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11화 (111/178)

< 리액팅 (reacting; 반응연기) (5) > 끝< 리액팅 (reacting; 반응연기) (6) >

배우들의 호흡이 자연스러우니 극은 물처럼 줄기차게 흘러갔다.

이도원은 연습 때 했던 <그날을 기약하며>를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무대가 바뀔 때마다 관객들의 박수소리가 쏟아졌다.

독립군의 죽음을 다루는 장면들이 지나갔다.

차지은은 오빠를 잃고 슬피 우는 ‘링링’을 잘 소화했다.

이도원 역시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고뇌하는 ‘안중근’역할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무대를 장악한 배우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관객들의 애달픈 감정을 자극하며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노래와 대사가 담긴 장면들이 몇 차례 지나갔다.

제 1막이 끝나자 인터미션이 발생했다. 휴식 시간 동안 배우들은 그동안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따뜻한 물을 마시며 목 관리를 했다.

이도원도 물을 마시며 호흡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때 차지은이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오빠. 그렇게 호흡 훈련 너무 열심히 하시면 뇌에 공기 모자라서 현기증 나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해서 이 정도는 충분해.”

이도원의 대답을 들은 차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연기를 잘하는 데는 이유가 있네요. 그나저나 슬프지 않아요? 이제 곧 저 죽는데.”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연기 잘해서 슬프게 해줘. 한 번 울려봐.”

그러자 차지은이 의지에 찬 눈으로 대답했다.

“기대하시라고요. 울려드린다고요.”

다시 무대가 시작됐다.

무대를 종횡무진하며 신출귀몰하게 추격하는 일본군.

일본군을 피하는 초조한 독립군들의 모습이 보여졌다.

이도원은 ‘안중근’의 초목표라고 할 수 있는 거사를 위해 준비를 마쳤다.

무대가 비워지고, ‘링링’ 역할의 차지은과 둘만 남은 시점.

차지은이 수줍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 할 말이… 있어요.”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발끝을 모았다.

“그동안 얘기해야지 해야지 했는데…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얘기해야 할 것 같아요. 언젠가부터 선생님을 뵈면 제 마음이… 그러니까, 제 마음이…….”

차지은이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녀가 뭔가를 발견한 듯 이도원의 몸을 돌려세우며 날카롭게 외쳤다.

“안 돼!”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차지은이 일본군 ‘와다’가 쏜 총알을 몸으로 막아냈다.

동시에 울려 퍼지는 또 한 발의 총소리.

독립군이 쏜 총알이 ‘와다’를 쓰러트렸다.

그와 동시에 차지은도 종잇장처럼 스르르 이도원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링링!”

독립군들이 그녀를 외치며 달려왔다.

그제야 차지은은 이도원을 안았던 손을 풀었다.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머리가 헝클어졌겠죠? 내 모습 흉해요?”

이내 이도원의 품에 안긴 차지은의 잇새로 애절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겨울 눈 내리듯 어둔 밤 밝히듯 꽃향기 날리듯 내 맘에 찾아온 당신

온 몸이 떨려 눈물이 날려

말하면 사라질까봐 꿈 같이 사라질까봐,

숨겨온 당신은 나의 첫사랑

심장이 두근거렸죠 숨이 멎을 것 같았죠.

눈물이 흘렀지만

그대는 몰랐죠 나의 맘.

나 그대- 떠나는 지금

그대 슬피 우는 건

사랑이라 믿어도 될 까요-.

울지마요, 그대

슬퍼마요, 그대

나를 봐요, 웃어 봐요.

나는 행복해요.”

차지은이 이도원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이도원의 가슴속으로 답답한 안개가 훅 불어왔다.

순간 그의 입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차지은의 애절한 노랫소리를 잇는 슬픈 절규는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 다음 이도원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이 나오고, 그는 법정에서 <누가 죄인인가>를 불렀다.

