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20화 (120/178)

< 실력과 능력 (1) >

그때 음식이 나왔다.

세 사람은 별말 없이 식사를 했다. 유태일 감독이나 이도원은 안유성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고, 차지은은 두 사람이 조용하니 입을 닫은 것이다.

국밥을 깨끗이 비운 유태일 감독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지은이는 촬영 스케줄 도중에 레드엔터와 계약만료가 된다고?”

차지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여기 도원 오빠 제안을 받고 백 프로덕션으로 옮기려고 마음을 정해둔 상태예요.”

유태일 감독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한솥밥을 먹게 됐구나.”

이도원은 백 프로덕션이 머지않아 발표할 백 엔터테이먼트 창립과 공동이사 취임에 대해 말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현재진행 중이이라지만 아직 공론화 된 사항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니니…….’

이도원은 괜스레 설레발을 쳐봐야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 순간 유태일 감독이 물어왔다.

“그래서… 레드엔터와의 분쟁은 잘 해결된 건가?”

“일단락은 됐습니다. 앞으로 부딪히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요.”

이도원의 대답을 들은 차지은이 한숨을 푹 쉬었다.

“오빠가 고생하네요.”

그 말에 이도원은 대수롭지 않게 미소 지었다.

“박아현도 내일 일자로 계약이 풀린다. 회사를 옮긴 건 다음 주에나 발표할 예정이야. 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고 했지?”

차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현 언니랑 잘 알죠. 드라마도 같이 했었고.”

그때 유태일 감독이 이도원에게 물어왔다.

“박아현은 저번 영화 끝나고 광고 쪽에서만 활동한다고 들었는데… 회사를 옮기느라 잠잠했던 거였군. <악마의 재능> 때부터 진행하던 얘기가 잘됐나봐?”

“네. 감독님 도움이 컸습니다.”

이도원은 씩 웃으며 다시 차지은을 보았다.

“그러니까 레드엔터 쪽은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아직 엔터사업만으로는 대적할 수 없지만 투자 사업을 포함하면 크게 뒤지지 않는다.”

고개를 끄덕인 유태일 감독이 거들었다.

“감독들 사이에서도 백 프로덕션은 꽤 괜찮은 투자사다. 이번 영화도 백 프로덕션의 도움이 컸지.”

현역감독 중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유태일 감독의 말은 큰 신뢰를 줄 수 있었다.

이도원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인사를 대신했다. 그는 차지은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직접 투자를 진행하기 때문에 투자사들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더러 정보력도 대형기획사 못지 않지. 폭 넓게 작품을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야. 난 백 프로덕션이 좋은 보금자리가 될 거라고 확신한다.”

유태일 감독은 청산유수로 말하는 이도원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아주 영업을 하는구먼. 하지만 백 프로덕션 소속 배우가 백 프로덕션 자랑을 하는데, 백날 설명해도 누가 믿어?’

그렇게 생각했는데…….

멀리도 아니고, 바로 여기 믿는 사람이 있다.

차지은은 벌써 반쯤 홀린 표정이었다.

“자세한 건 계약 때 다시 듣겠지만, 오빠만 봐도 알죠."

세 사람이 놓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차지은은 원래 허술한 성격이 아니었다. 다만 백 프로덕션이 조성할 환경에 홀리기 이전에, 이도원에게 홀렸다는 말이 더 정확한 것이다.

*

유태일 감독 세 번째 작품 <바람> 촬영 당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차지은은 화장대 앞에 앉았다.

배우들은 현장에 가면 다양한 메이크업을 받는다. 따라서 평소에는 화장을 신경 써서 하지 않는다. 그래도 피부 관리나, 필요하면 시술도 받기 때문에 맨 얼굴도 화장한 것 못지않게 청초한 상태를 유지한다.

"휴. 오랜만이네."

차지은은 먼저 입술을 칠했다.

이 정도는 평소에도 한다.

거울을 보자 눈썹이 눈에 걸렸다.

눈썹을 그리고 나자 이제는 쉐딩이 하고 싶다.

충분히 예쁜 얼굴로도 더 예뻐지고 싶은 여자의 본능을 되찾은 차지은은 섬세하게 손을 놀렸다.

