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22화 (122/178)

< 실력과 능력 (3) >

사람의 감정이란 거대한 파도와 같다. 지금 차지은의 마음을 집어삼킨 파도의 정체는 이도원을 향한 호감이었다. 비 오는 날의 창문을 내다보듯 흐릿한 시야에 분주한 촬영현장이 들어왔다.

‘하… 뻥 차였네. 내가 축구공도 아니고.’

차지은은 허탈한 웃음과 함께 눈물을 닦았다. 두 사람 관계는 일단락 됐지만 인연마저 끝난 건 아니었다. 따라서 차지은도 마음을 접을 생각이 없었다.

‘내 마음을 다 보여주지도 못했는데, 포기 할 수는 없지.’

씩씩한 표정으로 돌아온 차지은을 멀리서 응시하던 이도원은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보던 유태일 감독이 담담하게 촬영을 속개했다.

“엔지 장면 다시 갑니다.”

이도원과 차지은이 카메라가 비추는 영역으로 들어섰다.

뜻밖에도 먼저 입을 연 건 차지은이었다.

“전 연기에 집중할 거예요.”

이도원이 말없이 그녀를 마주봤다.

차지은은 전혀 민망한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오빠가 저를 그저 동생으로 생각하는 건 확실히 알았어요. 하지만 제 마음까지 접으라고 하진 마세요.”

이도원은 그럴 자격이 없었다.

물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좋은 연기 기대할게.”

대답한 이도원이 유태일 감독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촬영이 시작됐고 유태일 감독의 사인과 함께 두 사람이 엔지가 났던 장면을 반복했다. 여전히 이도원은 나무랄 데 없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달라진 건 차지은이었다. 그녀는 인물에 완벽히 몰입했다. 달뜬 감정이 엿보이던 전과 달리 이도원을 생전 처음 봤고, 난 데 없는 데이트 신청에 황당해 하는 표정이 살았다.

‘아주 좋아.’

이도원은 내심 미소 지었다.

연기가 끝나고 이도원이 말했다.

“봐. 할 수 있으면서.”

달라진 건 차지은의 감정이 아니었다. 차지은의 연기였다. 그 말인즉 이도원에 대한 호감을 갖고도 얼마든 인물에 집중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이도원이 덧붙여 말했다.

“그 전까지 날 의식하느라 정신을 안 차리고 연기를 한 거야.”

길을 가다 넘어지면 정신이 번쩍 들듯이, 차지은은 고백을 거절당한 이제서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말하자면 이도원의 거절이 그녀에게 충격요법으로 적용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걸 위로라고 해요?”

차지은은 기가 막힌 듯 물었다.

그 반응에 이도원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유태일 감독이나 그 역시 이성을 향한 설렘이 어떤 감정인지 알고 있었다. 이전까지의 차지은이 타인의 어떤 충고나 지적도 들리지 않는 상태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본인 스스로 마음가짐이 달라지지 않으면 시간이 얼마나 주어지건 공사 구분 없이 감정을 질질 끌다가 끝나고 말 거라는 판단을 했었다.

반면 차지은은 그걸 배려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됐어요. 저를 위해 거절한 척 하지 마세요.”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이도원은 불쑥 죄인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뜻은 아니었다.”

말마따나 차지은을 위한 거절은 아니었다. 이도원의 감정이 차지은과 같지 않았고, 그래서 거절한 것 뿐.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고, 망설이던 차지은이 말했다.

“그래도 감사해요. 오빠의 결정이 아니었으면 전 창피한 모습을 보였을 거예요. 이 많은 스태프들과 오빠에게도 피해를 줬겠죠.”

이도원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영화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참여하고, 좋은 작품을 위해 매달린다. 차지은의 감정 하나로 인해 모두에게 피해가 간다면 그건 그녀에게도 좋지 않았다.

“어쨌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동료배우님.”

차지은은 가시 돋친 미소와 함께 악수를 청했다.

