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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31일.
삼성동 비즈니스 바 <아프로디테> 망년회.
룸으로 된 공간 안에는 세 사람이 모여 앉았다.
그중 김진우가 공손하게 잔을 채웠다.
“영광입니다.”
잔을 받은 남자 차기열이 대답했다.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는 레드 엔터테인먼트 대표 이로빈을 보며 물었다.
“훼방꾼이 있다고요?”
이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원이라고, 데뷔 초부터 지켜보던 녀석입니다. 고작 스물두 살 밖에 안 먹은 놈이 머리 돌아가는 게 보통 영악한 게 아니에요. 이번에 회장님이 부탁하신 일에도 개입해서 막았습니다. 차지은 건, <투사>건 모두 말입니다.”
이로빈이 술을 들이켜고 눈살을 찌푸렸다. 도수 높은 양주가 쓰기 때문인지, 불쾌해서인지 파악하기 애매한 표정을 짓고는 화제를 돌렸다.
“아버님께서 그렇게 되시고 한동안 바쁘셨다지요?”
이로빈이 묻자 차기열이 피식 웃었다.
“알맹이가 클수록 허물이 많이 남는 법이니까요. 아버진 훌륭한 사업가셨지만 생전 막내만을 편애하셨지요.”
“우리 회장님께서 부정이 그리워 차지은을 그렇게 대하실 리는 없을 테고…….”
중얼거리던 이로빈이 덧붙여 물었다.
“제 추측으로는 차지은이 뭔가 회장님의 심기를 거스른 것 같은데요?”
“아버지가 막내에게 상속한 지분이 좀 있습니다.”
대뜸 대답한 차기열이 말했다.
“안 내어놓더라고요. 한 푼이 시급한 이때.”
궁금증을 해결한 이로빈이 미소를 띠었다.
“마음고생이 심하시겠습니다. 거기다 약혼녀 분께서 이번 하차 건으로 활동이 힘들어지셨다고요. 제가 누굽니까? 맨손으로 이 바닥에서 대형 기획사 대표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업계의 반절은 저를 알지요. 회장님만 허락하신다면 약혼녀 분을 저희 기획사에서 케어할 겁니다.”
그 말에 차기열이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주면 고맙겠습니다.”
“그런데 <투사> 건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이로빈은 <투사> 사건의 자세한 내막에 대해 물었다.
그에 차기열이 숨기지 않고 말해주었다.
“서로 다치는 길을 선택해서라도 정윤욱 감독에게 꼭 복수를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신인 때 유감스러운 일이 있었다고요. 그저 잊으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기에 제가 투자자들을 설득해가며 좀 도왔습니다. 정윤욱 감독 입장에선 영화를 엎을 수도 없고, 제 약혼녀를 내보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 타이밍에 백 프로덕션이 끼어들어 박아현을 추천한 겁니다. 백 프로덕션이 투자를 진행하는 영화가 번번이 흥행하면서 투자자들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대로 두면 앞으로도 계속 자본력이 불어날 테고 종국에는 막을 수 없는 폭주기관차가 되겠지요.”
이로빈이 잔을 채우며 만면이 미소를 띠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백 프로덕션을 어서 인수하십시오. 집 주인만 쫓아내 주시면, 예쁘게 새 집 지어서 값 불리는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차기열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답했다.
“이상백. 그 자는 문제가 안돼요.”
툭 던진 그는 불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문제는 김희주라는 여잡니다. 백 프로덕션의 장외주식을 꾸준히 매수해왔더군요. 그 여자의 주식을 사들여야만 백 프로덕션 인수가 가능합니다.”
잠시 생각하던 이로빈이 물었다.
“만나보셨습니까?”
차기열이 고개를 저었다.
“철저히 거부하더군요. 그쪽 정체가 확실해져야 일을 진행할 텐데,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찜찜해요. 적당한 평수의 아파트 전셋집에 사는 평범한 직업의 여성이 그만한 돈을 굴리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고.”
그는 김진우를 슬쩍 쳐다보고 물었다.
“그나저나 김 의원은 어떻게 된 겁니까? 소유하고 있는 백 프로덕션 주식을 제게 매도한다고 합니까?”
“아마 힘들 것 같습니다.”
이로빈이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말씀대로 백 프로덕션은 멈추지 않는 기관찹니다. 이대로 두면 수익이 계속 오를 텐데 왜 매도하겠습니까? 우리 손은 들어준다고 하더군요. 그 분이 우리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언제든 원하는 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니.”