평소 여성스러운 성격도 못 되는데다 항상 스케줄이 치이기 때문에 직접 세심하게 화장을 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현장에 도착하면 어차피 전부 지우고 새로 해야겠지만, 도착하자마자 맨얼굴에 가까운 상태로 이도원과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때 전화 벨이 두 번째 울렸다.

"여보세요-."

차지은이 받자 매니저가 다급한 목소리를 냈다.

"빨리 나와. 지금도 늦은 거 몰라?"

"죄송해요. 지금 나갈게요!"

그녀는 화장대 거울을 보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화장이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시간을 더 지체할 수는 없기에 겉옷을 걸치고 으리으리한 저택 현관을 나섰다. 넓은 정원을 지나 대문 밖으로 나가자 흰색 밴 앞에서 매니저가 전전긍긍하는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차지은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밴에 올라탔다.

매니저가 시동을 걸며 백미러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화장했어?"

"아, 아녜요."

차지은은 서둘러 후드를 뒤집어쓰며 대본으로 얼굴을 가렸다. 화장하다 늦은 것을 알려봐야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유심히 뜯어보던 매니저는 고개를 가로젓고 운전을 했다.

‘역시 불편해.’

차지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역 때부터 오랜 시간 함께한 매니저였다. 그러나 차지은이 백 프로덕션으로 이적을 결심하면서 마음의 거리가 생겼다. 매니저로서는 대기업을 버리고 중소기업으로 이직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더구나 근래 차지은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고스란히 욕을 들어먹었기에 감정도 좋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 이동한 밴은 한 시간 후 경기도 광주에 소재한 촬영지에 도착했다.

‘서울 인근에도 이런 곳이 있네.’

차문을 열자 시골 냄새가 훅 풍겨왔다.

촬영차들이 보였고 한쪽에 이도원이 앉아있었다.

그때 헤드레스트를 끼고 뒤돌아본 매니저가 말했다.

“얼굴 화장 신경 쓸 시간에 연습을 더 해라.”

차지은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안 볼 사이라 이거지? 괜히 시비야.’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알겠어요.”

밴에서 내린 차지은은 이도원에게로 갔다.

“오빠, 저 왔어요.”

이도원은 대본 너머로 차지은을 힐끔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본 한 번 맞춰볼까?”

그는 차지은이 모처럼 꾸민 얼굴 따위에는 전혀 관심 없는 태도였다.

‘그럼 그렇지.’

차지은은 내심 생각했지만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차지은은 대본을 들고 이도원 곁에 냉큼 앉았다.

이도원이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촬영 시간이 지체되지 않았다면 늦었겠네. 될 수 있으면 촬영은 늦지 마.”

그가 나무라자 차지은은 서운한 마음이 샘솟았다.

“네, 네. 차가 막혔어요.”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핑계대지 말고. 시작하자.”

그 뒤 두 사람은 대사를 주고받으며 간단한 호흡을 맞춰보았다. 오늘 촬영할 장면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씬이었다. 촬영장비가 모두 보건소로 들어가고, 안으로부터 유태일 감독이 나왔다. 그를 발견한 차지은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유태일 감독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이도원에게 말했다.

“배우 들어가세요.”

그 지시에 따라 이도원은 복지관 안으로 들어갔다. 촌구석의 작은 보건소 외관은 퀴퀴한 느낌이었다. 그와 상반되게 스태프들이 세팅해 놓은 안쪽의 인테리어는 깔끔했다. 이도원은 실내를 둘러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소품은 캐릭터를 나타낸다. 깔끔하고 알뜰한 성격이야.’

극중 ‘이도원’ 역할을 하기 위해 이도원은 머릿속에 캐릭터를 그렸다. 시나리오를 읽으며 떠올렸던 이미지에 살을 붙이고 사소한 습관, 버릇, 말투 등을 점검했다.

현장에 들어서자마자 집중하는 이도원을 보며 유태일 감독이 남모르게 웃었다.

‘뭐 하나 대충 놓치는 법이 없군.’

이어서 그가 물었다.

“도원이 준비 됐니?”

