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력과 능력 (2) >
이도원과 노년의 배우는 어깨 위로 바스트 샷을 따고, 얼굴을 클로즈 업 하는 순으로 촬영을 했다. 그 후 문이 열리는 장면만 따로 찍었다.
다음은 차지은의 등장 씬부터였다.
이어서 유태일 감독이 지시를 내렸다.
“풀 샷부터 갑니다. 배우들 위치해주세요. 카메라 롤-.”
카메라가 보건소 물리치료실 안의 전경을 담았다.
이내 차지은이 문 앞에 섰다. 노인이 일전 그 자리에 그대로 앉고, 이도원 역시 노인의 발치로 가서 몸을 숙였다. 배우들이 모두 원위치하자 유태일 감독이 사인을 내렸다.
“레디- 액션.”
차지은을 발견한 이도원이 몸을 스르륵 일으키며 물었다.
“어떻게 오셨죠?”
“아, 네……. 의료지원사업 협조요청 차원에서 나왔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이도원이 불쑥 생각난 듯 말했다.
“잠깐 와서 할아버지 좀 잡아줘요.”
“예? 아니, 전 의료지원사업 협조요청 차원에서…….”
“알겠으니까 잠시 좀.”
차지은이 황당한 표정으로 묻자 이도원이 씩 웃었다.
“어서요.”
그녀는 얼결에 노인의 등을 잡아주었다.
이도원은 노인의 다리를 쭉 펴고 무릎과 가슴으로 지탱하며 손으로 꾹꾹 눌렀다.
“아야!”
노인이 고통스러운 반응을 보였지만 이도원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만 참으세요, 할아버지.”
그때 차지은이 이도원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게요. 싸인만 해주시면 되는데……. 제가 업무 중에 나온 거라 어서 들어가 봐야 하거든요?”
이도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물리치료를 계속했다.
비록 연기였지만 차지은은 왠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표정 위로는 섭섭한 감정 대신 황당한 기분을 표현했다. 뭐야? 하는 표정이 제법 잘 살았다.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인을 보냈다.
“컷. 오케이. 한 번 와서 보세요.”
배우 셋은 모니터링을 했다.
연기 호흡도 괜찮고, 제법 완성도 높은 장면이 나왔다.
물론 아직 연출에서 필요한 소스가 모두 버무려지지 않은 상태였기에 추가 촬영이 필요했다.
“이견 없으시면 여러 구도에서 촬영하고 다음 씬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배우들이 동의하자 촬영이 속개됐다.
각기 다른 구도에서 같은 장면을 촬영한 뒤 씬이 넘어갔다. 이제 이도원과 차지은이 제대로 된 만남을 갖는 장면이었다.
노년의 단역배우가 인사를 하고 먼저 빠졌다.
이내 이도원과 차지은이 마주섰다.
유태일 감독이 사인을 보냈다.
“카메라 롤-.”
카메라가 돌자 이도원이 몰입했다.
집중하는 그의 모습에 차지은은 심장이 떨렸다.
‘역시 도원 오빤 연기할 때가 제일 섹시해.’
문제는 그녀였다. 몰입에 지장을 받지 않도록 끊임없이 마음을 다스려야만 했다. 그쯤 되자 차지은은 이도원을 볼 때마다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난… 오빠를 좋아하는 듯.’
정작 이 사실을 모르는 이도원은 조금 불만이었다. 그는 뮤지컬이나 리딩을 하며 차지은의 역량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차지은의 마음이 아예 콩밭으로 가있다는 사실까지 눈치 챌 수는 없었지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게 은근히 보였다. 그러나 이도원은 섣불리 나무라지 않고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두 배우가 동상이몽에 빠져있는 이때, 유태일 감독이 지시를 내렸다.
“배우들 레디- 액션!”
그 순간 이도원의 입가에는 천진난만한 미소가 걸렸고 두 눈이 반짝였다. 그는 떼 묻지 않은 어린아이와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왜 오셨다고요?”
차지은은 리딩 때에 이어 또 한 번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속이 울렁거렸으나 마음을 다잡으며 배역에 몰입했다.
