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08화 (108/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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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대표한테도 꼭 전해주길 바란다.”

그 말을 들은 김진우는 표정을 구겼다.

“이 사실을 대표님이 아시면 네가 아닌 백 프로덕션으로 연락할 거다.”

이도원은 코를 킁킁거리더니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직 어제 먹은 술이 덜 깼나보군. 대표가 널 위해 나서준다고? 이 바닥은 생각보다 냉정한 곳이야. 넌 여기서 아무것도 아니란 뜻이지.”

“뭐…?”

김진우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도원은 김진우의 팔을 놓으며 돌아섰다.

김진우는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있었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이도원의 등을 바라봤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서 모욕을 당한 일을 대표에게 말하면 뜻대로 움직여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어렵지 않게 'No'라는 결론이 나왔다.

백 프로덕션은 파죽지세로 업계의 영향력을 얻어가고 있는 곳이었다. 이도원은 그런 성과를 만들어낸 주역이었다.

점점 거세지는 불길을 어설프게 잡으려다간 다치는 법. 김진우 하나 때문에 레드 엔터테인먼트가 나서줄 리 없었다. 백 프로덕션을 적으로 돌릴 리는 더더욱 없었다.

그제야 김진우는 이도원이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이미 내가 건드릴 수 없는 위치까지 올라가 있다는 건가?’

이도원이 옥상에서 내려갔다.

차지은에 곁에 따라붙으며 실실 웃었다.

“고마워요. 꼭 제가 난처할 때마다 나타나서 슈퍼맨처럼 구해주네요. 이 바닥은 생각보다 냉정한 곳이야. 넌 여기서 아무것도 아니란 뜻이지!”

그녀는 이도원의 말을 따라했다.

이도원은 웃었지만 속은 편치 못했다.

그는 다시 살아난 마당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척지고 싶지 않았다. 그게 자신을 죽였던 김진우라면 더더욱 싫었다. 이번 생까지 엮여 지장을 받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건 내 생각일 뿐이야. 자꾸 부딪히면 철저히 무너트리는 수밖에 없다.’

일단 김진우는 레드 엔터테인먼트 대표에게 오늘 일을 그대로 말할 수 없을 터였다. 말해봐야 패잔병 취급을 받을 것이 빤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대표를 어르고 달래가며 이도원을 피할 확률이 높았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이도원이 물었다.

“앞으로 어쩔 셈이야? 네가 속한 회사에서 완전히 찍힌 것 같던데.”

“글쎄요. 뭐… 죽기야 하겠어요?”

차지은은 무사태평하게 물으며 덧붙였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가만히 숨죽이고 있으면 어떻게든 되겠죠. 일단은 뮤지컬에 집중하려고요.”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매번 도울 수는 없겠지만, 마음 굳게 먹고 약해 지지마. 네가 약한 모습을 드러낼수록 레드 엔터는 널 이용하려 들 거야.”

그 말을 들은 차지은은 씩 웃었다.

“힘들면 전화할게요.”

*

열애설을 급한 대로 봉합한 이도원은 더 이상 끼어들지 않았다.

그는 내색하지 않고 뮤지컬 <영웅> 단원들과 연습하는 데에 매진했다.

또한 영화 <투사> 작업에도 참여하며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타임 슬립 하기 전 지식을 이용해 간간이 매진한 과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도원은 이래저래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업계 일각에선 이도원을 보고 일만한다고 ‘황소’란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12월 22일 <대종상영화제>로 가는 길.

이도원과 오준식은 턱시도를 입은 상태였다.

스타일리스트 유성연도 드레스를 입었다.

“나 심장 터질 것 같애.”

유성연은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 오준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맙소사. 내가 영화인의 꿈과 로망이 가득한 대종상영화제를 가다니.”

이도원은 말없이 대본을 보고 있었다. 그 역시 심장이 방망이질을 하고 있지만 침착하려 하는 것이다.

