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19화 (119/178)

< 새로운 국면 (5) >

이도원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간암?’

본인의 유작이란 말을 남일 이야기 하듯 말하는 안유성의 모습이 쉬이 납득가지 않았다.

이도원은 가장 평범한 반응을 보였다.

“그럼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치료 받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하더군.”

안유성이 웃으며 대답했다.

“죽기 전에 좋은 작품을 만난 건 배우로서 큰 행운이지. 물론 이런 말로 자네에게 부담을 지우고 싶진 않네.”

“그럼 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도원은 뒷말을 삼키며 안유성을 보았다.

그를 마주본 안유성이 대답했다.

“앞으로 함께 촬영하게 될 텐데, 알고 임하는 쪽이 낫지 않겠나?”

그건 그랬다.

만약 촬영이 끝나고 안유성의 유작임을 알았다면 섭섭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좀 더 열심히 할 걸, 좀 더 잘할 걸 하면서. 그러나 이제는 유작인 줄 몰랐다는 변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최선 이상을 해내고, 완벽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것만이 안유성에게 최고의 선물을 안겨주는 길이었다. 의미심장한 이도원의 표정을 읽은 안유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십 대는 죽음에 대해 알기에 너무 어리지.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바로 눈앞에서 바라보며 호흡을 맞추게 되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게야.”

안유성은 듣기만 해도 섬뜩한 말을 서슴지 않고 했다. 연기에 대한 열정과 집착이 만들어낸 결과 같았다. 그러나 상식적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병마로 인해 이상증세를 보이는 걸지도 몰랐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안유성의 모습을 접한 이도원은 심장의 열기가 일시에 연소되는 듯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감독님은 알고 계시나요?”

“물론이네.”

안유성은 고개를 끄덕이고 덧붙였다.

“마지막 무대를 가장 훌륭하게 만들어줄 재량이 있는 감독이지. 최고의 시나리오에 대한 예우로 최선을 다할 생각이야.”

이도원은 안유성과 뼈저리게 슬플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죽음에 관해 믿기지도 않을뿐더러 기분이 묘했다. 그는 여러므로 복잡한 속내를 감추고 말했다.

“저 또한 부족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가 본 적 없는 연기를 보여주게.”

그렇게 말한 안유성은 리딩 룸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도원은 기대를 받자 어떤 흥분에 사로잡혔다. 이번 작품이 그의 인생에 특별한 영화가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미친놈이다. 좋아할 일이 아닌데…….’

머지 않아 배우들이 모두 착석하자 리딩이 재개됐다.

이윽고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중단했던 부분부터 이어서 계속하겠습니다.”

그는 차지은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내며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이제부터는 그녀 자신만의 싸움이었다.

차지은은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아뇨. 오늘은 일찍 집에 들어가야 해서요.”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씩 웃었다.

“알겠습니다. 식사는 다음에 하죠. 또 볼 텐데요.”

초면인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행동하며 데이트신청까지 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린 차지은이 물었다.

“혹시 우리가 만난 적이 있던가요?”

이도원이 모호하게 대답했다.

“전생을 거슬러 오르다보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은 구면이라고 하더라고요.”

차지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고, 차지은은 이도원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장면이 지나가고 이도원이 내레이션을 넣었다.

“이별해도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우린 모두 구면이고, 또 다른 곳에서 만나게 될 테니까.”

유태일 감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꽤 흡족한 표정이었다.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추는 것만으로 그림이 될까 걱정했는데… 예상보다 더 완벽해.’

<우리의 심장> 때와는 또 달랐다. 두 사람은 중 고등학생이던 그때 보다 성숙했고, 남매 아닌 연인으로 등장해도 손색이 없었다.

의상과 조명으로 잘만 손질하면 영화 분위기를 거의 완벽하게 살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유태일 감독은 머릿속으로 견적을 냈다.

‘좀 촌티 나게 입히면 아주 자연스럽고 평범해 보이겠어. 둘 다 톤이 비슷한 게, 색깔로 치면 흰색이다.’

배우들 중에는 간혹 꾸미면 꾸미는 대로 다양한 배역을 소화할 수 있는 얼굴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차지은과 이도원은 개성 없는 듯해도 자세히 보면 누구 보다 예쁘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뜯어볼수록 매력적인 두 사람을 빤히 보던 유태일 감독이 흡족한 미소를 그렸다.

‘배우 얼굴이야.’

이미지가 너무 강하면 못 쓴다.

배역 자체가 한정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반면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는 어느 영화에 어떤 역할로라도 섭외가 가능하다.

거기다 연기력까지 받쳐준다면 말할 것도 없었다.

