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17화 (117/178)

< 새로운 국면 (3) >

저녁식사를 마치고 유태일 감독의 집을 나선 이도원은 택시를 타고 어머니와 누나가 있는 송파구 가락동의 본집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차창으로 네온사인이 맺혔다. 그 불빛을 보며 이도원은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얼마 전 스캔들과 스폰서 의혹 때문에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 생신도 얼마 남지 않았네.’

그동안 가족 행사를 못 챙겨주었던 건 아니었지만 바쁜 스케줄로 인해 함께 시간을 보내진 못했다. 문득 마음 한구석이 답답해지며 미안한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도원은 먼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들!

“엄마. 저 오늘 집에 가려고요.”

-지금 시간에?

깜짝 놀란 어머니가 물었다.

-뭐 해놓은 음식도 없는데…….

“밥 먹었어요. 누나는 집에 있죠?”

-응. 집에 있어. 얼마나 걸리니?

열 시가 넘은 시간.

이도원은 손목시계를 보며 대답했다.

“이십 분 정도요.”

머지않아 택시가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이도원은 택시를 가족들이 살고 있는 동 앞에 세운 뒤 계산하고 내렸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차문을 닫은 이도원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누나 이다원이 달려 나와 문을 열었다.

“불효자! 얼굴 한 번 안 비추고, 진짜 오랜만이다?”

이도원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엄마는?”

“부엌에. 부랴부랴 너 먹일 음식 준비 중이셔.”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은 집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부엌으로 갔다. 어머니가 고기를 굽는 동시에 찌개를 만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몸을 돌리는 순간 이도원을 발견하고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왔어? 옷 갈아입고 좀 앉아라. 자고 갈 거지?”

“네. 그래야죠.”

여자 둘이 사는데 이도원이 입을 만한 옷이 있을 리가… 있었다.

이다원이 사이즈가 제법 큰 남자 잠옷을 내왔다.

이도원은 잠옷을 살펴보며 농담조로 물었다.

“누나 그 새 결혼했어? 집에 웬 남자 옷?”

“너 오면 입히려고 엄마가 사둔 거야.”

그제야 사정을 알게 된 이도원은 방으로 들어가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분명 집을 산 뒤로 몇 번 오지 않았는데도 새집 같지가 않고, 늘 살던 집 보다 정겨웠다.

‘여긴 엄마랑 누나가 있으니까.’

가족이 있는 것만으로 내 집 같은 안정감이 든다. 반대로 가족들이 나간 집은 어딘가 휑하고 싸늘했다.

고개를 저으며 상념을 떨친 이도원은 밝은 표정으로 부엌으로 가서 식탁에 앉았다.

어머니가 반 공기 정도 밥을 내주며 말했다.

“밥 먹었어도 맛 좀 봐. 사람이 집 밥을 안 먹으면 입맛 버린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수저를 들었다.

울컥 뜨거운 덩어리가 속에서부터 올라왔다.

집에 없는 아들 잠옷까지 준비한 어머니.

아울러 그 말투에서 느껴진 것이다.

‘항상 날 생각하고 계시는구나. 난…….’

연기한다고, 촬영한다고 많은 시간을 잊고 지냈다.

“죄송해요.”

이도원은 먹먹해져선 모기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이다원은 모자를 지켜보며 흐뭇한 미소를 그렸다.

‘에휴. 그나저나 이놈의 과제.’

심지어 지금도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그녀였다.

그때 갑자기 어머니의 화살이 이다원을 향했다.

“밥상머리에서 책 보지 말랬지? 넌 오랜만에 동생이 왔는데-.”

“예, 예.”

이다원은 책을 덮고 이도원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그거 진짜야?”

이도원이 그녀를 보며 되물었다.

“뭐가?”

“차지은이랑 사귀는 거.”

이다원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말을 이었다.

“하긴 그럴 리가 없지. 걔가 널 뭘 보고 만나겠어? 재벌 집 딸에, 그렇게 예쁜데.”

“도원이가 뭐 어때서 그러니?”

어머니의 말에 이다원은 검지를 흔들었다.

“엄마야 그렇겠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해 봐요. 엄마가 차지은 부모님이면 기겁해서 뜯어 말렸을 걸?”

이도원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그런 거 아니니까.”

