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13화 (113/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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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원은 현 상황에 의외로 담담한 심정이었다. 그가 도발한 대상은 몇 배는 크고 강력한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허수아비도 아니고 이도원이 모습을 드러낸 이상 당하고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백 프로덕션을 손 놓고 빼앗길 수도, 어머니를 노출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번에는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모습을 드러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이도원은 그게 무엇이든 반격을 각오하고 있었다. 이제부턴 그들이 취한 공격에 맞서 발 빠르게 움직이는 일만 남은 것이다.

이도원은 가장 먼저 이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누구도 아닌 차수희를 찾았다. 그는 이미 미래정신과의원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연락을 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도원이? 정말 오랜만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기사 봤는데, 괜찮아?

조금만 먼저 연락을 했다면 이런 걱정 대신 축하를 받았을 터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도원은 각종 상과 인기를 휩쓸며 정상을 향해 달리고 있었으니까.

‘사람 일 한치 앞을 알 수 없지. 성공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문제가 생겼을 때 주저앉지 않는 뚝심이다.’

이도원은 마음을 굳게 먹으며 대답했다.

“이런 일로 갑작스레 전화해서 죄송하지만… 사실 그 일 때문에 선생님을 뵙고자 합니다. 지금 병원으로 가는 길이예요. 아직 미래정신과의원에 계시죠?”

-날? 무슨 일로?

반사적으로 물은 차수희가 말을 돌렸다.

-음… 점심 함께 먹자. 밖으로 나가는 건 불편할 테고 메뉴는 뭐 좋아해?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가능한 기름기 많고 살찌는 음식으로 부탁드려요. 자의반 타의반으로 당분간 휴식할 수 있게 됐거든요.”

전화를 끊는 이도원을 보며 운전석을 하던 오준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속도 좋다. 먹을 게 들어가?”

“잘 먹어야 싸우지.”

이도원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태연한 모습에 오준식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었기에 저렇게 강심장이야?’

머지않아 밴이 미래정신과의원 앞에 도착했다.

오준식이 이도원을 보며 말했다.

“왜 여길 온 건지 좀 말해주면 안 돼? 멘탈이 멀쩡한 걸 보니까 충격으로 인한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온 건 아닌 것 같고… 기다리는 동안 계속 궁금할 것 같단 말이다.”

이도원이 차문을 열며 피식 웃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기다리고 있어.”

그는 한쪽 눈을 찡긋 감고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오준식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미친 건가?’

한편 오랜만에 미래정신과의원을 방문한 이도원은 문 앞에 잠깐 멈췄다. [하루 쉽니다]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던 것이다. 차수희는 이도원을 맞이하기 위해 하루를 통째로 쉬기로 결정내린 듯 했다.

“감동이네.”

이도원이 중얼거렸다.

팻말을 무시하며 안으로 들어갔을 땐 간호사도 보이지 않았다.

실내에서는 달콤하고 기름진 중국집 향이 풍기고 있었다.

문소리를 들은 차수희가 원장실 안에서 말했다.

“이리 들어와.”

이도원은 원장실로 갔다.

탁자에 탕수육과 깐풍기, 팔보채까지 펼쳐놓은 차수희가 활짝 웃었다.

“진짜 반갑다! 장례식 이후 처음이지? 장례식 때 와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따로 연락을 했어야했는데… 지은이랑도 아는 것 같아서 네가 불편할까봐 자제했어. 너한테 연락이 올 때까지.”

예쁜 보조개는 여전했다. 하지만 옛 감정을 추억할 만큼 상황이 여유롭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급한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는 일.

술술 말하는 그녀를 보며 이도원이 미소 지었다.

“이걸 누가 다 먹어요?”

“천천히 먹으면서 얘기하면 되지! 내가 입이 짧아서 배도 금방 꺼져. 천천히 먹으면 다 먹을 수 있을 걸?”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차수희가 나무젓가락을 건네며 눈을 빛냈다.

“그럼, 날 찾아온 이유가 뭔지 먼저 한 번 들어볼까? 참기 힘들 정도로 궁금했거든-.”

그녀의 질문에 잠시 생각을 정리한 이도원이 입을 열었다.

“오빠 분 되시는 차기열 회장님이 백 프로덕션을 인수하려 했어요. 저희 대표님과 제가 합심해서 인수를 막았고 이번 사건이 터졌죠.”

차수희의 표정이 살짝 떨렸다.

“우리 오빠가… 이 일과 관련이 있다는 소리니?”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예. 근데 제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건 지은이예요. 차기열 회장님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레드엔터테인먼트에서 찬밥 대우를 받는 것도, 이번 스캔들이 터진 것도 이상하죠. 차기열 회장님이 이런 일들을 방임한 이유가 뭘까요?”

