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12화 (112/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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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 소재의 <백 프로덕션>.

주주총회 인원들이 하나 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회사 주차장에는 고급 외제차들이 줄줄이 늘어섰다. 주주들의 방문으로 인해 백 프로덕션 내부에 비상이 걸렸다.

정장을 차려입은 이상백과 이도원은 대표실에 마주앉아 있었다. 이상백이 안경 너머로 이도원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전혀 긴장하지 않은 것 같구나. 어머님이 보내오신 위임장이다.”

이도원은 서류봉투에 담긴 위임장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상백이 말했다.

“먼저 가있을 테니 늦지 않게 오너라.”

“예. 대표님.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다음으로 참여할 작품을 보는 중이었다.

이상백은 방해하지 않고 먼저 비즈니스 룸으로 갔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총회에 참여할 아홉 명의 주주들이 인사를 건넸다. 그중에는 차기열과 김 의원의 대리인도 있었다.

이상백이 자리에 앉으며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요. 반갑습니다. 자, 그럼 잠시 후 차기열 대주주님이 요청하신 백 프로덕션 M&A(인수합병) 관련 임시주주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인수합병은 총회에 참가한 주주들이 의결권을 행사함으로서 특별결의로 진행된다.

현재 이상백은 35%의 지분을 보유한 상태였다.

다음으로 차기열이 27%의 지분을 갖고 있고, 22%의 우호지분을 더 확보한 상황이었다.

만약 이대로 결의가 끝난다면 백 프로덕션은 인수절차를 밟아야할 상황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상백은 차분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이상백을 주시하던 차기열은 속이 영 찜찜했다.

‘김희주란 여자가 설마… 이상백 대표쪽 사람인가?’

김희주의 지분은 16%. 그녀가 이상백의 손을 들어준다면, 이상백은 총 51%의 지분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되면 백 프로덕션 인수는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차기열은 한 자리 남은 공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한 자리가 비었군요.”

서류를 보던 이상백이 웃는 낯으로 답했다.

“지금 오고 있을 겁니다. 퍼포먼스를 좋아하는 분이라서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차기열은 얼굴 표정을 와락 구겼다.

‘설마 믿는 구석이 있어서 주주들을 설득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건가?’

대부분이 백 프로덕션 창립 초기에 투자한 사람들이고, 엄밀히 말하면 키스톤 월드 측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상백이 자포자기 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던 차기열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김희주에 대한 조사는 완벽하게 끝냈다. 그 결과 이상백과의 접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찜찜해도 큰 걱정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이유는 머지 않아 밝혀졌다. 비즈니스 룸으로 들어온 인물은 김희주란 여자가 아니었다.

“이도원?”

차기열은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모든 주주들이 혼비백산한 표정이었다.

문을 열고 장내로 들어선 이도원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나쳐 대주주석에 앉았다.

이내, 이도원의 입이 열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 김희주 여사의 위임장을 받고 참석한 대리인, 이도원입니다.”

차기열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상백이 아니라 이도원이었구나!’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도원은 얼마 전까지 스물두 살의 신인배우였다. 그런 이도원이 자회사 지분을 확보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회사 사정이 어렵던 백 프로덕션 창립 초기부터 미리 준비를 했다는 건데, 상황파악을 끝낸 지금도 납득하기 힘들었다.

‘예언가라도 된단 말이야?’

차기열이 얼마나 분통하든지 간에 주주총회는 차질없이 시작됐다.

“모두 도착하셨으니 결의를 시작해 볼까요?”

이상백의 목소리를 들은 차기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패배가 정해진 총회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단순히 계획을 실패했다는 좌절감보다, 백 프로덕션 인수전에서 참패했다는 모욕감이 더욱 컸다.

*

주주총회는 두 시간 만에 마무리 됐다.

백 프로덕션은 대주주 김희주의 위임장을 손에 넣은 이도원의 등장으로 회사가 인수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차기열이 야심차게 준비한 인수합병 계획도 백지화되고 만 것이다.

차기열은 차에 오르자마자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겁니까?”

보조석에 탄 비서가 경직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이도원이 배후에 있을 줄은…….”

