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24화 (124/178)

< 실력과 능력 (5) >

병원에서 연습실로 가는 길 이도원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안유성은 말했다.

‘최고의 배우란 없다. 최고의 순간이 있을 뿐.’

이도원은 안유성을 생각하며 <바람>에서 촬영했던 장면을 떠올렸다. 안유성 덕분에 극복을 해냈지만 공감할 수 없는 감정과 직면했던 그 순간.

‘아버지라.’

기억에는 없는 얼굴이었다.

물론 어머니는 언제나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잠자던 중 새벽에 괴이한 신음이 들려오면, 이도원이 안방으로 찾아가 깨워주고는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눈물을 닦으며 꿈에서 아버지를 만났다고 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자 이도원은 가슴 한구석이 찌릿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 기일에도 어머니만 아버지를 추억했지, 누나나 나는 아버지에 대해 조금의 감정도 느끼지 못했어.’

남매가 옹알이를 하던 때 돌아가셨으니 감정이 남았을 리 만무했다. 이도원은 지갑을 꺼내 주민등록증 뒷면에 붙여둔 사진을 보았다. 그곳에도 아버지는 없었다.

이도원은 심숭생숭한 기분으로 오준식에게 불쑥 물었다.

“너도 할머니, 동생들과 산다고 했지?”

“응? 응.”

오준식이 대답하자 이도원이 재차 물었다.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있어?”

“있지. 왜?”

“난 아버지에 관한 기억이 하나도 없거든. 그래서 부자 간의 감정을 잘 모르겠다.”

이도원의 말을 들은 오준식이 곰곰이 생각하다 물었다.

“사진은 본 적 있고?”

“몇 번.”

“넌 어머니가 아버지 역할을 대신 하셨으니까 모자간의 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아버지 사진을 한 번 찾아봐. 그럼 뭔가 떠오르는 게 있을 거야.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고 기억에서 희미해져도 감정은 남아있더라고. 사진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묘한 기분 있어.”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선생님의 호흡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부정의 빈자리가 내게 미친 영향은 분명히 있다.’

이도원은 자아성찰을 해보았다.

‘어려서부터 엄만 일을 나가셨어. 언젠가부터 세상을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 그때부터 점차 나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에 무관심해졌다.’

지금도 자신의 성공만을 위해 달리고 있다. 그 외에 것들은 이도원에게 부수적인 부분에 불과했다.

다시 한 번 안유성의 말이 떠올랐다.

‘최고의 배우란 없다. 최고의 순간이 있을 뿐.’

이도원은 무언가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원하는 건 배우로서의 성공인가? 아니면 연기를 하는 순간인가?’

처음에는 소리를 되찾고 연기를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유명세를 얻고 활동을 시작하면서 언젠가부터 연기하는 즐거움 보다 영화가 흥행할 것인가에 대해 더 신경을 쓰게 됐다.

정한 길로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뜻하던 곳과 전혀 다른 장소에 와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도원은 지금이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할 시점이라고 느꼈다.

‘이대로는 안 돼. 내가 배우가 되고 싶었던 건 연기를 하고 싶어서다. 그러니까 연기를 하고 싶은 건 열정이다. 하지만 최고의 배우가 되고 싶은 건, 마음의 독일뿐이야.’

이도원이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아 오준식은 방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시간이 좀 안돼서 밴은 대학로 연습실에 도착했다. 이도원은 생각을 정리하며 차문을 열고 내렸다.

“오늘은 먼저 들어가.”

건조한 목소리로 오준식에게 말한 이도원은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열띤 열기가 문밖까지 훅 밀려왔다.

“이거야.”

이도원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등을 툭 밀었다.

“뭐가 이거야? 연습도 빼먹고 놀다 와서는.”

이도원이 뒤돌아보자 신용운이 서있었다.

“아, 선생님.”

대답하는 이도원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던 신용운이 피식 웃었다.

“눈이 반짝이는 게 놀다 온 것만은 아닌가 보구나. 어서 들어가서 연습해라.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예.”

이도원은 짧게 대답했다.

안으로부터 영어로 된 노랫말이 흘러나왔다. 이제 몇 달 후면 이곳으로부터 일만 킬로가 넘게 떨어진, 전혀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가진 곳에서 연기를 펼치게 된다. 브로드웨이로 진출하는 건 이도원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

이도원은 네 시간을 쉴 틈 없이 연습했다. 웜 업부터 움직임, 노래연습까지 마치자 땀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잠시도 쉬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며 단원들은 절로 고개를 저었다. 그중 가장 흐뭇해하는 건 이도원과 더블캐스팅으로 공연할 정태화였다.