나직이 한숨을 내쉰 차수희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그래, 이제는 네 일이기도 하니까 알아야겠지. 우리 아버지가 재혼하신 건 알고 있지?”

“예.”

“다들 지은이가 우리와 엄마만 다른 걸로 알고 있지만… 아버지도 달라. 우리 아버지는 지은이가 자신의 혈육이 아니라는 소외감이 들지 않도록 더 신경을 쓰셨고. 지은이에게도 유산을 남기셨어.”

이도원은 가만히 듣기만 했다.

한편 차수희가 계속 말했다.

“하지만 오빤 지은이에게 남긴 유산까지 탐냈지. 회사 사정이 전보다 어려워져서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도를 넘은 거야. 반면 지은이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겨준 걸 오빠에게 넘기고 싶지 않다고 밝혔고, 평소에도 지은이의 존재를 달갑지 않게 여기던 오빤 오히려 그 애를 이용하려고 했지. 지은이 회사에 요청해서 비즈니스 관계인 상대 업체를 대상으로…….”

차수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내비쳤다.

눈가를 훔친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설명했다.

“나도 지은이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들이야. 물론 그 애는 거절을 했고, 두 사람 사이의 골은 더욱 깊어져갔어. 그런데 지은이가 말하지 않았니? 그 애가 말하길 너랑 친하다고 하던데…….”

“친하긴 하지만 그런 이야길 나누는 사이는 아니에요.”

이도원이 덧붙였다.

“물론 교제하는 사이도 아니고요.”

차수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럼 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이도원은 탕수육을 하나 집어먹고 대답했다.

“일단 지은이를 만나봐야겠죠. 그리고 선생님이 저를 좀 변호해주셔야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던 이도원이 입을 열었다.

“이이제이. 같은 수단으로 역공을 할 거예요. 레드엔터테인먼트만 타격을 입고 오빠 분께는 아무 피해도 없을 겁니다.”

*

이도원은 다음으로 차지은을 만났다.

장소는 대학로의 연습실이었다.

차지은은 다소 어색한 태도로 이도원을 대했다.

‘열애설이라니…….’

한 번도 시달려 본 적이 없는 루머에 차지은은 머릿속이 하예졌다.

반면 이도원은 지나치게 침착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이번에는 그가 먼저 물어보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차지은이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일단 해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매니저 오빠는 해명하지 말라고 하는데 무턱대고 믿을 수가 없어요. 아시다시피 전 회사에서 거의 버리는 카드잖아요?”

차지은은 힘없이 말하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이도원이 말했다.

“내 생각도 같아. 해명하지 마.”

“네?”

깜짝 놀란 차지은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뜻밖의 말을 던진 이도원이 설명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네가 바람둥이 이도원에게 속은 가녀린 여배우가 되는 거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연기해줘. 그래야 네 위치가 타격을 안 입어. 만약 해명을 했다가 지금의 오해가 풀리면 구설수에 휘말려 나와 결별한 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소수 팬들의 안타까움은 살 수는 있겠지만 여배우로서의 값어치는 떨어질 거다.”

이도원은 이 상황을 타개하겠다고 빗대어 말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차지은의 이미지까지 지킬 생각이었다.

‘단 하나도 마음대로 되도록 놔두지 않겠다.’

이도원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가 차지은에게 덧붙였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되, 날 위한다면 한 가지 해줄 일이 있어. 그날 <루나>에 너도 있었다고 말해줘.”

차지은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날 레드엔터테인먼트에서 저를 상납하러 보냈던 일을 터트리라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여배우로서 이미지는 끝이다.

역시나 이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루나>에 있었다. 딱 거기까지. 그 이상 어떤 말도 덧붙일 필요 없어. 그거면 사람들은 네가 나와 같은 파티 룸 안에 있었다고 생각할 거야.”

차지은은 실제로 그날 <루나>에 갔다. 앞뒤가 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인 것이다.

더군다나 레드엔터테인먼트에서 이 부분을 걸고넘어질 일도 없었다.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성상납과 관계된 이상 오히려 어떻게든 숨겨야 하는 치부인 셈이다.

‘설마?’

똑똑한 머리를 굴리며 이런 의도를 모두 파악한 차지은은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불의의 사건에도 당황하지 않고 이 모든 판을 짠 이도원에게 경악한 것이다.

마침내 이도원이 물었다.

“그럼 난 사생활이 지저분하다는 오명 정도는 덮을 수 있게 될 거야. 도와줄래?”

*

차수희와 차지은 자매를 만난 다음 이도원은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훑었다.