이도원의 노랫소리가 무대를 넘어 객석을 장악하며 엄숙함을 더했고, 노래를 통해 낱낱이 밝히는 일본군의 죄악들이 무거운 창날처럼 관객들의 가슴을 찔렀다.

민족의 한을 관객들의 가슴에 못 박은 이도원은 <운명>이란 곡으로 다시 한 번 몰아쳤다.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이 서로의 입장을 두고 주고받으며 부르는 노래였다. 선악을 떠나 군인으로서 조국을 위한 두 사람의 신념이 오갔다.

이도원은 뒤이어 그 해답에 가까운 곡인 <동양평화>를 불렀고, 드디어 대미(大尾)를 맺을 차례가 되었다.

백의 홑겹 내의로 갈아입은 이도원이 사형장 위에 섰다.

이윽고 내레이션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이도원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비통한 표정이 드러났다. 그리고…….

순간 모든 호흡이 담긴 폭발적인 발성이 터졌다.

마치 둔기로 내리치듯 강렬한 소리!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큰 뜻을 품었으니 죽어도 그 뜻 잊지 말자- 하늘에 대고 맹세해본다.

하늘이시여 도와주소서- 우리 꿈 이루도록 하늘이시여 지켜주소서- 우리 뜻 이루도록-.”

수용인원 천 명이 넘는 대극장이 꽉 찼다.

이도원의 음이 또 다시 올라갔다.

“하늘이시여 도와주소서 우리 꿈 이루도록 하늘이시여 지켜주소서 우리 뜻 이루도-록-!”

소리는 끝없이 뻗어나가다 뚝 멎었다.

점점 커져가는 음악과 함께 이도원의 눈에는 안대가 씌워졌다. 그리고 교수대의 바닥이 덜컥 열리며 이도원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지켜보던 일본군 간수 ‘치바’가 진심으로 고개 숙여 경의를 표했다.

조명이 점차 어두워지고 이내 암흑이 극장 안을 뒤덮었다.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가 흘러나왔다.

막이 내렸음에도 박수 소리는 멈출 줄 몰랐다.

이도원을 비롯한 배우들이 무대 위에 올라가 나란히 서서 관객들에게 깊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박수소리가 더욱 커졌다.

한 달 하고도 보름이 더 진행되는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첫 신호탄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작은 이도원이 알리고, 끝맺음은 정태화가 하기로 돼있었다. 그리고 이도원은 지금 훌륭하게 첫 단추를 꿴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이도원은 고개를 들어 관객과 마주보며 전율했다.

뮤지컬 <영웅>은 최초 국내 창작뮤지컬의 초석을 놓은 <명성황후>의 윤호진 대표가 안중근기념사업회로부터 제안을 받으며 5년여의 제작 기간과 37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만든 작품이었다. 따라서 첫 공연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2009년 10월 26일이었다.

그리고 2021년 3월 1일, 한민족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던 삼일절에 다시 <영웅>의 서막이 오르고 있는 것이다.

뜻 깊은 공연이 끝나고 대기실로 돌아가자 정태화가 와있었다.

“바톤을 이어받을 생각을 하니 부담감이 들더군. 훌륭한 무대였다. 잘했어.”

정태화는 이도원의 어깨를 두드렸다.

신용운 역시 만족한 눈빛으로 배우들을 보고 있었다.

그때 원래 이도원의 역할이었던 권명섭이 들어왔다.

“내심 걱정도 하고 질투도 했는데, 공연 보고 모두 접었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권명섭의 말에 이도원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감사합니다. 형.”

이윽고 반가운 얼굴들이 꽃다발을 안고 대기실로 찾아왔다.

어머니와 누나, 오준식, 유성연이었다.

“정말 자랑스럽다. 안중근 의사라니…….”

어머니의 화장에는 눈물자국이 나있었다.

극의 애절함 때문인지, 이도원 때문인지 불분명했다.

