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23화 (123/178)

< 실력과 능력 (4) >

이도원과 안유성은 복지관 바로 옆에 위치한 허름한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스태프들에 의해 촬영준비가 모두 끝난 상태였다.

잇따라 모니터가 이동했고 유태일 감독이 두 배우를 바라보았다. 이도원은 복잡한 표정으로, 안유성은 담담한 얼굴로 간이식탁에 마주앉아 있었다.

“촬영 들어갑니다. 배우들 레디-.”

이도원은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떴다.

그때 유태일 감독이 신호를 보냈다.

“액션.”

이윽고 이도원이 첫 대사를 뱉었다.

“할아버지. 오늘 우리 마을회관에서 봤던 여자 어땠어요?”

이도원은 안유성의 숟가락을 들어 잘게 갈은 죽을 뜨며 물었다.

안유성은 멍한 눈으로 수저를 바라보며 도리질을 쳤다.

“나 안 먹을래. 엄마 보고 싶어. 엄마…….”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은 이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내 안유성을 달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밥 먹고 엄마 보러 가요. 응? 할아버지.”

그때서야 안유성은 죽을 받아먹기 시작했다.

“꼭꼭 씹어 삼켜야죠. 그렇지.”

죽이 반은 입에 남고 반은 입가로 흘렀다. 옷을 버렸고 이도원은 그때마다 휴지로 닦아주며 죽을 떴다. 그는 일상인 듯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그 여자를 서울에서 본 적이 있거든? 확실하진 않은데… 내가 일했던 복지관에서 근무하던 사회복지사 같아요. 서울 살 땐 할아버지도 건강하고 참 좋았는데… 할아버지가 제일 힘들 거야? 그래도 난 할아버지를 보내줄 수가 없어요. 할아버지는 내 하나뿐인 가족이잖아.”

긴 독백이었다.

이도원은 호흡을 조절하며 훌륭하게 소화했다.

그 순간 죽을 받아먹던 안유성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초점이 잡힌 동공으로 바라보며 눈물짓는 모습에, 이도원의 숟가락질도 멈추었다.

“설마… 할아버지, 돌아온 거예요?”

안유성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뱉지 못하고 억눌린 호흡으로 끅끅- 흐느껴 울었다.

이도원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안유성에게로 다가가 그를 안아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안유성은 둑이 터진 듯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이도원 역시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그때 유태일 감독이 컷 사인을 보냈다.

“엔지.”

두 배우가 눈물을 닦았다. 분장 팀이 다가와서 눈물 자국을 완전히 지웠다. 그 과정에서 안유성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집중은 되는데, 몰입이 안 되나 보구나.”

이도원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안유성은 말을 이었다.

“내가 전에 말한 적이 있었지? 우리가 하는 연기는 사람 사는 이야기인데, 자네 연기에는 그게 빠져있다고. 평소에 자기중심적인 성격인가?”

“네… 선생님.”

“보기 드문 경우로군. 자기중심적인 배우는 적정선 이상 연기가 늘기 힘든데 말이야.”

이도원은 말없이 안유성을 바라봤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안유성이 대답했다.

“상대 배우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배우가 어떻게 연기를 하겠나? 실수를 해도 되니까 이번에는 자네 자신한테 집중하지 말고, 나한테만 집중해 보게.”

이도원은 순응하기로 마음먹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자네 자신이 전혀 모르는 감정이라도 상황과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면 얻을 수 있네. 우리가 연기를 할 때 진실 된 감정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연기하는 순간 배역 그 자체가 되지 못 한 걸세. 난 <투사>의 막바지 촬영 때 배역이 된 자네의 모습을 본 적이 있어.”

이도원은 <투사> 촬영 때를 떠올렸다.

짚이는 것이 있었다. 그 당시 안유성의 경지를 쫓는답시고 쪽 대본이 아닌 대본 전체를 심도 있게 읽어가며 모든 인물에 몰입을 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 그럴만한 시간이 없다면 상대역에 집중하면 된다.’

어차피 이도원 자신의 배역은 뼈에 새길 만큼 속속들이 분석하고 일체화시켰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면 저절로 몰입이 됐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자신을 버리고 상대인 안유성에게 집중해 볼 작정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준비되셨으면 다시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그 말에 따라 이도원과 안유성은 이전 그대로 자세를 바꾸었다. 두 배우가 모든 준비를 마치자 유태일 감독이 사인을 보냈다.