<대종상영화제> 시상식이 열리는 여의도의 KAS홀로 가는 길, 오준식과 유성연은 사회자 흉내를 내며 콩트를 했다.

KAS홀에 도착하자 수많은 취재진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배우들은 순서대로 등장하며 레드카펫을 걸어서 단상으로 갔다.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배우들이 한 명 씩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수백 번 플래시가 터졌다.

“후-.”

이도원은 나직이 숨을 내쉬고 밴에서 내렸다.

순간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터지는 플래시가 이도원을 조명했다.

이도원은 다른 배우들처럼 손을 흔들고 고개 숙여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머릿속이 하예 졌다.

빨라지려는 걸음을 의식적으로 자제해야 했다.

반면 의식하지 않아도 만면에 웃음꽃이 피었다.

‘즐겁다.’

제한선 안으로 뻗친 손을 맞잡으며 악수를 해주고 꽃을 받으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이도원은 이름이 붙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머지않아 눈꽃을 연상시키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박아현이 곁에 와서 착석했다.

“도원아!”

그녀의 부름에 이도원이 고개를 돌렸다.

박아현은 일상생활에서 보았다면 민망했을 만큼 파인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고급스러운 디자인 때문인지, 자리의 분위기 때문인지 자연스럽고 아름다웠다.

이도원이 시익 웃으며 대답했다.

“오랜만이다.”

“완전 멋지네!”

“너도 예뻐.”

두 사람은 덕담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김진우가 도착했다.

김진우는 이도원의 눈길을 피하며 옆에 앉았다.

박아현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김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한편 이도원은 속속들이 도착하는 배우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스크린을 통해서나 보던 쟁쟁한 배우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자리가 메워지자 사회자로 발탁된 남녀 배우가 장내로 들어서서 무대 위로 올라갔다.

이윽고, 대종상영화제의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 공연이 끝났다.

사회를 맡고 무대로 나온 남녀배우 김선혜와 최규원은 긴장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좌석을 돌며 자리에 익숙한 중견배우 위주로 인터뷰를 했다.

어느 정도 무거운 감이 해소되자 무대로 돌아간 김선혜가 목소리를 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제 58회 대종상 감독상, <악마의 재능>에 유태일 감독님.”

최규원이 설명으로 받았다.

“유태일 감독은 형사와 킬러의 심리전을 그린 영화 <악마의 재능>에서 사실적인 연출력으로 사회적 이슈를 만들며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김진우 옆에 앉아있던 유태일 감독이 일어났다.

그는 턱시도를 입고 나가 꽃다발과 상을 받고 수상소감을 말했다.

“부담은 있었지만 저는 즐겁게 일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고생하셨던 저희 스태프 분들, 배우 분들, 투자 배급사 여러분들에게 이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정진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좋은 작품을 만들겠습니다.”

유태일 감독은 차분하고 간결하게 발표한 뒤 무대를 내려갔다.

‘역시, 전혀 쫄지 않네.’

이도원은 마음이 뭉클해서 힘껏 박수를 쳤다.

박아현, 김진우 역시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회가 계속되고 김선혜가 신인남우상 후보를 발표했다.

스크린에 작품과 후보 배우들이 나왔다.

“역시! 너 나왔네!”

박아현이 신나서 속삭였다.

아니나다를까 후보에는 이도원도 있었다.

스크린을 본 순간 이도원이 느끼는 감격은 남달랐다. 시상식장에 들어설 때도 그랬지만 막상 수상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자 지난날이 떠오른 것이다.

타임 슬립 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시절, 이도원은 꿈을 키우며 시상식 무대 뒤에서 밤을 새우고 세트를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수상자로 이곳에 있다.

‘꿈인지 생시인지… 연기할 때보다 더 떨린다.’

이내 최규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58회 대종상 신인남우상을 발표하겠습니다. 제 58회 대종상영화제 시상식 신인남우상,”

사이를 두고 그가 발표했다.

“<악마의 재능>의 이도원님. 축하드립니다.”

김선혜가 그 말을 받으며 설명을 달았다.