“아, 네. 마을회관에서 진행하는 의료지원사업 협조요청 차원에서 나왔습니다!”
이도원은 그녀를 빤히 보다가 손을 뻗었다.
“공문으로 발송하시지, 직접 오셨네요? 사업진행계획서 주세요.”
“여기요.”
차지은이 공문이 담긴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이도원은 봉투를 열어 사업진행계획서를 꺼내 읽었다. 그가 문서를 읽을 동안 정적이 흘렀고, 음향 감독이 매미 울음소리를 넣었다.
차지은은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서있었다.
서류를 모두 읽고 나서 책상 위에 둔 이도원이 물었다.
“오늘 저녁 식사, 시간 어때요?”
데이트 신청 방법은 픽업아티스트를 연상시켰지만 말투는 어색했다. 이성관계를 만들기 위해 힘쓸 여유가 없었던 캐릭터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리딩 때보다 캐릭터의 환경을 더 뚜렷하게 조성한 이도원의 세심한 연기가 돋보였다.
차지은은 심박 수가 올라가며 얼굴이 붉어졌다. 이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오히려 긍정적인 작용을 했다.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당황하며 대답했다.
“…아뇨, 오늘은 집에 들어가야 해서요.”
이도원은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고 온순한 성품이 얼굴 위로 드러나는 표정연기였다.
“알겠습니다. 식사는 다음으로 미루죠.”
친근한 데이트 신청을 받은 차지은이 문을 열고 나가려다 말고 몸을 돌리며 물었다.
“혹시 우리가 만난 적이 있던가요?”
이도원은 뜻밖의 질문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은은한 미소를 드리우며 아리송하게 대답했다.
“전생을 거슬러 오르다보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은 구면이라고 하더라고요.”
차지은은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사람이네.’
그런데 그 속마음을 전달하기에는 눈빛과 표정이 약했다. 턱을 괴고 진지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던 유태일 감독이 일단 컷했다.
“컷. 엔지.”
그는 손짓해서 배우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이도원 앞에서 차지은에게 대놓고 말했다.
“마음이 딴 데 가있어. 왜 그러지?”
일전까지는 애매했는데 대사가 늘고 장면의 중심으로 들어오자 티가 났다. 그건 유태일 감독 뿐 아니라 이도원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이도원은 거들지 않고 자리를 피해주었다. 배우들을 컨트롤하는 일은 오로지 감독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이도원이 모니터 앞을 떠나자 차지은을 빤히 바라보던 유태일 감독이 피식 웃었다. 갑자기 무거운 분위기를 풀어버린 그가 물었다.
“도원이 좋아하지?”
차지은은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을 본 유태일 감독이 덧붙였다.
“난 알아야 된다. 이미 마음속으로 네 감정을 확신하고 있지만 직접 확인하는 것뿐이야. 혼자 판단하면 오해가 될 테니까 말이다. 솔직하게 말해줘야 소통하기가 편해.”
잠시 뒤, 그녀가 결심한 듯 대답했다.
“…네.”
유태일 감독은 확신하고 있었다는 말처럼 별로 놀라지 않고 대답했다.
“좋아. 하지만 촬영은 공동작업이니까 지장이 있어선 안 돼. 두 사람이 좋은 관계를 맺든, 동료로 남든 서둘러 감정을 정리하길 바란다. 짝사랑을 하면 상대의 반응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 씩 조울증이 찾아오지. 지금 같은 어중간한 감정으로는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어.”
다소 가혹한 말이었지만 영화를 위해서는 필요한 결단이었다. 차라리 관계가 정립이 되면 어떤 쪽으로 결정이 나든 미치는 영향이 덜할 것이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한 가지 감정만 통제하면 되니까. 그러나 애매한 감정은 지속적인 영향을 주며 집중력을 저하시키기 마련이다. 이대로 연기를 할지, 혼자 감정을 정리할지, 상대와 대화를 시도할지 선택은 본인의 몫이지만 작품을 위해서라면 용기가 필요한 때였다.
차지은은 다소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정리할게요.”