피식 웃은 이도원이 그녀의 손을 잡고 흔들며 대답했다.

“그래. 멋진 작품 하나 건지자고.”

유태일 감독은 흐뭇한 미소를 그렸다.

‘도박이었는데… 다행이군.’

그때 검은색 에쿠스 한 대가 현장으로 들어섰다.

차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이는 바로 안유성이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스태프들이 너도나도 인사를 했다.

안유성은 인사를 받아주며 모니터가 있는 곳으로 왔다.

그에 유태일 감독이 일어나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안 선생님. 오셨습니까.”

안유성은 그 새 많이 핼쑥해져 있었다.

암에 걸린 사람은 빼빼 말라 죽어간다. 그리고 안유성이 그러한 과정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활기를 잃지 않고 직접 운전을 하고 연기를 한다.

“아, 유 감독. 내가 좀 일찍 왔나보군.”

유태일 감독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애들이 잘해줘서 예정보다 금방 끝났습니다. 딱 맞게 도착하셨어요.”

안유성이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분장 팀이 안유성에게로 다가와서 메이크업을 했다. 그리고 마침 촬영을 끝낸 이도원과 차지은이 모니터로 와서 인사를 꾸벅 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선생님- 안녕하세요.”

안유성은 고개를 끄덕이고 빙그레 웃었다.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선남선녀야.”

그는 별 뜻 없이 한 말이었지만 이도원과 차지은은 방금 전 고백이 생각나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반응을 수십 년 연예계 바닥에 있던 안유성이 놓칠 리 없었다.

“뭔가 있었나보군.”

유태일 감독이 시익 웃으며 말했다.

“좋을 때죠.”

본인들이야 심각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땐 그다지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촬영에 지장을 주면 문제가 되겠지만 잘 극복한 듯 보였다. 그런 눈치를 살피며 짓궂게 놀리는 유태일 감독을 안유성이 꾸짖었다.

“내가 보기에 자네도 좋을 때야. 누가 누구보고 좋을 때래? 그나저나 유 감독은 장가 안 가나?”

유태일 감독이 뜨끔해서 대답했다.

“여자가 있어야 가죠. 선생님이 한 명 소개해 주십시오.”

안유성은 함박웃음을 그리며 물었다.

“내가 연락하는 가장 어린 처자가 마흔여섯 인가, 일곱인가 하는데 유 감독 연상 좋아하나? 아직 결혼도 두 번 밖에 안 한 새색시야.”

이도원과 차지은, 장비를 만지던 스태프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오로지 유태일 감독만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선생님.”

그때 차지은이 까치발을 들며 이도원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저번에 비해 많이 마르신 것 같네요. 어디 편찮으신가가 봐요.”

작은 소리였기에 안유성에게까지 닿진 않았다.

이도원은 마음이 싸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많이 여위셨어.’

안유성은 하루가 다르게 여위어가고 있었다. 오죽하면 얼마 전 대본 리딩 때와 달라졌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말은 안유성의 상태가 날로 악화되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이도원이 무의식중에 근심 어린 표정을 드러내자 유태일 감독이 헛기침을 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럼 콘티 설명하겠습니다.”

조금 큰 소리에 이도원은 표정을 고쳤다.

이어서 유태일 감독의 콘티 설명이 쭉 이어졌다.

이번 장면에선 차지은이 빠지고 안유성이 들어온다. 이도원과 합을 맞추게 되는데, 그들이 할아버지와 손자의 정을 나누는 장면이었다. 먼저 ‘할아버지’ 역할의 안유성이 치매로부터 잠시 의식을 회복한다. 그 틈에 이도원이 안유성과 대화를 나눈다. 이때 두 사람이 얼싸안고 오열하는 장면이 감정의 정점이었다.

“안 선생님은 여러 번 비슷한 역할을 하셨고, 특히 도원이가 잘 끌고 가야돼.”