이도원이 보건소 중앙에 위치한 책상에 기대어 서며 질문했다.

“이쯤이 좋지 않을까요?”

유태일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짓했다. 그러자, 이도원에게 물리치료를 받는 역할의 단역 배우가 투입됐다. 단역 배우는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였다.

이런 분들이 있다. 이도원은 타임 슬립 전, 촬영지로 이동하는 팀버스 안에서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연령층이 다양한 보조출연자나 단역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다. 특히 노인들 중에는 생업이 따로 있으면서 현장이 좋아 평생을 떠나지 못하는 배우들이 있었다. 심지어 생활전선에서 은퇴한 뒤에도 현장에는 꼬박꼬박 출근하는 배우들이었다. 오만 원, 십만 원 받으면서 젊은이들도 하기 힘든 촬영을 해내는 이들은, 단 한 순간 화면에 나오더라도 만족했다. 푸대접을 받으며 고생을 바가지로 해도 오로지 촬영이 즐겁고 현장이 즐거운 것이다.

‘이런 분들이야말로 진짜 배우지.’

대부분 연륜이 있고 욕심을 버려서 연기도 자연스럽다.

이도원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쿠, 나야말로 잘 부탁드리죠. 유명한 배우님 아닙니까?”

노년의 배우가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쾌활하게 말했다. 나이가 들어도 에너지가 넘치는 그를 보자 이도원은 마음 한 구석이 찌릿했다.

‘어르신들도 이렇게 열정이 넘치시는데, 과연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불태우고 있나?’

자문하고 반성했다.

이도원은 눈을 슥 감으며 욕심을 땅에 내려두었다. 대본을 잊었다. 그는 연기를 잘하려고 하지 않았다. 눈앞의 상대에게 에너지를 쏟는 데에 집중하고자 했다.

마침내 유태일 감독의 사인이 떨어졌다.

“카메라 롤.”

카메라가 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유태일 감독이 다시 말했다.

“배우들, 레디?”

이도원이 눈을 떴다.

“액션!”

노인은 의자에 앉아 살짝 굽어진 등허리를 카메라에 드러냈다. 그 앞 책상에 기대어 선 이도원이 팔짱을 풀며 노인의 발치에 가서 쪼그려 앉았다.

“다리 쭉- 펴보세요.”

이도원은 이 순간을 위해 한동안 물리치료사들이 읽는 전문서적을 읽고 직접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카메라에 잡힐지, 잡히지 않을지 몰라도 이도원은 그때 보고 배운 대로 노인의 다리를 매만졌다.

“어휴, 선생님. 시원하구먼.”

노인이 감탄했다. 대본에 없는 대사였지만 진심이 우러나오는 말투와 음성은 상황을 자연스럽게 풀어주는 좋은 애드리브가 되었다.

감독이 배우가 연기를 할 때 개인적인 판단을 막는 이유는 돋보이려고 과한 애드리브를 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낸다.

이도원은 그 영향에 순응해 가벼운 미소를 그리며 대답했다.

“하하, 할아버지. 제가 서울에 있을 때 별명이 얼음왕자였어요. 왜 얼음왕자냐… 얼음찜질을 하는 것처럼 아프지 않게끔 시원한 물리치료를 해드리기 때문에요.”

“얼씨구?”

노인이 추임새를 맞추었다.

이 역시 두 배우의 애드리브였다. 보고 있던 유태일 감독과 스태프들의 입가로 웃음이 걸렸다.

‘역시.’

이도원은 적절하게 애드리브를 멈추며 대사의 흐름대로 몸을 실었다.

“할아버지. 또 내가 알려준 스트레칭 제대로 안 했죠? 근육이 뭉쳤네, 근육이 뭉쳤어.”

“미안해요, 선생님- 하하하. 내가 글쎄, 밭일은 게을리 안 해도 선생님이 알려주는 스트레스인지 뭐시긴지는 영 안하게 되오.”

노인의 재치 있는 말에 푸근한 미소를 드리운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차지은이 등장했다.

유태일 감독이 사인을 보냈다.

“컷.”

그는 세 사람에게 말했다.

“느낌 좋습니다. 바스트 샷 따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 실력과 능력 (1)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