“다음, 조연들과 얽히는 씬.”

이어지는 유태일 감독의 지시를 따라 이도원과 주변인물들이 대사를 주고받고, 차지은과 주변인물들이 대사를 주고받았다. 대부분이 낯선 얼굴의 신인들이었음에도 유태일 감독이 직접 연극판에서 섭외한 배우들이다 보니 연기력이 남달랐다. 연극에 물들어 살짝 어색하던 부분도 대사 한두 마디 만에 지워졌다.

‘실력파들이다.’

이도원은 단번에 그들의 수준을 알아보았다. 실력이 있음에도 지금까지 이름을 날리지 못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들이 있겠지만 확실한 건 그들 모두 노련한 연기를 보여주는 좋은 배우들이란 사실이었다.

리딩 시간은 세 시간을 향하고 있었다. 점점 심신이 지칠 시간, 유태일 감독이 안유성에게 근심 어린 표정을 보냈다.

‘계속하지.’

안유성이 가벼운 미소를 그리며 표정으로 말했다. 다소 창백해진 얼굴과는 상반된 반응이었다.

유태일 감독은 그 의지를 꺾지 않았다.

“다음, 도원이랑 안 선생님, 지은이 들어갑니다.”

세 사람이 마을 회관에서 조우하는 장면이었다. 치매 기운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안유성이 차지은에 의해 마을회관으로 인도되고, 소식을 들은 이도원이 달려오는 씬이었다. 먼저 안유성이 풀린 동공으로 해맑게 웃으며 대사를 쳤다.

“엄마!”

뜻밖의 부름에도 차지은은 생글생글 웃으며 자연스럽게 받아주었다.

“네, 할아버지.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어요?”

크고 부드럽게 묻는 목소리가 노인을 상대하는 사회복지사를 잘 나타내고 있었다. 그녀는 이어 말했다.

“할아버지. 손자 분이 오고 있는 중이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셨죠?”

안유성은 만면에 즐거운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이도원이 등장하며 대사를 쳤다.

“할아버지!”

이도원은 차지은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일순 나타났던 초조한 얼굴색을 지우며, 그는 안유성에게 따뜻한 얼굴로 다가갔다.

“할아버지. 몸은 좀 괜찮아?”

안유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누구세요?”

“나에요. 도원이. 왜 그래 또…….”

이도원은 고개를 숙이더니 코로 숨을 빨아들였다. 답답한 심정을 참는 듯 보이기도, 슬픔을 참아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니면 둘 다일까?

이도원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왜 여기 이러고 있어요? 집에 가자, 할아버지.”

그가 대본을 잡은 반대 손을 뻗어 잡아끄는 시늉을 했다. 그 타이밍에 안유성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들어왔다.

“싫어! 나 엄마랑 있을 거야!”

그는 차지은을 바라보며 소란을 피웠다.

“엄마! 이 아저씨 누구야?”

안유성의 돌발행동에 차지은은 그를 달래며 말했다.

“할아버지, 진정하세요. 할아버지.”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이도원의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무어라 형언하기 힘든 감정을 얼굴 위로 그리고 눈빛으로 꺼냈다. 그러자 감정이 입체적으로 전달됐다.

‘표정연기…….’

지켜보던 유태일 감독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몰입해서 시나리오를 쓰며 혼자만 들락거리던 골방의 문을 이도원이 다른 이들에게도 활짝 열어준 듯 했다. 그는 유태일 감독의 가슴 속에만 머물던 감정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어서 이도원의 답답한 외침이 터졌다.

“할아버지!”

그는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안유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지마, 할아버지. 우리 집에 가자.”

안유성이 마주 소리를 질렀다.

“싫어! 여기 있을 거야! 엄마…….”

이도원이 안유성을 껴안으며 어깨로 입을 막는 장면이었다. 움직임은 생략했지만 이도원의 머릿속에서는 이런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할아버지.”

이도원은 구겼던 표정을 펴며 멍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말하는 건지, 할아버지에게 말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위로를 던지며 눈앞에 훤한 안유성의 어깨 너머로 차지은을 바라보았다.

“오늘 일은 기억에서 지워주세요.”

차지은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며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유태일 감독은 소리를 살짝 무릎을 쳤다.

‘그래, 잘 따라가고 있다.’

이도원과 안유성, 차지은의 연기가 삼박자를 완벽히 이뤄야만 자연스러운 장면이 나온다. 그런 상황에서 차지은은 다른 두 사람의 호흡에 잘 따라가고 있었다. 비록 무난하게 분위기를 맞추는 정도였지만, 이도원과 안유성의 압도적인 연기력을 감안했을 때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었다. 차지은이 좋은 연기를 보여줄수록 이도원도 몰입하기가 편했다.

