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16화 (116/178)

< 새로운 국면 (2) >

“찐한 멜로요?”

이도원이 묻자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거의 저물어가는 저녁, 시원한 바람이 테라스로 흘러들어 왔다.

입가에 미소를 띤 유태일 감독은 노트북과 연결된 휴대용프린터기를 통해 시놉시스와 대본 몇 장을 출력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도 선선한데 저녁은 밖에서 들기로 하지.”

두 사람은 일 층으로 내려왔다.

정원 한구석에는 식사자리가 마련돼 있었다. 식사를 마련한 가정부 아주머니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인 유태일 감독이 이도원에게 말했다.

“앉아. 부모님은 늦으시고, 동생도 거의 다 왔다는군.”

맞은편에 앉은 이도원은 정원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그나저나 집이 정말 좋네요. 서울 시내 한복판에 이런 집이라니……..”

유태일 감독은 피식 웃었다.

“너도 얼마 안 있으면 이 정도는 금방 벌 텐데? 나야 평생 벌까 말까겠지만.”

“실감은 잘 안 나요. 실질적으로 돈을 쓰고 다닌 적이 없어서.”

이도원의 말에 유태일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대개 그렇지.”

“감독님 부모님은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

친구 부모님 직업 물어보듯 질문하는 이도원의 모습에, 유태일 감독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버지 때까지 우린 대대로 의사 집안이었어. 실질적으로 돈을 번 건 할아버지는 땅 장사, 아버지는 주식을 하셨지. 대학 동문이나 병원 내에 모임이 있는데 예나지금이나 시대에 맞는 투자정보를 나누고 수익을 낸다. 짬밥이 안 될 땐 손해도 곧 잘 보셨는데, 이젠 병원장이다 보니 정보도 고급 정보라서 손해는 안 보셔.”

그는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

이도원은 조금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의외네요. 너무 자세히 말씀해주셔서.”

“우린 앞으로도 작품하면서 쭉 호흡 맞출 것 아닌가? 그럼 가족보다도 가까워져야지.”

그 말을 듣고서야 이도원은 알 수 있었다.

유태일 감독은 결코 아무 이유 없이 이런 가정사를 털어놓을 인물이 아니었다. 이도원이 본 그는 침착하고 온화했지만 그만큼 냉정하고 날카로운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도원은 문득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금은 유태일 감독이 탐낼 정도의 배우가 된 건가?’

타임 슬립 전에는 유태일 감독의 말 한마디에 세상을 얻은 듯 기뻐하던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번 생에는 유태일 감독이 잡고 싶어 하는 배우가 됐다. 그렇다보니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느낌, 태도까지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렇듯 기쁨과 씁쓸한 감정이 범벅된 묘한 기분을 느낀 건 찰나였다.

이도원은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문을 가리켰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손을 흔들며 다가오다가 이도원을 알아볼 거리까지 접근하자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아…….”

유상은은 잠시 사고가 마비된 듯 탄성 비슷한 음성을 흘리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이도원이네? 왜 우리 집에 이도원이 있지?”

유태일 감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뜬금없는 반말에 이도원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한편, 한순간 혈액순환이 멈췄던 유상은은 머리로 다시 피가 통하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을 가리고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냅다 집안으로 질주했다.

이도원이 황당한 표정으로 유태일 감독을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동생이 좀 아파.”

머지않아 유태일 감독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는 동시에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스피커폰이다.”

-아… 하하. 끊어.

한바가지 욕을 퍼부으려던 유상은이 전화를 뚝 끊었다.

어깨를 으쓱인 유태일 감독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본론으로 돌아갔다.

“아마 저 나름대로 꽃단장을 하고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 우린 일 얘기나 하고 있지.”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출력하신 시놉 좀 볼 수 있을까요?”

“물론. 그 전에 높은 수위는 기대하지 말라고 미리 말해두고 싶군.”

유태일 감독은 시놉을 건네고 말을 이었다.

“감정적으로 찐한 멜로야.”

그러면 안 되는데, 이도원은 일말의 아쉬움을 느꼈다.

“음.”

