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15화 (115/178)

< 리액팅 (reacting; 반응연기) (9) > 끝< 새로운 국면 (1) >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핸들을 잡은 오준식은 손을 덜덜 떨었다. 그의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이도원의 귓가까지 들려오는 듯 했다.

이도원이 빙그레 웃으며 재차 확인시켜주었다.

“그만 서성이고 이제 링 안으로 들어오라는 소리야.”

오준식은 벙 찐 표정으로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어렵사리 한 마디를 꺼냈다.

“사랑한다.”

그리고 진지하게 되내었다.

“정말 사랑한다. 친구야. 아니, 대표님.”

“네 능력이야.”

이도원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 말은 반은 맞는 소리였다.

이도원은 오준식의 영입을 결정하기 전 신용운에게 누차 오준식의 역량에 대해 들은 상태였다. <영웅> 뮤지컬 준비를 하면서 만난 신용운은 오준식이 매니저로 남기 아까운 인재라며 몇 차례 걸쳐 언급한 것이다.

이도원은 이 점을 확실히 했다.

“신용운 선생님이 몇 번이나 말씀하시더라.”

그 말처럼 신용운은 오준식의 연기를 평균 이상이라고 평했다. 남들 보다 몇 배는 노력하기 때문에 앞으로 발전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따라서 이도원은 칭찬에 인색한 신용운의 안목을 믿기로 한 것이다.

오준식은 신용운과 이도원에게 모두 고마운 마음 뿐이었다.

“고맙다. 진짜…….”

머지 않아 밴은 백 프로덕션 건물 앞에 도착했다.

이도원은 먼저 내려 이상백의 사무실로 갔다.

두 사람이 마주 앉자 이상백이 먼저 말을 꺼냈다.

“기사 잘 봤다. 이번 사건을 보고, 네게 백 엔터테인먼트 공동대표 자리를 줘도 괜찮겠다는 확신을 가졌다. 신경 안 쓰이게끔 처리해 준 데 대한 선물로 좋은 소식 하나를 준비했다.”

이도원이 잠자코 기다리자 이상백이 말을 이었다.

“<영웅>이 브로드웨이로 진출하게 됐다. 그렇잖아도 2011년 8월 브로드웨이에서 찬사를 받은 적이 있는 작품이라 다시 한 번 초청을 받은 게지.”

이도원은 미미하게 웃었다.

“시기적절하네요.”

“별로 놀라지 않는구나.”

이상백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마침 네가 할리우드 진출을 꿈꾸고 있으니 좋은 기회가 될 거다. 동시에 이번 해프닝을 완전히 덮을 수 있을 만큼 기쁜 소식이기도 하고.”

그는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물었다.

“당분간 국내 활동은 쉬는 게 어떻겠냐?”

이도원은 잠시 틈을 두고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하지만 단순한 루머에 휘말렸을 뿐이고 침울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상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너조차도 이번 일이 터지자 발 빠르게 사태를 수습했다. 배우에게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때문이지. 쉬면서 이번 사건이 잊혀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도원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영웅>이 브로드웨이에 진출할 때까지 준비 시간을 포함하면 최소 반년은 걸리겠죠. 세상이 시선이 두려워 대중 앞에 서지 않는다면 그건 정치인이지, 배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번 사건을 통해 느끼는 감정이 두려움이든 억울함이든 제가 가장 잘하는 연기로 소통하고 싶습니다.”

또박또박 말하는 모습을 보며 이상백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도원을 고등학교 때부터 봐왔던 그는 남다른 감정에 흠뻑 젖고 말았다. 그 감정의 정체는 감격이고 기쁨이었다.

“많이 성장했구나. 항상 불안정하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굳건한 마음을 가지게 됐어.”

이상백은 더 이상 말리지 않고 말했다.

“배우가 연기를 하고 싶다는데 도와줘야지. 전략기획팀에서 가져온 서류는 폐기하마.”

“감사합니다.”

이도원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한차례 해프닝이 지나갔으니, 이제 다시 연기판으로 뛰어들 시점이었다.

*

결과적으로 이번 ‘이도원 사건’이 남긴 건 언론과 기획사의 유착관계에 대한 의혹뿐이었다. 정작 사건의 시작점이었던 이도원에 관한 의혹들은 백지화가 되었고, 오히려 주변인들의 적극적인 해명과 본인의 강경대응을 보며 찬사가 쏟아졌다.