이도원은 그저 어머니가 눈물짓는 모습을 마주보는 것만으로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이리오세요.”

그는 어머니를 끌어당기며 안아주었다.

어깨 너머로 이다원이 말했다.

“나도 울었어. 화장 고친거야. 와… 내용 진짜 슬프더라.”

“그것도 도원이가 연기를 잘해서 그런 거에요.”

유성연이 호들갑을 떨며 이다원에게 친근하게 말했다.

이다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요, 언니.”

오준식은 이다원을 훔쳐보며 이도원에게 말했다.

“훌륭했어.”

무언가 평소와 다르게 성의 없는 말투였다.

그리고 이도원은 눈치가 백 단이었다.

‘준식이가 누나 옆에 앉았지, 아마?’

피식 웃은 그는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집에까지 가서 가족들 데려와줘서 고맙다.”

오준식은 이도원의 가족들에게 찾아가 직접 운전까지 하며 이곳에 모신 것이다.

아낌없는 찬사를 듣고보니 모두들 뮤지컬을 감동적으로 감상한 것 같았다.

괜스레 안심이 된 이도원은 꽃다발을 품에 넘치도록 받으며 활짝 웃었다.

배우로서 가장 보람된 순간이었다.

*

이도원은 4월 29일 제 58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에서 <악마의 재능>으로 ‘남자신인연기상’을 받았다. 또한 TV부문에서도 드라마 <시간아! 돌아와>를 통해 ‘남자신인연기상’까지 손에 넣는 기염을 토했다.

그뿐인가 하면 5월 13일 개최된 제 16회 <뮤지컬어워즈>에선 <영웅>으로 ‘남우신인상’을 받았다.

연말부터 시작해서 모든 신인상을 휩쓸었으니, 상복이 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쉴 틈이 없었다. 이도원이 주연으로 참여한 정윤욱 감독의 영화 <투사> 또한 5월 달에 개봉하면서 다시 화제의 인물로 떠오른 것이다.

노예로 쫓겨난 조선 최고의 명장이, 가족을 비롯해 주군인 임금까지도 살해한 왕세자에게 복수하는 내용의 블록버스터 사극판타지 <투사>는 첫 주차만 벌써 오십만 관객을 넘긴 상태였다. 워낙 제작비가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제 가까스로 손익분기점에 다가 가고 있는 실정이었지만 이대로 순항한다면 천만 관객도 꿈이 아닌 상황이었다.

무사히 첫 공연을 마친 이도원은 성북구 월곡동의 집으로 갔다.

현관문을 열자 실내로부터 찬바람이 불어왔다.

‘따뜻했었는데.’

이도원은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보일러를 켠 뒤 샤워를 하고 나왔다.

물기가 흥건한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연예인 인기투표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가장 사랑받은 스타가 있죠?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무명이었던 이 배우는 현재 영화 한 편 당 개런티만 8억을 넘겼습니다. 뛰어난 외모와 믿기 힘든 연기력으로 단숨에 시선을 끌며 전국을 들썩인 배우! 데뷔 후 2년 만에 영화 두 편, 드라마 한 편, 뮤지컬 하나를 선보이며 그때마다 호평일색으로 승승장구 하는 배우! 이젠 신인이란 말 보다 연예계의 블루칩으로 떠오르는 배우, 바로 이도원 씨 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도원이 출연한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소개였다.

그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이도원은 전화를 받았다.

“네, 엄마.”

그는 발톱을 깎으며 휴대폰을 머리와 어깨 사이에 끼고 통화를 했다.

수화기 뒤편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밥은 잘 먹고 다니니?

“그럼요. 누나도 잘 지내죠?”

-그럼, 학교 잘 다니고 있지.

이도원은 씨익 웃었다.

“조만간 한 번 찾아뵐게요. 멀지도 않은데요, 뭐.”