“레디- 액션!”

대사는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치는 순간 읽는 것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배우들은 촬영 전 대사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건 이도원 역시 마찬가지였고, 입에서 자연스러운 대사가 흘러나왔다. 다만 온 신경을 안유성에게 집중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 상대방에게 모든 정신을 쏟듯이 이도원도 그랬다.

대사가 오가고 안유성이 치매 기운을 벗어나 잠시 정신이 돌아왔다.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안유성이 흐느꼈다.

순간 텅 비었던 이도원의 가슴 속으로 뭉클한 감정이 훅 들어왔다. 이도원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

참고 참아서 가슴 속에 딱딱하게 뭉쳐버린 덩어리가 입술을 비집고 가늘게 새어나왔다. 설음과 기쁨이 범벅된 감정은 안유성이 언제 다시 정신 줄을 놓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뻗어나갔다. 그 끝에서, 이도원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놓쳤다.

달그락!

안유성의 주름살, 눈물, 전신의 떨림을 통해 뿜어진 감정이 이도원을 흠뻑 적셨고, 이도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끌리듯 안유성에게로 다가갔다.

“할아버지…!”

이도원은 안유성을 껴안았다. 그는 엉엉 울음을 터트리는 안유성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히 말했다.

“제발… 다시 떠나지마. 제발… 제발.”

감정이 헤일처럼 현장을 휩쓸었던 한 장면이었다. 유태일 감독과 스태프들의 심장이 쪼그라들 지경이었다.

유태일 감독은 엄지와 중지로 딱! 소리를 내며 외쳤다.

“컷! 오케이!”

안유성이 빙그레 웃으며 품에 안긴 이도원의 등을 두드렸다. 이도원은 그때까지도 감정의 잔재가 남아 흐느끼고 있었다.

“자, 가서 모니터링 하자.”

안유성의 말을 듣고 나서야 품안에서 벗어난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와 후배, 한 길을 가는 두 배우가 나란히 모니터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어야 했는데.’

다행히 그런 생각을 품은 건 유태일 감독만이 아니었다. 스틸 컷을 촬영하는 현장 막내가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렸다.

“최곱니다.”

현장 막내는 카메라에서 눈을 떼며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마티니(martini; 그날의 마지막 샷)는 여러므로 베스트 컷이었다.

*

<바람>의 다음 촬영이 일주일 간 미루어졌다. 안유성의 병세가 악화돼 잠시 촬영이 중단된 것이다. 다른 장면부터 작업을 해도 됐지만 유태일 감독은 굳이 그러지 않고 배우들에게 휴식을 주었다. 때마침 이도원과 차지은도 브로드웨이에 진출할 뮤지컬 <영웅> 단체연습이 잡혔기 때문이다.

이도원은 불편한 표정으로 밴 안에 있었다. 한없이 무거운 분위기로 앉아있는 그를 보며 오준식이 물었다.

“안 선생님 때문에 그러지?”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유성과는 <투사> 때 보다 <바람>에서 더 가까워졌다. 리딩을 제외하면, 단 한 씬 연기호흡을 맞춘 것에 불과했지만 배역 자체가 할아버지와 손자관계였다. 그 감정을 고스란히 주고받다 보니 마음의 거리는 쉽게 단축됐다.

작품에서 한 번 ‘가족’으로 호흡을 맞춘 배우들끼리는 마치 실제 가족인양 각별한 정이 들기 마련이었다.

‘괜찮으실까?’

이도원은 답답한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봤다.

‘괜찮으실 리가 없지.’

연기 자체가 무리가 될 수밖에 없다. 웃음치료 목적의 가벼운 오락극도 아니고, 촬영현장에서 감정 폭이 큰 연기를 해내는 건 건강한 사람도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안 선생님 입원해 계신 곳이 어디라고 했지?”

이도원의 물음에 오준식은 고개를 저었다.

“나야 모르지.”

“차 좀 세워봐.”

이도원이 말하자 오준식이 대로변에 차를 댔다. 그러자 이도원은 전화를 걸어 안유성이 입원한 병원을 알아보았다. 비록 밴은 연습실로 가는 길이었지만, 오늘은 정규 연습이 아닌 자유 연습이었다.