[이도원 개멋짐. ㅋㅋ 레드엔터테인먼트 쓰레기]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망 ㄷㄷ]

[레드엔터테인먼트가 연예계에선 대기업 급인데, 악덕 대기업이 중소기업한테 발린 모양새임]

[중소기업도 아니지 않나? 이도원 원맨쇼인 듯 ㅋㅋ 솔플해서 뒤집어엎은 느낌]

[이도원이랑 차지은이랑 진짜 사귀는 거였음 좋겠다고 생각한 건 나 뿐?]

[이도원 사건 전말 담긴 블로그, <쥐구멍 언론>에서 고소 들어갔다고 합니다. 다들 조심하세요!]

[괜히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하네 ㅋㅋ]

.

.

.

이도원은 이 모든 반응을 반영한 인터뷰에 딱 한 줄로 일축했다.

“저는 배우입니다. 연기로 대답하겠습니다.”

표면적으로 그는 어떤 해명도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다. 해명을 대신한 건 주변인들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대중에게 더 큰 신뢰를 주었다.

“역시 영리한 녀석이야.”

유태일 감독은 신문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는 정원이 딸린 저택 이 층 테라스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오빠!”

유태일 감독의 여동생 유상은이 일 층에서 커피 한 잔을 준비해 와서 맞은편에 앉았다.

유태일 감독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빠 일하는 중이다. 너도 빨리 가서 공부나 해.”

유상은은 그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유태일 감독이 보던 신문을 들고 눈을 크게 떴다.

“이도원이야? 완전 멋있어.”

“이도원이 네 친구냐?”

“오빠 같이 작업했었다며. 나 좀 보여줘. 영화감독 오빠 덕 좀 보자!”

“수능 만점 받으면 생각 좀 해보마.”

유태일 감독의 말에 유상은이 입술을 삐죽이 내밀었다.

“차라리 우리 쫑이가 사람 말 하는 걸 기대하는 쪽이 낫지. 내가 수능 만점을 어떻게 받아?”

쫑이는 유태일 감독네 애완견이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유태일 감독은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언제 철들래? 일해야 되니까 저리가.”

“조용하고 있을게!”

유상은은 가볍게 대답하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에 유태일 감독은 골이 지끈거릴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저 진상을 어떻게 하냐.’

유태일 감독이 보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동생이지만 유상은은 꽤나 바람직한 학생이었다. 전교 십 등 안에 들 만큼 공부를 잘했고, 청순한 외모와 시원시원한 성격 덕분에 학교에서 인기도 좋았다. ‘엄친아’를 연상시키는 그녀에게 한 가지 맥을 못 추는 화제가 있다면, 바로 장안의 화제인 이도원이었다.

“완전 짱.”

유상은은 풀린 동공으로 휴대폰 액정을 보며 감탄했다.

“난 도원 오빠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 이 젠틀 한 인상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오빠, 난 아무래도 도원 오빠의 광빠인가봐.”

유태일 감독은 커피 잔을 톡톡 치며 말했다.

“그래서 평소에 생전 안 하던 짓을 하는구나. 하루 이틀이지, 악마의 재능 보고 나서부터 지치지도 않냐?”

“오빠.”

유상은이 그를 부르며 물었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슬픈 게 뭔 줄 알아?”

유태일 감독이 콧방귀를 뀌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외고 입시 떨어져서 일반계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도, 오빠 같이 무심한 남매를 둔 것도 아니야. 바로, 시험기간이라고 <악마의 재능> 시사회에 못 간 거야.”

유상은의 말에 유태일 감독은 한숨을 푹 쉬었다.

“정신차려라, 이 인간아.”

유태일 감독은 유상은을 뿌리치고 테라스에서 정원으로 나갔다. 그렇잖아도 이도원에게 한 번 연락을 해볼 생각이었다. 물론 안부를 물으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그는 휴대폰을 들어 통화연결을 했다.

머지 않아 이도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감독님.

여전히 밝은 목소리에 유태일 감독이 피식 웃었다.

‘그럼 그렇지.’

이도원이 한 차례 홍역을 치른 정도로 의기소침해 할 인물이 아니란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유태일 감독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정윤욱 선배님과 작품 했던데. <투사>잘 봤다. 앞으로 활동 계획은 잡혀있어?”