이도원은 가족들과 좀 더 시간을 가진 뒤 빈방으로 가서 몸을 누였다.

말이 빈방이지 침대와 가구들을 들여놓은 걸로 볼 때 이도원이 왔을 때를 위해 준비한 방이었다. 그 증거로 책장에는 이도원의 어렸을 적 사진들이 놓여있었다. 이도원은 그 앞을 거닐며 미소 지었다.

한참 사진들을 들여다보던 이도원은 침대에 누워 중얼거렸다.

“전혀 내색하지 않으시네.”

스폰서니 스캔들이니 한동안 인터넷이 떠들썩 했다. 이도원이 시기적절하게 막지 못했다면 자칫 한방에 얼굴도 들고 다니기 힘들 정도로 이미지가 망가질 수 있을 만한 사건이었다.

반면 이미 이도원은 금전적으로 여유로운 상황이었다. 연기는 연극과 뮤지컬만 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다. 따라서 어머니는 말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걱정하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척 이도원을 대해주었다.

이도원이 생각에 잠겨있는 그때, 어머니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방불을 끄려는 어머니에게 이도원이 불쑥 물었다.

“왜 말리지 않으세요?”

불이 꺼지고, 어머니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내가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문제가 생겼을 때 네가 먼저 그만두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믿음.

마음이 따뜻했다.

이윽고, 졸음이 쏟아졌다.

*

이도원은 다음 날 백 프로덕션으로 출근했다.

한편 이상백은 계열사인 백 엔터테인먼트 창업 건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도원의 향후 행보가 더 중요했기에 시간을 쪼개 회의 시간을 가졌다.

먼저 이상백이 말했다.

“그래, 유태일 감독과 만나본 건 어떻게 됐냐?”

“역시나 이번 영화도 하고 싶습니다.”

짧게 대답한 이도원이 덧붙였다.

“아예 배역에 저를 정해놓고 시나리오를 썼더라고요.”

“널 섭외하기 위한 공략일 수도 있다.”

“시나리오 자체도 최곱니다.”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많은 부분을 자비로 촬영하는 저예산 영화라서 스케줄도 최대한 배우들 여건에 맞게 조정해준다고 합니다. 그러면 뮤지컬을 준비하면서 촬영할 수 있습니다.”

이상백은 곰곰이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시나리오도 좋고 연출도 좋다. 더구나 뮤지컬과 동시에 진행할 스케줄이 된다? 확실히 이런 조건의 영화는 받기 힘들지.”

그는 이도원을 잘 아는 사람답게 이어서 물었다.

“완벽한 조건이었다면 자신 있게 결정하고 통보했겠지. 조심스럽게 말한 이유는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냐?”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배역 이름이 배우 이름 그대로 들어갑니다.”

“그게 문제가 된다면 설마…….”

금방 머리를 굴린 이상백이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역이 차지은은 아니겠지?”

“맞습니다.”

“스캔들 터진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데도 하겠다고?”

“예. 하고 싶습니다.”

“장르는?”

이도원이 시익 웃었다.

“당연히 멜로죠.”

이상백은 고개를 저으며 두 손을 들었다.

“쉬지 않고 활동하는 건 좋다. 하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야. 다시 스캔들이 터질 거다.”

“저는 조금 다른 각도로 생각했습니다.”

이도원이 또박또박 생각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별 생각 안하고 보면 분명 조심스러운 부분이죠. 하지만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나쁠 게 없습니다. 어차피 유명세는 양날의 칼이고, 쓰기 나름이 아닙니까?”

이상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해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이도원은 계속했다.

“이번에 겪은 논란을 잘 드는 칼로 만들어서 올바로 휘두를 겁니다. 이슈가 나면 영화에 날개를 달아주게 되겠죠. 제 생각에는 당당한 행동이 최고의 해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스캔들이 난 배우 두 사람이 남녀주인공으로 멜로를 찍는다. 관객들은 이 사실만으로도 흥미로워할 겁니다. 관객들에게 최고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일이야말로, 배우의 존재목적 아닐까요?”

그가 덧붙였다.

“스포트라이트를 피해서 숨지 않고, 즐기는 것.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도원의 말은 틀린 구석이 없었다.