그 중간에 이번 기사를 보고 박서진이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

이도원은 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 이도원과 함께 ‘스폰서 의혹’의 중심에 있는 대선타이어 막내딸과 연락을 취하려면 휴대폰 번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도원아! 너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이도원은 박서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서진아.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하자.”

-응? 뭔데?

“너희 아버지, 아직 KAS 방송국에 계셔?”

-응… 안 그래도 네 얘기 해봤는데, 아빠가 손 쓸 방법이 없다고…….

박서진은 미안해했지만 이도원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괜찮아. 다름이 아니고, KAS 국장님 따님 번호 좀 알아봐 줘.”

-알겠어. 근데 그건 왜?

“나중에 말해줄게. 지금 바로, 부탁해.”

-알겠어! 당장 알아내서 문자로 보내줄게.

“그래. 고맙다. 미안하고”

이도원은 전화를 끊고 연습실 앞에 주차된 밴에 올랐다. 그러자 오준식이 시동을 걸며 물었다.

“어디로 갈까?”

이도원은 검지를 입에 붙이며 조용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가 시트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면서 생각에 빠진지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박서진의 문자가 도착했다.

이도원은 곧 바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이도원입니다.”

간결하게 답한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그때 함께 계셨던 대선타이어 막내 따님 번호 좀 부탁드립니다.”

-왜 그러시죠?

그녀는 이 상황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은지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이도원은 이런 상황을 오래 끌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제 상황은 알고 계시죠? 만약 이대로 두면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난처한 상황에 처할 겁니다. 번호, 주세요.”

그녀가 잠깐 망설이다 대답했다.

-알겠어요. 대신 제가 알려줬다는 말은 어디에도 하지 말아주세요.

이도원은 전화번호를 받고 대선타이어 막내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루나>에 함께 있었다는 차지은의 증언만으로 ‘스폰서 의혹’을 모두 떨쳐내기에는 부족했다. 어쩌면 차지은까지 도매금으로 묶이며 루머가 불어날 지도 몰랐다. 따라서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의혹을 벗어야만 했다.

통화 신호음이 울리고,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이도원입니다. 기사 보셔서 아시겠지만 시간이 부족하니 전화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도원의 말에 상대방의 목소리가 조금 살아났다.

-어떡하죠? 무슨 좋은 방법이 있나요?

그녀는 의존적으로 물었다.

이도원은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을 대안을 내놓았다.

“머지않아 기자를 보내겠습니다. 이도원은 김진우의 초대로 생일파티에 참여한 것뿐이다. 이것만 증언해 주십시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

김흥수 기자는 주먹으로 책상을 때렸다.

쾅!

“어휴! 이런 자질구레한 놈들이 터트린 기사를 왜 우리가 놓친 거야?”

그 옆에 있던 고건수 기자가 의자를 드르륵 밀며 답했다.

“제보자가 있었다고 하잖아요? 선배, 이거 제가 봤을 때 영 냄새가 나요. 건드려봐야 똥 묻을 것 같은 느낌이란 거죠.”

능청스러운 말투에 김흥수가 눈을 부라리며 답했다.

“똥 묻을 것 같아서 너도 나도 달려들어? 건수야, 네 눈에는 지금 <쥐구멍 언론> 애들 기사랑 이미지 복사해서 때려 박고 있는 이 많은 기사들이 안 보이니?”

“헛짓이죠.”

고건수가 펜을 돌리며 말했다.

“제가 봤을 때 얼마 못 갑니다. 똥이에요, 똥. 저것도, 저것도.”

모니터 화면 안에는 이도원에 대한 기사들이 나열돼 있었다.

[이도원 ‘스폰서 의혹’ 과연 진실은?]

[또 터진 ‘연예계 스폰서’, 이번에는 올해 최고의 신인 이도원?]

[이도원, 차지은과 열애설 직후 터진 스폰서 의혹]

[일명 도지 커플, 핑크빛이 아닌 회색빛 열애설]

.

.

.

인터넷 기사들을 훑은 김흥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휴대폰에서 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김흥수는 전화를 신경질적으로 받았다.

“김흥숩니다!”

-안녕하세요. 이도원입니다.

선명한 목소리.

화들짝 놀란 김흥수는 휴대폰을 떨어트릴 뻔 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옆에서 떠드는 고건수의 입을 막았다.

“도원 씨? 오랜만이네요. 그런데…….”

말끝을 흐린 그는 단어 선택에 온 신경을 집중해 덧붙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잠시 조용하던 수화기 너머로, 이도원이 대답했다.

-좋은 소식 있으면 가장 먼저 연락드리겠다는 약속. 지키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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