‘전혀 뺀질대지를 않는군.’

처음에는 단원들 대부분이 이도원에 관한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이도원은 전문적인 뮤지컬 배우도 아닐뿐더러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른 단원들은 그런 이도원이 뮤지컬까지 영역을 넓히려하자 불편하고 탐탁찮았다. 그런데 직접 연습에 참여하는 태도를 보고 나서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이도원은 단원들 중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했으며 배우려는 자세로 임했다.

차지은은 땀 흘리는 그를 보며 남몰래 미소 지었다.

‘이기적인 구석이 있긴 해도, 역시 멋져.’

그때 이도원이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영어 알려줘.”

차지은은 영어를 잘했다. 그래서 가끔 이도원에게 조언을 했는데, 그때부터 줄곧 만날 때마다 일 대 일 과외를 요청하고 있었다.

“…네.”

같은 단원인데다 이도원을 좋아하는 차지은은 거절하지 못했다. 오히려 연습시간을 줄여서라도 이도원에게 영어 과외를 해주었다.

“실력이 부쩍부쩍 늘긴 하는데 그래도 기초부터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요. 왜 굳이 기초부터 하려는 거예요?”

뮤지컬에 나오는 노래나 대사만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서 완전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충분히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단원들이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도원은 꼭 기초부터 다잡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도원은 그 부분에 대해 설명했다.

“어설퍼 보이기 싫어.”

이도원이 생각하는 배우란 결과물을 보이는 직업이었다. 배우는 관객에게 최고의 연기를 선물해야 한다. 과정이 어떻든 중요한 건 그것이다.

“그래서 너한테 일 대 일 과외도 받는 거고.”

이도원이 차지은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반짝이는 눈빛에는 열정이 가득했고, 의지를 굽힐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는 확고한 결심이 전해졌다.

작게 한숨을 내쉰 차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열심히 해야돼요.”

두 사람은 딱 붙어 앉아 두 시간 동안 영어공부를 했다. 이도원은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영어를 들으며, 눈으로는 영어지문을 훑었다. 온힘을 다해 집중하는 이도원을 차지은이 곁에서 힐긋거렸다.

‘나보고 어떡하라고?’

차지은은 절로 그런 의문이 들었다. 자신의 마음을 거절하고 당당하게 과외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자꾸만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도 기쁨 반, 부담 반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매번 거절하지 못했다.

그날 영어공부를 마친 이도원이 불쑥 물었다.

“아까 연기하는 것 보니까 조급해 보이던데… 요즘 고민 없어?”

차지은은 뜨끔 했다. 그녀는 요새 들어 마음이 급했다. 영화도, 뮤지컬도 이도원과 함께하다 보니 그의 연기력에 보조를 맞추고 싶었고 그런 심리가 연기를 할 때마다 표출됐다. 이같은 문제점을 솔직히 고백하기로 마음 먹은 차지은이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자꾸 마음이 급해요. 연기를 하고나면 늘 엉망인 것 같고 전혀 만족스럽지가 않아요.”

곰곰이 생각하던 이도원이 손목시계를 보더니 물었다.

“시간도 적당하고… 오늘 밤낚시 갈래?”

뜻밖의 제안을 받은 차지은은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밤낚시요?”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영화보잔 것도 아니고, 술 한 잔 하자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무슨 낚시…….’

낚시는 취향이 극명하게 갈린다. 낚시를 좋아하는 남자는 많아도, 낚시에 취미가 있는 여자는 찾아보긴 힘들다. 그건 차지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면 좋은지 싫은지는 알 수 없는 일. 그녀는 이도원과 함께하는 모든 것들이 싫지 않았다.

“저 장비 이런 거 아무것도 없는데…….”

이도원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낚시터 가면 빌려주더라고. 나도 몇 번 안 가봤어. 생각할 게 있을 때마다 한 번 씩 가면 마음도 차분해지고 좋더라.”

이도원은 이상백과 낚시터를 다녀온 뒤 두어 번 더 갔던 적이 있었다. 낚시터를 자주 찾진 못했지만 요즘처럼 생각이 많아질 땐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이도원의 제안을 받은 차지은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엄마한테는 촬영한다고 뻥 쳐야겠네요.”