차지은은 지금 설렘을 즐길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걱정하던 일이 조금 먼저 일어난 것일 뿐 대수로울 건 없었다. 그녀는 배우 이전에 사람이었지만, 오래 전부터 여자이기 전에 배우로서 살아왔다. 어떤 방법으로 감정을 정리할지는 그녀의 선택에 달려있었다. 분명한 건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표정 변화를 바라보던 유태일 감독은 내심 안도했다.
‘다행이군.’
유태일 감독은 이도원과 차지은, 두 사람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그는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삼십 분 주지.”
차지은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도원에게 다가갔다.
대본 위로 그림자가 지자 이도원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차지은은 더 깊어지기 전에 서둘러 관계정립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연기를 하는 시점에서 통제가 안 되는 감정을 스스로도 느꼈기 때문이다.
‘내 감정으로 인해 모두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어.’
차지은은 촬영 내내 몰입하지 못할 바에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쪽을 선택했다.
“오빠.”
이도원의 시선을 받은 차지은은 심장이 펄떡거렸다. 머리가 하얘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럼에도 겉으로 표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좋아해요.”
뜻밖의 말에 이도원은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나 이내 얼굴색을 되찾으며 대답했다.
“잠깐 앉아.”
그는 차지은의 손목을 덥썩 잡아 곁에다 앉히고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덧붙였다.
“그렇게 실연당한 여주인공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있으면 스태프들이 다 쳐다보잖아.”
차지은은 말없이 얼굴을 떨구고 이도원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도원은 고개를 저으며 대본을 손에서 놓고 말했다.
“우선 고맙다. 네 감정은 존중해.”
차지은은 뒷말을 듣기가 무서워졌다. 여러 말을 부연한다는 건 거절의 의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짐작을 애써 부정하며 그대로 앉아 이도원의 음성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이도원이 부드러운 어조로 이어갔다.
“…하지만 난 지금 누굴 만날 시기가 아니야. 나는 아직 내 앞날과, 내 가족을 생각하는 것조차도 소홀할 만큼 부족한 사람이다. 네 마음에 보답할 자신이 없어. 내 대답은 너 아닌 다른 상대라도 똑같았을 거야.”
이도원은 동요하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빤… 아무렇지 않네.’
차지은은 자신의 고백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원망스러웠다. 그렇다고 탓할 수도 없었다. 억울한 마음에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한편 이도원은 굳이 울고 있는 그녀를 위로하지 않았다.
‘정리할 시간을 줘야겠지.’
이도원은 고개를 돌리며 일어났다. 그는 자리를 피해주며 멀찍이 떨어진 의자에 가서 앉았다.
‘마음이 불편하네.’
이도원이 고백에 대한 답을 바로 준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차지은 본인의 감정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캐릭터의 감정이 들어올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안유성의 유작이 될지도 모르는 이번 작품을 사사로운 감정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한편 근처에서 오늘 촬영 분을 모니터링 하던 유태일 감독이 불쑥 물었다.
“괜찮겠나?”
그 말에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회복할 겁니다.”
이도원이 지금까지 지켜봐온 차지은은 강인한 심지를 가지고 있었다.
유태일 감독 또한 차지은의 강점을 알고 있기에 선택을 종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마음은 편치 않은지 회의적으로 말했다.
“그렇겠지. 우리도 참… 웃기지 않나? 영화가 뭐라고 감독이 남의 연애사에 간섭해 이래라저래라 하고, 간섭 받은 여배우는 개인감정을 정리하려고 고백을 해버리고, 또 고백 받은 대상은 한술 더 떠서 그 자리에서 후회할 수도 있는 거절을 하는 건지.”
이도원은 쓰게 웃었다.
두 사람의 남녀가 연인이 되기까지 마음 뿐 아니라 상황과 시기도 적절히 맞아떨어져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도원은 무분별하게 관계를 만들면 반드시 탈이 난다고 여기는 주의였다.
‘난 배우다.’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인연이란 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고, 두 사람이 인연이라면 언젠가 또 기회가 올 것이다. 다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 실력과 능력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