그러나 이상백은 영 찜찜했다. 이도원은 지금까지도 충분히 순탄한 오름세를 기록하고 있고, 잠깐 사건에 휘말려 주춤했다지만 조심만 하면 현재의 궤도를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구태여 무리수를 둬가며 새로운 도전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굳이 외줄을 타려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무사히 외줄을 건너는 데 성공하면 뜨거운 박수를 받을 수 있겠지만, 떨어지면 지옥이다.”

그 말에 이도원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일개 배우가 대한민국 연예계를 주름잡는 대형기획사 레드엔터테인먼트에 한 방 먹인 것만으로도 벌써 외줄 위에 올라간 것 아닙니까? 이미 돌아갈 곳은 없습니다. 이번 영화를 촬영하게 되면 다시금 사건이 재조명될 테고, 레드엔터테인먼트에게도 연타를 넣을 수 있게 되겠죠.”

그에 이상백이 물었다.

“레드엔터에서 과연 이번 영화에 차지은을 참여시킬까? 이번 기회를 이용해 다른 꼼수를 쓸 게 빤하다.”

“참여시킬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도원은 확신하며 덧붙였다.

“영화촬영 시즌과 차지은의 계약만료일이 겹칩니다. 레드엔터가 허락하든 말든 차지은은 이번 영화를 찍게 될 거라는 뜻이죠. 그렇다면 내보내기 전 최대한 계약금을 받아내는 쪽을 선택할 겁니다.”

이상백은 소파의 팔걸이를 두드리더니 큰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 어차피 작품 선택권은 네게 주었으니까 난 지켜보기로 하마. 단, 이번에 문제가 생긴다면 회사의 판단에 따라줬으면 한다. 지금까진 네가 스스로 모든 일을 해치워왔지만… 언제나 네 뒤에는 백 프로덕션이 있다는 것만은 잊지 마라.”

이도원은 미소 지었다. 그 역시 혼자 힘으로 극복해내기 어려운 일에 직면하면 고집 부리지 않고 의지할 생각이었다. 말하자면 백 프로덕션은 그때를 위한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푸근해진 이도원이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

2022년 6월 5일 일요일.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의 <백 프로덕션> 대본 리딩 현장.

다름 아닌 이도원의 회사였기에 그는 가장 먼저 도착해 메일로 받은 대본을 읽고 있었다. 리딩 시간 삼십 분 전인 오전 11시 30분, 마침내 유태일 감독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이도원을 본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이도원표 연기를 보겠군.”

그는 씨익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이도원은 여배우가 누구로 배정됐는지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는 차지은이 섭외됐으리란 것을 마음속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조연들과 비슷한 시간에 차지은이 들어섰다.

“와. 오빠! 오랜만이에요.”

차지은은 낼름 이도원의 옆자리에 앉았다.

따로 지정석이 없었기 때문에 조연들은 알아서 자리를 찾아갔다. 그들 대부분이 연극판에서 섭외한 신인급으로, 이도원과 차지은을 보고 신기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한 자리를 빼고 좌석이 모두 들어차자 유태일 감독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항상 가장 먼저 오시는데…….”

이도원이 그 목소리를 듣고 대본을 보았다. 아직 이도원의 ‘할아버지’ 역할을 할 배우가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공석의 배역을 파악한 이도원이 물었다.

“누구신데요?”

‘할아버지’ 역할이었기 때문에 보나마나 선배도, 까마득한 대선배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비중이 적기 때문에 유명 배우일 확률은 적었다.

‘들어도 모르려나.’

한편 유태일 감독이 대답했다.

“널 꽤 보고 싶어 하시더라고. 이런 자투리 배역으로는 절대 모실 수 없는 분이지. 개런티도 거의 카메오 급으로 모셨고.”

그는 아리송하게 알려주었다.

이도원이 재차 물으려 할 때 리딩 룸 문이 열렸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듣는 순간 압도되는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

‘할아버지’ 역할의 배우는 바로 안유성이었다. 그를 본 모든 배우들이 얼얼한 표정을 짓고 일어나 인사를 했다.

그때 유태일 감독이 이도원에게 얼굴을 내밀며 목소리릍 낮췄다.

“이제는 당신의 개런티나 유명세 보다 영화계의 미래를 짊어질 보석 같은 후학을 지켜보는 일이 더 중하시다고. 내게 먼저 연락을 주셨다.”

< 새로운 국면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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