한편으로는 안심도 됐다. 만약 수위가 높으면 아직 어린데다 외모가 물 오른 차지은이 오케이 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도원 입장에선 다른 여배우와 호흡을 맞추는 것 보다 서로 편한 사이인 차지은과 맞추는 편이 훨씬 나았다.

“시놉이 굉장히 복고풍인데요?”

대충 슥 훑어본 결과 자극적인 부분이 전혀 없었다.

근래 나오는 멜로물과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90년대 후반에 쏟아져 나오던, 내면의 세심한 묘사가 살아있는 멜로였다. 누구나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평범한 감정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도원은 다시 맨 앞장을 펼쳤다.

“눈으로 가볍게 훑었는데 제대로 읽고 싶어지네요. 그리고 또 한 번 읽을 땐, 첫 줄을 읽으면 그 자리에서 단숨에 모두 읽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물 먹는 솜처럼 빨아들여요.”

유태일 감독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군. 내가 쓸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감정을 느껴줘서.”

이도원은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 시나리오가 고스란히 펼쳐졌다.

글자를 눈으로 어루만질 때마다 감정이 밀물처럼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하.”

이도원은 탄성했다. 그는 그제야 주인공의 이름이 소개되는 부분에 도달해서야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몰입이 깨진 것이 아니라 그 이름 때문이었다.

“이거 뭐예요? 이도원, 차지은?”

유태일 감독이 턱을 괴고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을 보며 이도원은 혹시나 해서 물었다.

“임시죠?”

“아니.”

유태일 감독은 웃는 낯 그대로 대답했다.

“그대로 갈 거다. 시놉시스를 구상할 때부터 너희 둘을 정해놓고 썼어. 너희 둘 열애설을 보자마자 머릿속에 흐름이 그려졌거든.”

이도원은 시놉시스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말했다.

“논란이 될 텐데요.”

“나야 나쁠 것 없지.”

유태일 감독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관객들도 즐거워할 거야. 열애설은 루머로 밝혀졌고, 너희 둘은 배우로서 최고의 영화를 함께 만들고 싶은 열망이 있잖아? 뭐, 촬영하다 정말 사랑이 싹 트면 그것도 좋고.”

배우라면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는 제안이었다.

배역을 정해놓고 쓰인 시놉시스다.

더구나 완벽한 작품이다.

‘배우의 연기를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기술이 연출과 편집이라면, 배우를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건 시나리오다. 이걸 어떻게 거절해?’

이도원은 시놉시스를 다시 펼쳐보며 말했다.

“대표님이 반대하시겠지만 설득해보죠.”

유태일 감독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탁월한 결정이다.”

그때 아예 샤워를 하고 수수한 메이크업까지 한 유상은이 집에서 나왔다. 그녀가 가까이 오자 싱그러운 풀 냄새를 녹이는 풋풋한 향기가 실려 왔다. 하지만 그건 어디나 이도원의 감상일 뿐, 유태일 감독은 비염 때문에 코가 막혔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여자인 척 하지마라. 웃기지도 않으니까.”

유상은은 주먹을 들어 보이며 이를 악물고 웃었다.

“하하, 오빠. 적당히 하지?”

유태일 감독은 대답도 않고 고개만 저었다.

그에게서 신경을 끈 유상은이 이도원에게 말했다.

“저, 진짜 팬이에요.”

이도원은 이럴 때마다 난처했다. 가끔 촬영장이나 사내에서도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는데, 팬이라고 밝히면 대답할 말이 하나뿐이었다.

“감사합니다. 싸인이라도?”

“아뇨, 그건 됐고…….”

유상은이 몽롱한 눈빛으로 옆에 딱 달라붙어 앉으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해주세요. 포옹이면 더 좋고요.”

유태일 감독이 유상은이 앉은 의자를 발로 툭 쳤다.

“너나 적당히 해. 어른들 일 얘기 하시는데 창피하다, 창피해. 도원이가 이 집안을 뭐로 보겠니?”

이도원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유태일 감독의 모습이 낯설었다.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영화와 관련해선 그렇게나 진지하고 날카롭던 사람이… 역시 가족이란.’

마음이 따뜻하면서도 한구석으로는 죄책감이 들었다.

이도원은 짧게나마, 타임 슬립이라는 미명 아래 가족 보다 연기만을 쫓아왔던 것이 아닐까 돌아보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감상에 젖을 상황은 아니었기에 준비해 온 선물을 먼저 내밀었다.

