 차지은 자매와 장남인 차기열 회장을 나란히 떠올려보았다.
‘분위기가 참 달라.’
이도원은 속으로 생각하며 말했다.
“오늘은 상담 받으러 왔습니다.”
“오랜만에 상담인데?”
차수희가 원장실 책상에 앉으며 물었다.
“난 전문적인 상담사가 아닌데 괜찮겠어?”
“새삼스럽게.”
이도원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자주 상담 해주셨잖아요.”
“하긴, 그러긴 했어. 처음 봤을 땐 고등학생이었는데 벌써 군대도 갔다 오고… 나만 나이를 먹는 것 같은데, 너나 지은이를 보면 정말 세월이 빠르긴 하다.”
“저도 지은이 보면 그런 생각해요. 처음 봤을 땐 중학생이었는데 이제 어엿한 숙녀라니까요?”
“애 어른 같은 건 여전하네.”
대답한 차수희가 물었다.
“내가 올 해 서른둘이니까… 도원이가 몇 살이지?”
“스물셋이요.”
이번에는 서로 놀랐다. 이도원은 이십 대 후반이었던 차수희가 벌써 서른을 넘은지 두 해나 되었다는 게 놀라웠고, 차수희는 열일곱 살이었던 이도원이 벌써 스물셋이 됐다는 데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첫 만남 이후 벌써 육 년이란 시간이 흐른 것이다.
세월 이야기를 하면 무조건 나이 많은 쪽이 손해다.
고개를 저은 차수희가 말을 돌렸다.
“그래, 오늘은 어떤 문제야?”
이도원이 고민 끝에 대답했다.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좀 고치고 싶어서요.”
“중요한 건 네 천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는 거야. 환경적인 변화든, 천성이든 성격 자체를 완전히 고칠 수는 없겠지만… 네 본모습으로 돌아가서 네가 느끼는 문제점들에 대해 하나 씩 돌아보다보면 내재돼 있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제 본모습을 돌아본다고요?”
“응. 모든 심리치료의 기본은 상대의 말을 듣는 거야. 넌 나한테 편하게 속에 있는 말을 모두 하면 돼. 네게 솔직해져야 너 스스로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어. 난 네 스스로 방향성을 찾을 수 있도록 살짝 씩 밀고 당겨주는 정도에 불과하지.”
이도원은 흥미가 생겼다.
차수희가 말을 이었다.
“네 앞에 내가 앉아있다고 의식하지 말고, 날 공기같이 여기고 모든 걸 털어놔봐. 산 정상에서 시원하게 소리 지르듯이. 내 눈치를 살필 필요도, 존댓말을 할 필요도 없어.”
의자에 등을 묻은 차수희가 편하게 기다렸다.
째깍째깍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도원은 지금 순간 관객 앞에서 연기를 시작할 때보다 더 망설여졌다.
‘왜 이러지?’
보이지 않는 청테이프로 입을 틀어막은 듯 선뜻 목소리가 나지 않았다. 입을 열었다 닫기를 여러 번, 거의 삼십 분이 다 될 즈음 겨우 이도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난 어머니, 누나와 함께 살았죠…….”
*
경기도 광주 <바람> 촬영지.
이도원은 떨리는 마음으로 현장에 도착했다.
떨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오늘 촬영에는 차지은과 애틋한 장면이 들어가는 씬이 있었고, 그 뒤에는 안유성과 함께하는 마지막 촬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문을 열고 내리자 차지은과 안유성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왜 선생님께서 벌써 오셨지?’
아직 안유성과 들어가는 씬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안유성은 먼저 와서 구경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음…….”
안유성과 거리가 좁혀질수록 이도원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안유성은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뼈만 남은 모습이었다. 그는 말할 힘도 남아있질 않은지 이도원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차지은은 애써 밝은 표정과 말투로 말했다.
“오빠. 이쪽이에요!”
잠깐 걸음을 멈췄던 이도원이 다가갔다.
안유성은 창백한 얼굴이었다. 해골 같은 모습을 한 채,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로 이도원을 반겨주었다.
“조금 늦었구나.”
“예, 선생님.”
이도원은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동안 차수희에게 치료를 받으며 점차 감성이 자극된 상태였다. 이도원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려는 걸 참으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안유성은 현장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오늘은 두 사람이 애틋한 연기를 한다지? 기대되는 장면이야.”
머지않아 촬영장이 정리됐고 유태일 감독이 다가왔다. 그는 안유성을 보며 고개를 가볍게 숙여보이고는 안타까운 감정을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배우들 준비해주세요.”
그들을 지나친 유태일 감독이 모니터로 가서 앉았다.
이도원과 차지은은 안유성에게 인사를 하고 카메라가 향한 곳으로 갔다. 두 배우가 마을회관 앞 벤치에 나란히 앉자 유태일 감독이 촬영 지시를 내렸다.
“카메라 롤.”
카메라가 작동하고 이도원과 차지은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준비가 끝나자 이도원이 고개를끄덕였고, 유태일 감독이 신호를 보냈다.
“레디- 액션.”
차지은은 조금 떨어진 아름드리나무를 보다가 눈을 감았다. 바람이 불어와 차지은의 앞머리를 넘겨주었다. 턱을 조금 치켜들고 바람을 쐬며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질문이 있어요.”