“미행이라도 붙였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전 회장님께선 불법적인 일은 금하는…….”

“그건 아버지고요!”

씩씩거리던 차기열이 차갑게 지시했다.

“내리십시오.”

“예?”

차기열이 눈짓했다.

“내리라고 했습니다.”

비서는 망설이던 끝에 차문을 열고 내렸다.

그를 쫓아낸 차기열은 운전수에게 말했다.

“바로 회사로 들어가주십시오.”

“예, 회장님.”

운전수가 대답하며 키스톤 월드 본사로 차를 몰았다.

차기열은 레드엔터테인먼트 이로빈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동차와 연결된 화상전화기에 이로빈이 나타났다.

-아, 회장님.

“이 대표.”

차기열은 차 시트 안쪽의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며 말했다.

“이도원이었습니다.”

-예?

“대주주 김희주. 그 정체가 이도원이었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마침내 이로빈이 중얼거렸다.

-우리가 이도원을 너무 만만히 봤던 것 같군요. 애송이인줄 알았더니…….

차기열은 미간을 찌푸렸다.

“감탄은 나중에 하고,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강아지라고 생각해서 길들이려고 했는데 늑대였군요. 평화적으로 안 된다면 겁을 줘야지요.

“겁을 줄 방법은?”

이로빈의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단방에 즉사시킬 순 없겠지만 준비한 공포탄 정도는 있습니다.

이로빈은 모니터를 통해 사진을 전송했다.

대학로 연습실 옥상에서 찍힌 사진이었다. 그 안에는 차지은과, 그녀를 뒤에서 껴안고 있는 듯 보이는 이도원이 있었다. 실제로는 이도원이 김진우와 실랑이를 벌이다 넘어지려는 차지은을 잡아준 것에 불과했지만 사진이 찍힌 구도 상 오해의 여지가 충분했다.

그 사진을 보고도 차기열 회장의 얼굴은 여전히 불쾌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뭐 어떻다는 겁니까?”

이로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우의 매니저가 혹시나 싸우나 싶어서 찍은 동영상을 살짝 손 본 겁니다. 두 사람이 애틋한 관계인 것 같지요? 언론에 흘리면 명예훼손이 되겠지만, 익명으로 파파라치 사이트에 제보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대중들은 확대해석을 할테고 루머를 만들어낼 겁니다. 두 사람을 충분히 엮을 수 있겠지요.”

그 말에 차기열이 표정을 구겼다.

“이런 치졸한 장난이 이도원에게 타격이 되리라고 봅니까? 대중들의 시선이 얼마나 호의적인데, 이런 스캔들은 아무런 문제도 안 될 겁니다. 백 프로덕션에서 말만 잘 붙이면 오히려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 될 거요.”

-문제가 안 되면 문제로 만들면 될 일이지요.

순간 화면이 바뀌었다.

한 여성과 이도원이 함께 찍은 셀프카메라였다.

사진 속의 여성을 알아본 차기열이 깜짝 놀랐다.

“이건?”

이로빈이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대선타이어의 막내딸이 직접 찍은 셀카입니다. 이 자리에 있던 진우가 가져왔더군요. 물론 이 사진을 공개해도 백 프로덕션에서 발 빠르게 대처하면 연예계 해프닝으로 끝날 겁니다. 그래서 이도원도 굳이 조심하지 않은 걸 테고, 우리도 보관만 하고 있었습니다.

화면에 이로빈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차지은과 스캔들이 터지고 스폰서 의혹을 엮으면 어떻게 될까요? 사생활이 지저분한 놈이 하는 작품마다 성공한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로 얘기가 달라집니다. 그럼 대중들이 이도원에게 품었던 호감은 단숨에 실망으로 뒤바뀌겠지요.

차기열이 곰곰이 생각하다 물었다.

“차지은과 대선타이어 막내딸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겠습니까? 내 비록 차지은과 혈육은 아니라지만 엄연히 우리 집안사람입니다. 이도원과 엮여서 스캔들이 터지면 자칫 나나, 내 동생에게까지 피해가 올 수 있어요.”

이로빈은 고개를 저었다.