다 큰 처자가 남자와 단 둘이 밤을 샌다는데 환영할 부모는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니만큼 차지은은 큰 결심을 했고, 이도원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

*

낚시터는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

밤낚시였기에 이도원과 차지은은 눈에 띄는 걸 피할 수 있었다. 운전은 면허가 없는 이도원 대신 차도 있고 면허도 있는 차지은이 담당했으며 장비를 빌리거나 먹거리를 살 땐 이도원 혼자 내려서 움직였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두 유명인이 함께하기에는 좋은 취미 같았다.

‘영 불편하네. 면허 따야지.’

이도원은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자리를 펴고 차지은과 나란히 앉았다. 반면 차지은은 앉자마자 하품이 쏟아졌다.

‘이게 뭐야?’

속에선 불만이 치밀었다.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낚시하는 법 알려줄게.”

그는 몇 번 낚시를 왔을 때도 정작 물고기는 낚지 못했다. 주구장창 생각만 하다 돌아갔다. 이론만 알지 실전은 영 꽝인 것이다. 물론 그런 사실을 모르는 차지은은 이도원의 설명을 집중해서 들으며 그대로 따라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붕어를 한 마리 낚았다.

“어?”

이도원은 절로 당황한 음성을 뱉었다.

그 뒤에도 차지은은 십 분에 한 마리 꼴로 붕어를 낚았다. 이도원의 찌는 미끼로 뭐를 걸든 감감무소식이었다.

“오빠 낚시 진짜 못하네요.”

차지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놀렸다.

이도원은 당황한 내색을 하지 않고 등을 편히 기대며 거드름을 피웠다.

“낚시는 고기를 낚는 게 아니야. 마음의 여유를 낚는 거지.”

어쨌든 차지은은 의외로 재능이 있어 지루하지 않게 됐다. 그녀는 이도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빠. 계속 궁금했는데, 왜 제 고백을 거절한 거예요?”

차지은에게 대시를 하는 동종업계 배우며 가수들은 줄 세워서 연병장 두 바퀴였다. 그녀가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의 인기를 모를 리 없었다.

그 질문에 이도원은 머쓱하게 대답했다.

“난 누군가를 생각하고 챙기기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거든. 요즘은 쉽게들 만나고 헤어지지만 난 연애가 쉬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어떤 것보다 많은 감정과 시간이 들어가는 일이지.”

이도원은 타임 슬립 전을 떠올렸다.

인기가 없던 건 아니었지만 이도원은 언제나 연기만을 생각하며 연인에게는 뒷전이었다. 때문에 매번 이별했고, 그 당시의 일은 지금도 어떤 벽으로 작용했다. 그 같은 심리를 구구절절 설명해줄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한 이도원은 이어지는 차지은의 말을 듣기만 했다.

“오빠, 연애는 일이 아니에요. 이성적인 게 아니라고요. 저도 저 싫다는 사람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싶은 생각 없어요. 하지만 제가 받은 거절이 오빠 스스로 가진 트라우마나 방어본능 때문이라면 좀 억울할 뿐이죠.”

이도원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 문제는 나중에 이야기하자. 그나저나 네 고민이나 말해봐. 아까 마음이 조급하다고 했던 것.”

“다른 이야기가 아니에요. 오빠 영향도 있다고요.”

대답한 차지은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제 감정 때문인지, 원래 그런 건지는 모르겠어요. 오빠가 연기하는 걸 보면 저도 어서 그 수준까지 올라가서 호흡을 맞추고 싶어요. 오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데 전 계속 제자리인 것 같고, 제 마음과는 반대로 가는 기분이에요.”

이도원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이 없자 차지은이 재차 말했다.

“오빠가 도와줄 수 없는 부분이죠. 저 스스로 극복해야 될 문제예요. 오빠가 항상 그러듯이.”

“내가?”

“남의 도움 안 받잖아요.”

이도원은 할 말을 잃었다. 결과적으로 도움을 받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스스로 나서서 요청한 적은 없었다. 누군가에게 의지한 적도 없었다. 항상 혼자 생각하고, 혼자 판단하고, 혼자 움직였다.

그때 차지은이 쐐기를 박았다.

“세상 혼자 사는 사람 같아요.”

< 실력과 능력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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