-그래. 항상 조심하고… 네가 말한 대로 위임장은 모두 써뒀어. <키스톤 월드>쪽 비서님도 돌려보냈다. 간 떨려서 혼났어, 아주.

“잘하셨어요. 주무실 거죠?”

-그래야지. 내일 출근도 해야 하니까.

“일 그만두시래도요. 제가 이제는 가장 역할을 하잖아요.”

-가장 역할 뿐이니? 이렇게 모두가 어려운 때 집을 선물하는 아들이라니… TV에서만 보던 일이 일어나니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그래도 놀아야 뭘 해? 나도 열심히 살아야 아들 욕 안 먹이지.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자 이도원은 절로 웃음이 났다.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좀 더 나눈 뒤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너도 잘 자라.

어머니는 먼저 전화를 끊었다.

이도원은 휴대폰을 소파 위에 던져놓고 기지개를 폈다.

그는 얼마 전 살던 아파트를 자신의 명의로 돌리고, 대신 어머니 명의로 송파구 가락동의 30평 아파트를 선물했다. 같이 살면 찾아오는 팬들이나 기자들, 파파라치까지 신경 쓰느라 가족들도 불편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도원이 명의 이전을 서두른 데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다행히 아직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군.’

이도원은 탁자 위의 태블릿 스위치를 켰다. 그러자 화면으로 ‘장외주식 대표사이트’가 나타났다.

*

5월 25일 인천공항.

한국으로 입국한 차기열 회장은 공항을 빠져나와 에쿠스에 올랐다. 그는 차에 탑승하자마자 물었다.

“김희주란 여자는 만나봤습니까?”

보조석에 타고 있던 비서가 대답했다.

“예. 하지만 설득하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렇다고 이상백 대표 측 손을 들어줄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 분쟁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든 손해 보는 일이 없도록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려는 느낌입니다.”

차기열은 눈살을 찌푸렸다.

“김 실장. 김희주가 백 프로덕션 쪽 사람들과 연고가 없는 건 확실합니까?”

“예. 주소지로 조회해 봐도 딸 하나랑 오순도순 사는 직장인 여성입니다. ‘김희주’에 대한 내용은 내부 정보라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투자 초기 적은 금액으로 투자를 시작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전까지 딸애 학자금 대출이 끼어있었고, 백 프로덕션 주가가 오르면서 월 상환금액이 점차 늘었거든요.”

“주식을 처분해서 한 번에 갚은 것도 아니고, 주식은 그대로 맡겨놓고 월 상환금만 늘었다고요?”

“예. 근래 회사에서 승진하면서 딱 그 만큼 상환금이 올랐습니다. 오로지 백 프로덕션에만 투자한 채 보유한 주식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두는 걸 보면 주식초보 같은데,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겪이죠. 그래서 백 프로덕션에 대한 믿음도 큰 것 같습니다.”

비서의 말에 차기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너무 완벽하게 들어맞아서 이상하군. 회사이력서나 등본이나 초본으로 알아볼 수는 없습니까?”

“개인정보라 그쪽은 알아보기가 힘듭니다. 직장도 번듯한 곳이라서 공개하려하지 않고요. 그리고…….”

비서는 말을 이었다.

“인터넷뱅킹이나 쇼핑몰도 전혀 이용한 내역이 없습니다. 은행기록을 알아보려 해도 아직 보유한 주식을 매매한 적이 없어서 깨끗하고요. 처음부터 자본가였던 건 아니고, 백 프로덕션의 주가상승에 편승해서 돈맛을 좀 본 걸로 생각됩니다. 현 직장의 근속기 간도 길고, 생활도 아주 검소한 것으로 봐서는 특별한 문제도 없어 보이고요.”

차기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무리를 한다면 더 세세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만큼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특별히 눈에 띄는 문제도 없을뿐더러 주주총회 당일인 오늘 알아봐야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고로, 차기열은 관심을 끄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서가 말했다.

“백 프로덕션으로 바로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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