-지은이는 어차피 우리 소속 애가 아닙니까? 그런 일이 없게끔 단도리를 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표적은 이도원이니까요. 또한 대선타이어의 막내딸 역시 우리가 제보한 걸 영원히 모를 겁니다. 익명으로 비 언론을 이용해 퍼트릴 생각입니까요. 저희 회사에서 암암리에 운영비를 대고 있는 <쥐구멍 언론>이란 사이트인데, 그동안 경쟁업체나 회사와 트러블이 있는 아이들 정보를 흘려주면서 대형화 시켜놨죠.

<쥐구멍 언론>은 어쩌면 언론보다도 파급력이 큰 곳이었다. 그리고 이로빈은 한두 번 해보는 작업이 아닌 듯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 모습에 문득 호기심이 생긴 차기열이 그에게 물었다.

“왜 지금까지 이런 수를 쓰지 않았던 겁니까?”

-언제든 뽑을 수 있는 히든카드는 최대한 아껴 써야지요. 더군다나 혹시라도 진흙탕 싸움이 된다면 이기더라도 덩치가 저희 쪽이 손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도원이 이상 크면 손쓰기가 힘들게 됐습니다. 그래서 흙탕물이 묻더라도 처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이로빈이 묻자 차기열은 냉수를 단숨에 비우며 대답했다.

“어차피 백 프로덕션을 인수하려면 이도원이 사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백 프로덕션은 인수하는 대로 레드엔터테인먼트에 합병시키는 쪽으로 진행하겠습니다.”

*

이도원과 차지은의 스캔들이 터졌다. <쥐구멍 언론>에서 확보한 두 사람의 사진을 시작으로 보도는 인터넷 신문사로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여기까진 해명만 하면 될 문제였다. 그런데 머지않아 <쥐구멍 언론>을 통해 ‘이도원 스폰서 의혹’이 제기됐다. 대선타이어 막내딸과 찍은 사진이 보란 듯이 공개된 것이다.

갑작스러운 논란으로 이도원의 스케줄이 모두 취소됐다. 그 시각 이도원은 이상백과 마주앉아 있었다.

이상백이 먼저 물었다.

“두 가지만 확인하마. 첫째, 차지은과 열애설이 사실이냐?”

이도원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차지은을 포옹한 게 아니고, 이 당시 김진우가 밀어서 넘어질까 봐 잡아준 겁니다.”

옥상에 있던 빨래대가 김진우를 교묘하게 가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개를 끄덕인 이상백이 다시 물었다.

“둘째, 대선타이어 막내딸과 친분이 있는 사이냐?”

이상백은 차라리 이도원이 그녀와 사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이기를 바라며 물었다. 그러나 이도원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김진우가 초대해서 간 스폰서 파티에서 알게된 사입니다. 그때 이후로 연락한 적은 없고요.”

이상백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번 건 크다. 이런 치명적인 루머는 펙트보다 무서운 법이야. 다방면으로 막아보고 있지만 벌써 추측성 기사가 올라오고 있다. 루머를 뒷받침하는 토대가 너무 교묘해.”

이도원은 소파에 등을 묻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의외로 침착하고 담담했다.

마침내 이도원이 입을 열었다.

“막지 말아주세요.”

“뭐?”

“기사를 내려 봐야 도둑이 제 발 저린 것밖에 되질 않습니다. 피하면 피할수록 상황이 안 좋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더 나빠질 상황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이상백이 고개를 저으며 한탄했다.

반면 이도원은 두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레드엔터테인먼트에서 정보를 흘린 건 확실합니다. 사진에 찍힌 두 곳 모두 김진우가 함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앞으로 어쩔 셈이냐?”

이상백은 물어보면서도 이도원의 반응을 납득하기 힘들었다.

보통 이들이라면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고가 마비될 정도의 사안이었다. 높게 올라간 만큼 추락했을 때의 절망감과 상처가 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도원은 시종일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상백의 물음에 이도원이 대답했다.

“먼저 사건과 관계된 사람들을 만나봐야겠죠.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하니까요. 그리고 시작할 겁니다.”

“뭘 시작해?”

이상백이 눈가를 가늘게 좁히며 물었다.

이도원은 씨익 웃었다.

“반격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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