“그러면 또 문제가 됩니다.”
차기열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가진 지분이 많지 않아서 주주총회 때 의결권이 적을 겁니다. 의결에 미치는 영향이 적기 때문에 손을 들어준다는 도의적인 표현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거지요.”
고개를 끄덕인 이로빈이 대답했다.
“회장님이나 저나 백 프로덕션이 눈엣 가시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대로 두면 앞으로도 계속 지장을 받을 겁니다. 번거로우시더라도 다시 한 번 그 여자를 설득해 보시죠.”
차기열은 잔을 들며 건배를 청했다.
“알겠습니다. 내가 꼭 김희주란 사람을 만나보겠습니다.”
잔을 부딪친 이로빈이 김진우에게 시선을 돌리며 당부했다.
“그나저나 너 하나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다. 백 프로덕션을 인수할 때까지만 이도원과 트러블 일으키지 말고 쥐 죽은 듯이 있어.”
김진우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예.”
*
이도원은 연말에 진행된 제 58회 <대종상영화제>에서 ‘신인남우상’과 ‘인기상’을 수상했다.
또한 제 42회 <청룡영화제>에서도 ‘신인남우상’과 단체수상인 ‘인기스타상’을 수상했다.
이도원으로서는 그야말로 최고의 한 해를 보낸 것이다.
그같은 영광을 안겨준 <악마의 재능>은 청룡영화제에서도 삼관왕을 했고, 유태일 감독도 대종상영화제에 이어 또 한 번 ‘감독상’을 수여 받는 쾌거를 거뒀다.
그토록 빡빡한 시상식 일정을 끝낸 이도원은 이상백과 둘이 단촐한 연말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이상백이 진지한 얼굴로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보자고 한 건 너한테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도원이 말없이 바라보자 이상백이 말을 이었다.
“네게 개런티를 지급할 때마다, 비슷한 시기에 우리 주식을 사들이는 투자자가 있어. 명의는 네 명의가 아니지만 나이대나 몇 가지 특징을 봤을 때 예전에 뵀던 어머님이 떠오르더구나.”
그동안 내심 짐작하고 있던 바를 꺼낸 것이다.
이도원은 슬슬 이야기 할 때가 왔다는 것을 느꼈다.
이미 사들인 주식을 도로 매도하라고 할 리도 없을뿐더러, 이 년 째 주가가 뛰고 있으니 이상백도 더는 말리지 않을 터였다.
결심한 이도원이 말했다.
“어머니 명의로 주식을 매집해 왔습니다.”
이상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무모한 결단을 했구나. 결과적으로는 탁월한 결정이 됐지만.”
“가족들도 놀라던데, 대표님은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이도원의 말에 이상백이 피식 웃었다.
“오늘은 전처럼 교수님이라고 불러라.”
그는 말을 이었다.
“예전부터 가끔 씩 놀랄만한 일을 들고 와서 어느 순간부터 네가 무슨 일을 하든 별로 놀라지 않게 된 것 같다. 박아현, 차지은 스카우트 건 때도 그랬고.”
이도원은 미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화제를 돌렸다.
“교수님. 회사 배우가 저랑 재빈이 달랑 둘 뿐이라 외롭습니다.”
“아직 회사 규모가 작아서 두 명 제대로 케어 하기도 벅차다. 재빈이도 이번에 웹 드라마를 통해 차근차근 얼굴을 알리고 있어. 인지도 늘리는 데 주력하고 있어서 광고 위주로 작업하고 있다.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네가 아주 특별한 경우란 뜻이다.”
이도원은 잠잠하게 들었다.
이상백이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흔히 벼락스타라고들 하지. 아역부터 했던 게 아니면 배우란 얼마나 버티는가의 싸움이다. 원래 예술이란 활동이 그래. 대부분 큰 기대를 품고 이 바닥에 들어서지만, 그래서 빨리 떨어져나가지. 기회가 올 때까지 확신도 없이 자신을 갈고 닦으며 이 바닥에서 구르려면 뚝심이 필요해. 헌데 벼락스타는 그런 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쉽게 실수를 할 수 있다. 빨리 뜬 만큼 실수 한 번에 훅- 가는 거지.”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백이 걱정하는 부분이 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막 빛을 보려하는 순간 허무한 죽음을 맞게 됐지만, 이도원 역시 타임 슬립 전 그런 시절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한치 앞을 모르는 게 사람 사는 건데, 확신할 수 있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만약 어떤 실수로 인해 추락한다고 해도 절망하지 않겠습니다.”