유태일 감독의 당부를 들은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원은 다소 굳은 표정이었다. 그는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셨기에 부정 비슷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비슷한 마음을 품은 상대라면 이상백이 그런 사람이었는데, 아무리 흡사해도 부정과 같을 수는 없었다.

‘얼추 같은 정도로는 안 돼.’

이도원이 스스로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을 연기한다면 결코 이도원만의 연기를 할 수 없을 터였다. 흉내 내는 정도로는 껍데기만 있는 연기가 되어버리고 만다.

<악마의 재능>에서 살인범 연기를 했을 때나 <우리의 심장>에서 오빠 역할을 했을 때와는 달랐다. 작은 감정을 확대시키는 것과 전혀 모르는 감정에 접근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아버지의 정…….’

떠올리려 해도 이도원의 마음속은 텅 비어있었다.

“잠시 시간을 주십시오.”

이도원이 요청했다.

처음 보는 모습에 유태일 감독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감이 없어?’

유태일 감독이 봐왔던 이도원은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다. 그런데 지금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의문이 든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콘티를 보았다.

‘연인 간 러브 씬 만큼이나 흔한 장면인데, 왜지?’

유태일 감독이 안유성을 보며 물었다.

“선생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안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유 감독의 판단이지. 난 괜찮네.”

배우들이 흩어졌다.

이도원이 등을 돌리는 순간 유태일 감독이 불렀다.

“잠깐. 도원이는 얘기 좀 하자.”

그에 이도원이 돌아서서 대답했다.

“네. 감독님.”

그를 빤히 바라보던 유태일 감독은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처음 보는 표정인데.”

이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잠깐 어지러워서요. 십 분 정도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저 때문에 대기시간이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유태일 감독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작품을 만드는 시간만큼은 감독과 배우가 한 몸이 돼야한다. 네가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면 따져 묻진 않겠지만… 지금까지 승승장구하며 만들어진 높은 자존심이 네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라.”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려 해도, 그는 자신의 문제를 밝히는 데 미숙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모든 상황들을 술술 처리해나가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리숙한 표정만 남았다.

그 순간 유태일 감독은 난 데 없이 소름이 돋았다.

‘그래. 이게 스물셋- 아직 어린 이십대 초반의 모습이지.’

지금껏 이도원이 보여준 모습들 때문에 나이를 잊고 있었다. 그는 항상 완벽하려 했고, 완전체에 가까운 모습만 보여 왔다. 하지만 배우란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쉽게 동화되고 불완전한 인간만이 다양한 역할들을 소화할 수 있다. 그걸 감추기 위해 화려함과 유명세로 무장할 뿐이다.

유태일 감독은 이 순간 이도원의 불완전한 부분을 끌어내야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 그는 심리학자도, 정신과의사도 아니었다.

‘감독이 배우를 다루는 법.’

유태일 감독은 고민했다. 그리고 결정했다.

“촬영 하자.”

이도원의 표정에 균열이 생겼다.

그를 똑바로 마주보며 유태일 감독이 덧붙였다.

“오래 기다린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것으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상황은 결정됐고 이도원은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망설이며 카메라가 있는 곳으로 가는 이도원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유태일 감독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안 선생님께 맡겨봐야지.’

상대 배우는 벽이 아니다. 연기를 주고받고, 호흡을 주고받는다. 그로인해 배우는 몰입한다.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의 연기를 보여준다.

‘지금까지 이도원은 혼자 연기를 해왔다. 상대가 반응하도록 유도하고 길잡이가 되어주었을 지언 정, 정작 자신은 반응하는 연기를 펼치지 못했어.’

유태일 감독은 확신했다. 그리고 이도원이 불안정한 지금이야말로 가장 좋은 연기를 만들 수 있는 적기라고 판단했다. 상대역이 안유성이라는 최고의 길잡이였기 때문이다.

< 실력과 능력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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