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국면 (4) >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도원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유성은 등장만으로도 리딩 룸 안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그가 보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도 자리의 모든 배우들이 바짝 긴장한 것이다.
그건 차지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딱딱하게 경직된 표정으로 안유성의 눈치를 살폈다.
유일하게 단 한 사람, 이도원 만큼은 흥미진진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심장이 쫄깃하네.’
배우들을 한 눈에 쓸어본 유태일 감독은 빙긋 웃었다. 그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구성한 지휘자처럼 말했다.
“전 이곳에 계신 분들이 이번 영화를 성공으로 이끌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어렵게 모신 분들이고, 그래서 더욱 우리 모두에게 의미 있는 영화가 될 것입니다. 아직 제목미정으로 대본이 배부돼서 당황스러우시겠지만… 리딩을 보고 크랭크 인 하기 전 확정할 생각입니다.”
그는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시작하죠. 리딩은 첫 씬부터 순서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워낙 급하게 진행된 리딩이기 때문에 대본을 확인하면서 감정 잡을 시간을 십 분 드리겠습니다.”
이도원은 왠지 유태일 감독이 일부러 대본 배부와 리딩 사이의 틈을 적게 두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90년대 멜로의 향이 짙은 영화라서 구성 자체는 단순했다. 즉, 대사와 배우들의 연기로 끌어가야 하는 영화란 의미였다. 그러자면 배우들이 가진 연기력을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연출을 해야 하고, 이번 기회를 통해 배우들 개개인 본연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보려는 의도에서 촉박하게 일정을 잡았다는 추측을 했다.
‘보통 치밀한 분이 아니니 충분히 그럴 만 해.’
이도원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대본을 보았다.
주인공 ‘이도원’은 치매를 앓는 할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으며 낮에는 보건소의 물리치료사다, 또한 저녁에는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구청해서 진행하는 심리치료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여주인공 ‘차지은’은 마을복지회관 소속으로 노인복지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마을의 사회복지사이다. 겉으로는 누구보다 밝아 보이지만, 매일 밤잠을 설칠 만큼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상태다.
두 사람은 우연한 계기로 만나게 되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주인공 ‘이도원’이 루게릭 병에 걸리게 된다. 남모르게 죽음을 준비하는 ‘이도원’과 남모르는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차지은’은 서로를 치유한다.
주인공 ‘이도원’은 악조건 속에서도 긍정적인 모습을 잃지 않고, 결국 자신이 건강할 때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둔 채 소리 없이 ‘차지은’ 곁을 떠난다.
또한 ‘차지은’은 ‘이도원’이 떠난 당시 괴로워하지만 세월이 지난 뒤 오히려 그 시절의 사랑과 아픔을 통해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모든 것은 잊혀지고, 아름다운 잔재만이 남아 추억이 된다는 것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이 영화가 특별한 점은 이 모든 상황들을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하게 느껴지도록 아주 일상적인 모습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화려하지도, 무겁지도 않게 담담하게 진행된다는 점이었다.
‘유태일 감독은 정말 미쳤어.’
이미 처음부터 끝까지 두 번이나 읽었던 대본인데도 볼 때마다 새로웠다. 시나리오만큼만 연기와 연출이 뒤따라준다면 슬픈 내용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봐도 또 보고 싶은 영화가 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건 인생 작이다.’
평생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작품.
이도원은 확신했고, 유태일 감독이 입을 열었다.
“영화 도입부 도원이의 내레이션부터 시작합니다. 준비되시면 1-1 시작해주세요.”
이도원은 눈앞에 펴놓은 대본에서 눈을 뗐다.
이미 머릿속에 모든 내용과 대사들이 나열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뇌리에 맺힌 내용과 대사들은 가슴으로 와서 스며들었다.
이도원은 눈을 감고 자신을 시나리오 속으로 밀어 넣었다. 주변의 풍경이 바뀌며 극중 ‘이도원’과 완전히 일치된 순간, 그의 입이 열렸다.