“유 감독님이 곧 동생 분 생일이라고 하셔서요.”

“어쩜!”

유상은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녀는 꽃은 품에 안고 향수를 보며 감탄했다.

“제가 쓰는 향수예요!”

이도원이 어색하게 웃었다.

“직접 고른 건 아니고 점원이 골라주더라고요.”

로맨틱과는 거리가 먼 대사였지만 유상은의 눈에는 그저 숫기 없는 상남자쯤으로 보일 뿐이었다.

“역시 오빤 최고예요.”

유태일 감독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야야, 그만 됐고. 마침 잘 됐네.”

그는 애초부터 계획한 일이면서 아닌 척 시놉시스와 함께 뽑아온 대본 한 장을 이도원에게 건네고, 나머지 한 장을 유상은에게 건네주었다.

“오랜만에 도원이 연기 좀 보자. 상은이는 그냥 말만 맞춰 줘.”

“나도 잘하거든?”

유상은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반면 대본을 받은 이도원은 그 순간 분위기가 달라졌다. 진지한 얼굴로 눈을 슥 감았다 뜨더니,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기대감에 찬 눈으로 지켜보던 유태일 감독이 짧게 신호했다.

“액션.”

그 순간 이도원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뒤바뀌었다.

선선한 밤하늘은 뜨거운 해살이 내리쬐는 한여름 오후가 됐고, 긴장한 표정으로 대본을 들고 앉아있는 유상은은 풋풋한 미소를 머금은 차지은이 되었다.

이내 이도원의 입이 열렸다.

“난 아주 평범한 사람이에요. 별… 남다른 인생도 아니죠.”

이도원이 허리를 앞으로 숙이며 새카만 두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그쪽을 생각하는 시간만큼은 제가 특별하다는 기분이 들어요. 신기한 일이죠. 그래서 자꾸만 같이 있고 싶고, 대화도 하고 싶어요.”

이도원은 미소를 한가득 입에 물고 물었다.

“어떤 남자를 좋아해요? 유머러스한 남자? 지적인 남자? 문학적인 남자? 강한 남자? 아니면 양처럼 순한 남자? 뭐든 말만 해요. 말만 하면 다 될 수 있으니까.”

유상은은 불현듯 그의 눈빛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막상 연기를 하면 오그라들 줄 알았는데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평소 스크린이나 TV로 접했을 때와는 달리 새로운 이도원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연기하는 모습은 더 멋있네.’

그녀는 정신을 반쯤 빼고 대본을 읽었다.

“전부터 느꼈지만 황당한 분이네요.”

이도원이 씩 웃으며 받아쳤다.

“그렇게도 될 수 있죠.”

유상은이 고개를 저으며 대본대로 대사를 쳤다.

“우린 아직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 저도 뭐… 그쪽이 싫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을 서두르고 싶진 않아요.”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소 익살맞았던 방금 전과 달리 침착하고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어요.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둬요. 뭔가가 좋아지면 푹 빠지는 법이죠. 자나 깨나 그 생각만 하게 되요.”

유상은이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이도원이 푸근한 웃음을 보였다.

“앞으로 하루하루 그쪽 생각만 하고 앉았을 것 같다는 소리죠.”

지켜보던 유태일 감독이 짧게 사인을 보냈다.

"컷."

말한 유태일 감독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장면은 감정 씬이 크지 않은 구간이었다. 통상적으로 이런 부분만으로 배우의 역량을 시험해 볼 수는 없다. 그저 배역에 배우가 녹아드는지, 또 호소력이 짙은지 느끼는 정도였다. 그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몰입했어.'

유태일 감독은 순간적으로 몰입했다. 또한 유상은의 표정만 봐도 어렵지 않게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완전히 이도원의 연기에 매료돼 있었다.

"조금만 더 길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유상은이 구시렁거렸다.

썩 편안한 연기를 펼쳤다고 자각한 이도원은 유태일 감독의 평가를 기다렸다.

그에 곰곰이 생각하던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너밖에 없어. 저예산 영화라 스케줄은 얼마든 맞춰줄 수 있으니까 같이 하자."

< 새로운 국면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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