이상백은 흡족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래. 그런 면에서 차지은은 꽤 훌륭한 재목이더구나. 아역부터 왕성한 활동을 하며 유명세를 누렸던 스타라면 대개 지금 같이 활동정지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절망하고 어떻게든 다시 원래 위치를 찾으려고 애쓸 텐데.”
“나름대로 답을 찾아낸 거죠. 뮤지컬을 하면서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지지 않도록.”
“그래.”
고개를 끄덕인 이상백이 말했다.
“그 집안 장남, 차기열 회장을 아느냐? 장례식장에서 본 적 있을 텐데.”
이도원은 그 한 마디만 들어도 이상백이 말하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엿들었던 대화가 떠오른 것이다.
‘백 프로덕션 인수 건.’
역시나 이어지는 내용은 다르지 않았다.
“차기열이 백 프로덕션을 인수하려 하고 있다. 레드 엔터테인먼트 대표 이로빈과도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아.”
잠시 망설이던 이상백이 말했다.
“너희 어머님의 위임장이나 주식 양도가 필요하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저도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오는 말에 놀란 이상백이 되물었다.
“부탁?”
“예. 저한테 회사 내의 지위를 보장해주십시오.”
이도원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알고 있는 미래를 활용하려면 그만한 힘이 필요했다.
그만한 여건을 가져야만 가슴에 품은 큰 꿈을 펼칠 수가 있다.
단순히 작품 선택만이 아닌, 활동영역 자체를 넓히기 위해선 실질적인 결정권이 필요한 것이다.
이도원의 얼굴에서 야망을 읽은 이상백이 물었다.
“대체 어떤 일을 벌일 생각이냐?”
이도원은 앞으로 내밀었던 등을 의자에 기댔다.
그리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대답했다.
“할리우드나 유럽으로 진출하고 싶습니다.”
이상백은 흠칫 표정을 떨었다.
분명 아시아로 진출하는 배우들은 있다.
이도원이 힘쓰지 않아도 곧 중국과 일본에 영화, 드라마가 넘어가면서 진출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도원이 원하는 것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그 외 할리우드이나 유럽으로의 진출.
이쪽은 국내 배우의 진출이 어렵다. 시도된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언제나 보이지 않는 인종의 벽에 가로막혔다. 서양인들은 굳이 동양인이 자신들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는 걸 바라지 않았다. 티켓 파워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국내 영화에 굳이 외국 배우들을 주연으로 쓰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그리하여 지금껏 ‘주조연’은 있어도 ‘주연’으로 완벽히 자리매김한 배우는 없다.
이쯤 되자 아무리 이도원을 잘 알고 있는 이상백이더라도 납득하기 힘들었다.
“조급해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잠시 생각을 정리한 이도원이 대답했다.
“물론 한국에서 작품 활동을 오래하고, 아시아로 진출하고, 차근차근 진도를 밟으며 할리우드나 유럽을 갈 수는 있겠죠. 하지만 할리우드나 유럽으로 가게 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운이 좋으면 조연쯤으로 들어갈 수 있겠지만, 확실히 자리매김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할 수 있는 배역은 나이가 든 만큼 한정되겠죠.”
사람은 새로운 경험을 꿈꾼다.
도전은 언제나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누구나가 특별해지고 싶어 한다.
최고가 되고 싶어 한다.
이상백이 보기에 이도원의 표정이 그랬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것과 회사 내 지위가 무슨 관계가 있지?”
“제가 회사 입장에서 손해인 도전을 하면 모두가 반대하겠죠. 전략기획팀부터 대표님, 투자자들까지요. 하지만 사내 지위가 있다면, 제게도 이런 부분에 대한 결정권이 생기지 않을까 합니다.”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 정도 결정권은 대표 급이 아니면…….”
이도원의 표정을 본 이상백은 말을 멈췄다.
“…공동대표 자리라도 원하는 거냐?”
이상백은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이도원이 활동하며 벌어들인 액수는 백 프로덕션의 창업자본을 빼면, 회사가 벌어들인 순익의 절반은 되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이도원의 어머니가 보유한 주식은 적지 않았고 지금도 꾸준히 올라가는 중이었다.
이상백도 허황된 말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상황인 것이다. 더군다나 냉정하게 따져보면 실례되는 부탁을 하는 쪽은 이상백이었다. 때문에 이상백은 화를 내지도, 선뜻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이도원을 바라봤다.
마침내 이도원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생겨날 백 프로덕션의 자회사, 백 엔터테인먼트의 공동대표 자리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