“학창시절, 나는 통학버스 차창에 기대어 항상 생각했다. 이대로 버스를 타고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길. 눈을 감으면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가 계신 곳에서 다시 눈 뜨길 꿈꿨었다.”
안유성이 미소 짓고, 차지은은 고개를 내저었다.
물 흐르듯 리딩 룸 안을 떠다니는 목소리가 심금을 울리는 것이다.
한편 이도원의 연기를 직접 본 적 없는 다른 배우들은 눈을 치켜떴다.
‘단순한 내레이션 수준이 아니잖아?’
유태일 감독은 날카로운 눈빛을 내며 내심 생각했다.
‘역시 괴물이야. 매번 볼 때마다 다른 사람처럼 느는군.’
다른 배우들이 더딘 것이 아니다. 이도원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이도원이 다음 장면의 대사를 쳤다.
“할아버지. 식사해요. 잘 드셔야 오래 사시지.”
안유성은 <투사>에서 보여줬던 왕의 근엄한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이, 비뚤어진 눈빛과 고집스러운 말투로 칭얼댔다.
“싫어! 엄마 어디 갔어? 엄마 오면 먹을 거야!”
이도원은 이런 상황이 아주 익숙한 듯 얼굴에 미소 짓고 맞장구를 치며 대답했다.
“조금만 있어봐,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그래도 나 보다 빨리 엄마를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엄마랑 곧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래도 그 전에, 밥 잘 드시고 건강한 얼굴로 만나지 않겠어?”
이도원은 깊은 눈빛과 밝은 음성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내는 목소리 안에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할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 식사를 거부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속상함 같은 복합적인 감정이 꾹꾹 눌러 담은 밥공기처럼 가득 차있었다. 그럼에도 겉으로는 넘치지는 않는다. 표현하지 않고 마음으로 다가오는 연기. 귀로 들리진 않지만 보는 이들의 가슴으로 느껴지는 연기였다.
‘하. 대사는 아주 자연스럽고 감정은 세심해.’
유태일 감독은 절로 감탄했다. 리딩 룸 안의 다른 배우들 역시 송곳처럼 찔러오는 감정변화에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안유성은 역할에 대한 몰입을 늦추지 않고 이도원에게 반응하며 호흡했다.
“밥 먹으면 엄마 만날 수 있어?”
안유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쩝쩝 소리를 내며 밥 먹는 시늉을 하더니 불쑥 표정이 굳었다. 이내 그는 밥알을 씹던 것을 멈추고 천천히 턱을 움직이며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안유성이 손을 떨며 텅 빈 동공으로 이도원을 보며 말했다.
“내가… 내가 또 정신을 잃었었구나. 미안하다, 내가…….”
안유성의 호흡이 흐트러졌고, 이도원이 서둘러 말했다.
“아니에요, 아니야, 할아버지. 괜찮아.”
이도원은 침착하게 웃으며 말했다.
“혹시라도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집에서 나갈 땐 꼭 명찰 하는 것 잊지 말고.”
안유성은 눈물을 흘리며 여러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 본 유태일 감독은 흡족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선생님과 도원이 모두 느낌 좋습니다. 자, 다음-.”
유태일 감독의 주관 하에 리딩이 계속됐다.
이도원이 일하는 보건소에서 임직원 무료 검진 신청서를 작성하는 모습을 건너뛰고, 극중 이도원과 차지은이 만나는 장면으로 넘어갔다.
“의료지원사업 협조요청 차원에서 나왔습니다-.”
차지은이 웃는 얼굴로 밝게 말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씬이었다.
이도원은 마을 이장의 물리치료를 하는 중이다. 그는 차지은을 힐긋 보며 말했다.
“여기 와서 좀 잡아줘요.”
차지은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 전 의료지원사업 협조요청 차원에서…….”
“알겠으니까 이것 좀.”
이도원의 말에 차지은이 다가가서 노인을 잡아주는 장면이었으나, 움직임은 섞지 않고 대사만 오갔다.
잠시 사이를 두고 차지은이 이도원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싸인만 해주시면 되는데… 저, 업무 중에 나온 거라 빨리 가봐야 하는데…….”