“이도원 씨는 영화 <악마의 재능>에서 프로페셔널 한 킬러가 된 연쇄살인범 역할을 입체적으로 연기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평생 한 번 뿐인 신인상, 축하드립니다.”

큰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이도원은 눈을 질끈 감고 잠시 있다가 일어섰다.

뒤에서 박아현이 활짝 웃는 얼굴로 등을 두드려 주었다.

유태일 감독도 엄지를 치켜세웠다.

“축하한다!”

“축하해!”

두 사람이 외쳤다.

이도원은 무대로 나가 상과 꽃다발을 받았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쏟아졌다.

그중에는 기라성 같은 배우들도 있었다.

이도원은 격한 감정을 억누르며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감격에 흠뻑 젖어 입을 열었다.

“세상에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트로피처럼 요.”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앞쪽에도 안면이 있는 배우들이 보였다.

안유성, 정성우, 김수려, 유석연 등이 곳곳에서 흡족한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사이를 두고 이도원이 덧붙였다.

“높은 곳에 있으면 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에 있으면 더 낮은 곳에서 촬영해주셨던 <악마의 재능> 스태프 분들과 여러 배우 분들에게 이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언제나 저를 믿고 지지해주시는 어머니, 누나, 이상백 대표님, 신용운 선생님, 준식이, 성연이 누나… 모두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일반 객석에서 이도원을 응원하려고 온 팬 카페 단체 회원들의 비명과 같은 목소리가 터졌다.

“꺅- 이도원!”

주위를 한 차례 눈으로 훑은 이도원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내려갔다.

이도원을 아는 대부분이 축하하고 있었지만 김진우는 심사가 뒤틀렸다. 이도원이 워낙 압도적이었기에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것이다. 또 다시 패배감이 들었다.

그때 옆에서 박아현이 불 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세 작품 만에 저 위까지 치고 올라가다니…….”

김진우는 속마음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은 채로 대충 맞장구를 쳤다.

“연기력과 외모가 모두 되니까. 운도 따라줬고.”

시큰둥한 반응에 박아현이 무언가 대답하려 할 때, 이도원이 자리로 돌아왔다.

기다렸다는 듯 박아현이 말했다.

“받을 줄 알았다니까?”

이도원은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심장 떨려 죽을 뻔 했네.”

박아현이 이때다 싶은지 놀렸다.

“간이 콩알만 해 진 표정이네. 연기할 때 보면 뭐 이런 강심장이 다 있나 싶은데도 또 상 탈 땐 다른가봐?”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인정했다.

“수상소감으로 뭔 말 했는지도 기억 안 나.”

<악마의 재능>은 이후로도 최우수작품상과 조명상, 미술상을 휩쓸며 배우와 감독상 포함 대종상영화제 5관왕의 영광을 누렸다.

‘역시 유태일 감독이 괜히 최고였던 게 아니야. 대종상을 휩쓸었으니 이제 다음은 청룡영화제인가?’

사흘 뒤 세종문화회관에서 청룡영화제가 열린다.

대종상 영화제를 휩쓴 영화라면 청룡영화제에도 상 한두 개 쯤은 또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건 이도원이 상을 더 받을 수도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더구나 내년에는 부산국제영화제와 백상예술대상도 있었다.

‘차라리 현장이 편하겠어.’

사람이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이도원은 레드카펫을 걸었을 때 느꼈던 설렘이 많이 가셔서 그런지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때였다.

제법 괜찮은 진행을 해오던 최규원이 말했다.

“…계속해서, 저희가 이번에 시상할 부분인 인기상인데요. 대종상 남녀 주연상 후보를 대상으로 투표를 했습니다. 그 결과가 제 손안에 있습니다.”

김선혜가 미소와 함께 말을 받았다.

“배우에게는 의미가 남다른 상이 아닐까요? 제 58회 대종상영화제 인기상 수상자는…….”

마침내 결과가 발표됐다.

“이도원 씨!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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