-뮤지컬이 있긴 한데 반 년 정도 준비 기간이 있습니다.

“그것만 해도 빠듯하겠지만… 영화 참여할 수 있나?”

-대표님이랑 상의해봐야겠지만 크랭크 인까지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뭐,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자. 언제 시간 돼?”

-요새 한참 시끌벅적 해서 쉬고 있습니다. 학교 방학한 기분이에요.

유태일 감독이 피식 웃었다. 대답하려던 찰나 동생 유상은의 부탁이 떠올랐다. 그는 원래 염두하고 있던 장소를 바꾸며 말했다.

“그럼 내일 우리 집에서 저녁이나 한 끼 먹지.”

-감독님 집에서요?

그 물음에 유태일 감독이 대답했다.

“내 동생이 열성팬이야. 곧 생일인데 내일 서프라이즈로 자리를 마련해주면 좋을 것 같아서 부탁하는 거다.”

-그런 거라면 가야죠.

이도원이 흔쾌히 수락했다.

-동생 분 생일선물은 뭐로 가져갈까요?

“부담스럽게 그러지 말고.”

-예, 제가 알아서 센스 있게 사가겠습니다.

능청스러운 어조를 접한 유태일 감독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럼 내일 일곱 시, 주소는 문자로 보내주지.”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전화를 끊었다.

유태일 감독은 신선한 풀냄새를 맡으며 주소를 문자로 보냈다.

*

전날 유태일 감독에게 전화를 받은 이도원은 편한 후드에 청바지를 입었다. 아파트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유태일 감독의 집으로 향하는 길, 그는 이상백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내 이상백이 전화를 받자 이도원이 말했다.

“대표님. 저 도원입니다. 오늘 유태일 감독님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로 가고 있습니다.”

-그래. 어차피 계약은 회사랑 진행하는 거니까 잘 들어보고 다시 얘기하자.

“알겠습니다.”

이도원은 전화를 끊고 도중에 꽃집과 화장품 가게를 들렸다. <우리의 심장> 촬영 당시 들었던 기억으로는 여동생이라고 했으니 나이는 유태일 감독 보다 어릴 것이고, 성별은 여자일 터였다. 해서 이도원은 꽃과 자극적이지 않은 향수로 무장한 뒤 유태일 감독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높은 담장과 커다란 대문, 으리으리한 저택의 모습에 기겁해야 했다.

‘<우리의 심장> 때 독립 단편 촬영장소로 병원을 섭외했던 걸 보고 대충 예상은 했지만 역시 부자였어.’

생각한 이도원은 벨을 누르고 얼굴을 비췄다.

징-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정원과 이층집이 보였다.

유태일 감독이 이 층 테라스에 앉아 손을 흔들었다.

“하하.”

반가운 얼굴을 보며 어색하게 웃은 이도원은 저택으로 들어가서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일 층 거실이 축구장처럼 넓은 건 당연했다.

“왔어?”

유태일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며 물었다. 그는 앞자리를 고갯짓 했고, 이도원이 마주 앉았다.

“오랜만이네요, 감독님. 잘 사신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상상 이상이에요.”

이도원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말했다.

피식 웃은 유태일 감독은 노트북 전원을 끄며 대답했다.

“양손에 든 선물은 내 동생을 위한 건가?”

꽃과 향수.

유태일 감독이 말을 이었다.

“내 동생한테는 과분하군. 두 가지 모두 향기가 가득한 선물이라니…….”

사이가 그다지 좋아보이진 않는다. 그래도 이도원을 이곳까지 부른 걸 보면 나빠보이지도 않는다.

누나와 자신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 이도원은 슬며시 웃음지었다.

‘보고싶네.’

이래저래 가족들을 못 본지 꽤 되었다. 한참 사건이 터졌을 때 전화로 안부만 전하고 직접 찾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도원은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며 물었다.

“오늘 시나리오 공개하시는 건가요?”

유태일 감독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건 아주 좋아.”

언제나 스스로에게 확신이 있는 사람이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유태일 감독이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이번 사건을 통해 나도 얻은 게 하나 있지. 이도원과 차지은의 스캔들은 악플 보다 선플이 많았다는 것.”

그가 말을 이었다.

“섭외 대상은 아름다운 선남선녀 이도원과 차지은. 이번에는 찐한 멜로로 가자.”

< 새로운 국면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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