그는 대사를 이어갔다.

“아마 할아버지가 정신을 차리면 많이 창피해할 겁니다.”

감정을 한껏 죽이려 애쓴 목소리였다.

칼칼한 쉰 소리가 그걸 나타냈다.

아주 세심하게 관객의 마음을 파고든다.

작은 부분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이도원의 연기를 본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뭐 하나도 버릴 구석이 없다.’

다른 배우들도 입을 반쯤 열고 세 배우의 열연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리딩에 참여한 배우가 아닌, 한 명의 관객의 시선으로 몰입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 선생님은 그렇다 쳐도, 이도원이 정말 괴물은 괴물이구나.’

한 배우가 생각했고 대부분의 생각도 감탄을 벗어나지 않았다.

리딩 룸 안은 한 차례 태풍이 지나간 듯 했다.

마을회관에서의 장면이 마무리되자 유태일 감독이 다음 씬으로 넘어갔다.

“조연들, 활약해주세요.”

유태일 감독의 지시에 해당 씬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한 층 열연을 보여주었다. 세 사람의 연기를 보고 자극을 받은 것이다. 그저 리딩이니까 적당히 하면 된다는 생각은 애저녁에 머릿속을 떠나버렸고, 대신 실전 보다 더한 긴장감을 갖게 됐다.

‘이런 시너지 효과라니… 기대 이상이군.’

유태일 감독은 남모르게 흡족한 미소를 그렸다.

*

다섯 시간 가까이 진행된 리딩이 끝났다.

연기를 하는 동안 누구보다 활력이 넘치던 안유성은 피로가 몰려오는지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주름도 한 결 짙어진 듯 했다. 따라서 그는 가장 먼저 리딩 룸을 떠났다.

배우들과 함께 안유성을 복도까지 배웅한 유태일 감독이 이도원과 차지은에게 말했다.

“둘 다 시간 괜찮으면 오랜만에 식사 한 끼 할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슬슬 뱃속에서 꼬르륵 아우성을 치려던 찰나였다.

이도원이 냉큼 웃으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차지은 역시 배를 잡고 배시시 웃었다.

“저도 좋아요. 그렇잖아도 배고파서 혼났어요.”

식사자리가 급하게 결정된 세 사람은 배우들과 인사를 나누며 백 프로덕션을 나섰다. 밖으로 나가자 유태일 감독이 이도원에게 말했다.

“홈그라운드니까 맛 집 한 번 안내해봐.”

“제가 청담동 네비게이션이긴 하죠.”

추임새를 넣은 이도원은 별 다른 스케줄이 없을 때 오준식과 종종 가는 순대국밥 집을 떠올리고 물었다.

“두 분, 순대국 괜찮으세요?”

다행히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운 거리였기에 세 사람은 도보를 이용했다.

순대국밥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전화가 걸려온 차지은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때마침 기회가 생긴 이도원은 조심스레 물었다.

“안 선생님… 소식 알고 계시죠?”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뜻밖이었어. 삶의 끝에서 병원 대신 현장을 선택하신 건 안 선생님답다고 생각했지만, 많은 감독들과 친분이 있는 안 선생님께서 굳이 내 작품을 선택하실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든.”

그는 높낮이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사실 이도원이나 유태일 감독이나 안유성과 깊은 친분이 있던 사이가 아니었다. 따라서 안유성이 위중한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에도 애석한 감정이 들 뿐 받아들이는 자체가 힘들진 않았다.

유태일 감독 역시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우리의 심장> 이후로 드림팀이 모였군. 스태프들도 그때 그대로니까 촬영하기에는 여러므로 편할 거야. 난 안 선생님께서 만족할 만한 작품을 만들고 싶고, 두 주인공 모두 제 역할을 톡톡히 해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렇게 될 겁니다.”

그 사이 차지은이 돌아왔다. 그녀의 등장에 유태일 감독과 이도원 모두 안유성에 관한 내용을 더 언급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본인이 알리기도 전에 밝히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유태일 감독은 자연스레 화제를 돌리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실력이 많이 늘었더구나.”

차지은이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도원 오빠에 비하면 아직 한참 부족하죠.”

감히 안유성을 상대로 들진 못했다.

그녀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안 선생님께서 절 몰라보시더라고요. 좀 서운했지 뭐예요? 그래도 아역 때 시트콤도 함께하고, 손녀처럼 예뻐해 주셨는데…….”

차지은의 말을 들은 유태일 감독과 이도원은 같은 생각을 했다.

‘안 선생님의 일이 알려지면 충격을 받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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