차지은의 모습은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그녀가 자아내는 분위기를 고스란히 받아들인 이도원은 가슴 속에 작은 불씨를 지폈다. 그건 ‘애정’이라는 불씨였다. 이도원이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차지은이 물었다.
“왜 하필 나예요?”
이도원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쪽을 처음 봤을 때 너무 예뻐서 이 세상사람 같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에요. 난 평생 허전하게 채워지지 않는 구석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걸 그쪽이 채워줬어요.”
“내가요?”
차지은이 풋풋한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아직 날 잘 모르잖아요?”
차지은의 표정과 목소리를 들으며 현장의 모두는 알 수 있었다. 나이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그녀는 가족이나 청소년드라마를 주로 촬영해왔다. 누군가의 딸, 여동생, 친구……. 하지만 그녀에게 가장 꼭 맞는 옷은 멜로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백치미가 엿보이는 표정은 맑고 단단한 목소리에 녹아들어 청순한 이미지로 만들었다. 단숨에 <바람>의 ‘차지은’이란 배역과 완벽히 일치했다. 심지어 상대역인 이도원조차 차지은의 연기에 이끌려 녹아들었다.
“지금 확신했어요. 그쪽은 같이 있는 것만으로 내 가슴에는 열정을, 마음에는 평화를 줘요.”
‘지금 확신 했어요’ 하는 대사는 이도원의 애드리브였다. 작은 차이였지만 그 덕분에 더욱 진실 된 느낌을 전달했고, 흐름도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이도원은 차지은과 상황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다. 그는 <바람>의 ‘이도원’으로 분했다.
차지은은 이도원의 연기가 한겨울 추위 속에 쐬는 따뜻한 온수처럼 몸을 감싸는 걸 느끼며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으면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으로 물었다.
“이렇게 함께 있으면 되는데, 우리가 꼭 교제할 필요는 없잖아요?”
날 한 번 설득해 봐요.
차지은의 미소가 말하고 있었다.
이도원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한 장면을 보듯이 반짝이는 눈으로 대답했다.
“당신한테 얻은 걸 나도 보답하고 싶거든요.”
두 사람의 모습과 목소리를 담고 있던 스태프들은 절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담은 장면을 모니터를 통해 바라보던 유태일 감독 역시 미소 띤 입술로 손가락을 물었다.
“이건 베스트 씬이다.”
유태일 감독은 컷 사인도 보내지 않고 말했다.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했네.”
엔지고 오케이고 사인이 따로 필요치 않았다. 그 감탄 한마디로 모든 게 설명이 됐다. 스태프들도 저마다 한 마디 씩을 뱉었다.
“케미봐. 미쳤다.”
“두 사람, 진짜 사귀는 거 아니야?”
“그러게.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배우들! 최고였습니다.”
이도원과 차지은은 서로를 마주보며 씨익 웃었다.
“오빠 좀 하던데요? 멜로도 사랑도 난 몰라 하더니.”
이도원이 피식 웃으며 거드름을 피웠다.
“내가 아무리 몰라도, 애기인 너보다 모를까?”
무려 이십 년을 거슬러온 이도원으로서는 차지은이 애기 같이 보일 수 있었다. 물론 현실에 적응하면서 체감하는 감정은 그렇지 않았지만…….
‘선생님과 상담이 큰 도움이 됐어.’
이도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차수희에게 마음을 털어놓으며 이도원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졌다. 배역의 감정을 끌어다 쓰던 전과 달리 이번 장면은 자신의 애틋한 감정을 꽃피우며 차지은과 호흡을 주고받았던 것이다.
어렴풋이 그 감정을 느낀 차지은이 말했다.
“오빤 연애도 잘 할 거예요.”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두 사람은 벤치에서 일어나 모니터로 갔다.
장면은 생각대로 잘 나왔다.
유태일 감독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아주 좋았어.”
이도원과 차지은은 동시에 웃었다.
카메라 두 대가 동원됐기 때문에 두 주인공의 바스트 샷은 이미 촬영이 마무리된 상태였다. 따라서 추가적인 풀 샷은 두 주인공의 모션만 담아냈다.
이어지는 씬은 이도원이 시한부 선고를 받고 소식 없이 사라진 뒤, 차지은 혼자 이도원과 왔던 곳을 되짚어나가는 장면이었다.
차지은은 벤치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이번에도 처연한 모습이 잘 드러났다.
‘확실히 달라.’
이도원은 모니터를 보며 연신 감탄했다. 직접 연기호흡을 맞출 땐 배역에 몰입하느라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배경음과 연출적인 분위기가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차지은은 홀로 모니터 안을 꽉 채우는 연기를 발하고 있었다.
차지은의 이런 성장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원래부터 멜로연기에 잘 맞는 배우기도 했을 뿐더러, 본인 스스로 최근 깨달은 바가 많았고, 안유성의 병세까지 알게 되며 동기부여가 된 것이다.
이도원은 복잡적인 이유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안유성을 바라봤다. 곧 있으면 이도원과 안유성의 샷이 시작될 터였다. 안유성을 빤히 바라보던 이도원은 현장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자.’
< 실력과 능력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