이도원을 들은 척도 않고 볼일을 봤다.
대본의 다음 씬으로 넘어간 이도원이 말했다.
“그러니까 왜 오셨다고요?”
그는 빙긋 웃으며 요리조리 뜯어보는 시선을 보냈다.
그 눈길을 받은 차지은은 순간적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심쿵.’
그녀는 차마 자제하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며 짧은 상념을 털어내는 움직임을 보였다. 당연히 대본과는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컷. 다시-.”
차지은이 애써 평정심을 되찾으며 다음 대사를 쳤다.
“아, 네. 마을회관에서 진행하는 의료지원사업 협조요청 차원에서 나왔습니다!”
이도원이 손을 뻗으며 말했다.
“공문으로 발송하시지, 직접 오셨네요? 사업진행계획서 주세요.”
“여기요.”
차지은이 낼름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이도원은 문서를 받고 읽어본 뒤 싸인을 해서 돌려주며 물었다.
“오늘 저녁 식사 함께 하실래요?”
도발적인 눈빛과 말투에 차지은이 당황했다.
‘연기를 하는 건지, 실제인지.’
그녀는 속을 생각하며 마음을 달랬다. 그럼에도 급박한 심박 수는 줄어들 줄 몰랐다.
몸은 연기를 하고 있는데, 마음은 콩밭에 가있었다.
‘원래 데이트 신청할 때 저렇게 하나?’
그 상대가 자신이었으면…….
‘하늘을 나는 기분일 텐데.’
이러니 연기가 똑바로 될 리가 없었다.
그 묘한 흐름을 파악한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잠깐 휴식하겠습니다. 지은 씨는 잠깐 남아요.”
나머지 배우들 모두 자리를 비켜주었다.
잇따라 리딩 룸 안에 차지은과 유태일 감독만 남았다.
둘이 되자 유태일 감독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물론 아니겠지만 혹시나 해서 물어보마.”
“네, 감독님.”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유태일 감독이 물었다.
“혹시 도원이를 좋아하니?”
차지은은 대답하지 못했다. 내숭을 떤다거나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잘 모르겠어요.”
어쩐지 귀엽기도 한 대답을 들은 유태일 감독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알게 되면 꼭 이야기해 줘야한다. 감독은 작품에 참여하는 배우들에 대해 자세히 알면 알수록 좋다. 알아야만 하지. 심지어 안 선생님조차 작품을 선택하신 후 내게 모든 고민을 털어놓으셨다.”
그 말에 차지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복잡한 표정을 빤히 보던 유태일 감독이 배려를 담아 말했다.
“잠시 마음을 달래고, 생각도 좀 정리해 보고, 시작하자. 난 화장실 다녀오마.”
한편 밖의 상황도 어딘가 묘했다.
다른 배우들은 이도원과 안유성에게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한 명은 근래 최고 주가를 달리는 젊은 스타였고, 또 한 명은 꿈에서도 우러러 보던 대배우기 때문이다.
정작 두 사람은 친근한 사이처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군.”
이도원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예, 선생님. 지난번에 무대 인사를 함께하지 못해서 죄송했습니다.”
안유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문으로 들었네. 헛소문인 줄 진즉부터 알았고, 잘 해결될 것도 알았지.”
이도원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정말이야.”
안유성은 진심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잠깐 오해를 살 수는 있지만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는 법이니까. 자네가 서둘렀건, 가만히 두었건 결국에는 올바른 방향으로 해결됐을 게야.”
이도원은 그 말에 동의하진 못했지만, 그런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잠시 들었다.
그때 안유성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건넸다.
“내 말이 자네게 어떤 영향을 불러올지 알 수 없지만, 이번 작품이 나의 유작이네.”
안유성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지나가듯 말했다.
반면 이도원은 눈을 크게 치떴다. 순간적으로 헉 소리가 튀어나올 만큼 놀랬다.
배우로서 은퇴한다는 건가?
아니면 정말…….
“그게 무슨…….”
안유성이 미미한 웃음기를 드리우고 대답했다.
“얼마 전 간암 판정을 받았지.”
< 새로운 국면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