이도원이 전화를 끊고 말했다.

“오늘은 연습 쉬고 안 선생님 병문안 가는 걸로 하자.”

오준식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직 영어 발음도 안돼서 다른 단원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것 같던데, 연습을 빠지면 공연은…….”

오준식이 끝을 흐리며 말을 돌렸다.

“…잘 될 거야! 그래! 사람 사는 게 그런 게 아니지! 연습을 해도 사람 사는 도리는 지키고 해야지. 암.”

심각한 이도원의 표정을 본 것이다.

오준식은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차 돌리겠습니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사람 사는 것처럼 살라는 안유성의 한마디가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나.’

밴은 안유성이 입원한 병원으로 갔다. 일인 실 밖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듯 선물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뜻밖의 얼굴도 와있었다.

“오빤 무조건 연습 나갔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같이 오자고 안 했어요.”

이도원을 발견한 차지은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이도원은 쓰게 웃었다.

‘내가 그렇게 보였나?’

그는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놀랐겠다. 몰랐었지?”

차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조금쯤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탓했다.

“그래도 언질 정도는 해주지 그랬어요?”

“안 선생님이 비밀로 하길 원하실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요…….”

끝을 흐린 차지은이 말을 돌렸다.

“빈 손으로 온 거예요? 하긴. 오빠가 선물이죠, 뭐.”

차지은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들어가 보세요. 아마 선생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 문 앞에 서자 막상 문고리를 돌리기가 망설여졌다.

그 상태를 눈치 챈 차지은이 물었다.

“같이 들어갈까요?”

그녀는 이도원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문고리를 돌렸다.

문이 열리자 안유성이 누워있었다. 의외로 아무 의료기기도 달고 있지 않았다.

“누가 왔나 좀 보세요, 선생님!”

차지은이 밝게 말하며 이도원에게 속삭였다.

“걱정하던 것 보단 괜찮으시죠?”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유성에게 다가갔다.

안유성이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며 미소 지었다.

“지은이가 넌 절대 안 올 거라고 하던데…….”

이도원이 차지은을 흘겨봤다.

차지은은 혀를 쏙 내밀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주섬주섬 병실을 정리하고는 말했다.

“그럼 전 이만 자리를 피해드리겠습니다!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안유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차지은이 병실을 떠났다.

이도원은 침대 곁에 어색하게 앉았다. 어떤 말을 해야 하나 싶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으냐고 안부를 묻기에는 살이 쪽 빠진 모습이 병세를 말해주고 있었다.

해서 안유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브로드웨이에 갈 뮤지컬을 준비하고 있다고?”

“예, 선생님.”

“곧 넓은 세계로 나가겠구나.”

“그러고 싶습니다.”

이도원을 투명한 눈빛으로 빤히 보던 안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젊은이의 야망은 언제나 아름다운 법이야. 열정과 노력이 뒷받침되는 자네라면 충분히 이룰 수도 있을 테고.”

안유성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

“내가 입원한 곳은 국내 제일이라는 병원의 일등실이지. 지난 며칠 간 이곳에 내놓으라하는 유명인사들이 왔다갔네. 그중에는 성공한 감독과 배우들, 기획사 대표들도 있었지. 내가 헛살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더군. 하지만 날 찾아올 가족은 한 명도 없어.”

빙그레 웃은 안유성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야망은 시간과 노력만 있으면 이룰 수 있지만, 세상에는 시간과 노력으로 살 수 없는 것들도 많다는 것을 말이야. 나는 자네가 그 귀한 것들을 놓치지 않길 바라네.”

이도원은 잠시 숙였던 고개를 들며 물었다.

“하필 왜 제게 이런 충고를 해주세요?”

늘 궁금했던 점이고 마침내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에 안유성이 밤하늘의 별처럼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자네는 곧 최고의 자리에 올라갈 테니까. 막상 자넬 보고 남들이 최고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얻는 것 보단 잃는 것들이 많아지겠지. 그 허울을 지키려고 많은 세월을 허비해온 사람으로서… 자네가 그렇게 되길 원치 않네. 최고의 배우는 없어. 최고의 순간이 있을 뿐.”

< 실력과 능력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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