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06화 (106/178)

< 리액팅 (reacting; 반응연기) (1) >

안유성은 이도원에게 큰 변화를 몰고왔다.

먼저, 이도원은 안유성이 극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이유를 찾아냈다.

그 결과 안유성이 자신의 역할뿐 아니라 다른 배역들의 인물분석과 대사를 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더불어 안유성은 대본 전체를 달달 외고 있었다.

‘시도해 보자.’

이도원은 무식한 방법을 썼다.

안유성을 그대로 따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 전까진 배역 하나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면, 이제는 모든 배역의 인물분석을 머릿속으로 집어넣을 결심을 했다.

‘안 선생님이 하셨다면 나도 할 수 있다.’

물론 안유성은 수십 년 간 연기활동을 해온 사람이었다.

따라서 경험이 많고 삶의 지혜도 깊다.

배역에 대한 이해도 자체가 다르다.

연륜과 관록이란 무기는 쉽게 넘볼 수 없는 법이니까.

촬영대기를 하며 생각하던 이도원은 대본 모서리로 머리를 톡톡 건드리며 자문했다.

‘나만이 가진 무기는 뭘까?’

고심하던 이도원은 독백 때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주변의 상황과 사물을 형상화시킬 만큼의 집중력과 몰입도가 있었다. 문제는 실전에선 눈앞에 연기호흡을 주고받는 실체가 있기 때문에 그다지 쓸모가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동안은 상대가 아닌 자신의 배역에만 몰두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 한계에서 벗어나야 했다.

이쯤에서, 이도원은 한 가지 이론을 떠올렸다.

‘리액팅 연기.’

1980년대 헐리웃을 주름잡던 여배우 메리 스틴버겐은 말했다.

“상대방 배우에 대한 관심만이 나의 관심사의 전부다.”라고.

하나의 배역도 소화해내기 힘든 판국에 모든 배역을 분석하고 이해한다?

과연 뇌 용량이 따라줄까 싶었다.

‘집어넣어 보면 알겠지.’

이도원은 일단 강행하며 틈틈이 다른 배역들의 파트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정성우는 걱정스럽게 조언했다.

“지나친 욕심은 오히려 퇴보를 가져올 수 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 모두 놓치는 수가 있어.”

하지만 이도원은 한 번 마음먹으면 하는 데까진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이도원은 많은 시간을 할애해 <투사> 시나리오와 대본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모든 배역의 인물분석을 마치고 대본 전체를 숙지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액션!”

정윤욱 감독의 신호가 떨어졌다.

그 순간 이도원이 분석했던 모든 인물과 사건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렸다.

파노라마처럼 떠오른 기억들이 퍼즐처럼 맞춰져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이도원은 ‘조영선’이 됐다.

눈앞에 쓰러져있는 정성우가 보였다.

복수는 끝났고, 마음의 무거운 돌덩이가 치워졌다.

그동안의 긴장감이 풀리며 노곤함이 쏟아졌다.

코끝을 감도는 고향의 은은한 풀잎향기,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고, 가족들의 활짝 웃는 면면이 눈앞에 선했다.

이도원의 입가로 점차 미소가 맺혔다.

천천히 손을 뻗으며 그들에게로 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이도원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초점이 사라진 눈동자.

현장의 모두가 이도원의 움직임에 숨죽였다.

긴 여정을 끝마치고 죽음을 앞둔 표정과 눈빛에 전율했다.

정윤욱 감독은 컷 사인을 잊었다.

‘누구 하나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다.’

그는 불현듯 깨달았다.

이 자리에 있는 수십 명의 스태프들과 수백 명의 보조출연자들, 몇몇 배우들 모두 이도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숨죽이고 있다는 것을.

시나리오 상에 있던 장면이 어떤 설정도 없이 자연스럽게 연출되었다.

이도원이란 배우 하나가 가진 장악력이 경이로운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정윤욱 감독은 아쉬운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컷.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음에도 정적은 끝나지 않았다.

이도원이 일어났을 때에야 사람들은 하나 둘 깨어났다.

현장 모두의 이목을 잡아두었던 이도원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의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즐겁다!’

너무나 편하게 연기를 했다.

아무 생각도, 판단도 없었다.

그저 쓰러진 정성우와 수많은 관중들이 만들어준 상황에 몰입했을 뿐이다.

그런데 저절로 ‘조영선’이란 가상의 인물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모든 건 상상일 뿐인데 심지어 오감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인간의 상상력과 집중력이 발휘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이도원이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자 정성우가 다가와서 어깨를 두드렸다.

“아, 선배님.”

이도원이 화들짝 놀랐다.

정성우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번 영화 최고의 연기였다. 어떻게 하루가 멀다 하고 실력이 늘어? 어디가 한계일지 궁금하다.”

그때 박아현이 다가오더니 감탄했다.

“와 진짜… 말이 안나오네.”

세 사람은 모니터로 갔다.

정윤욱 감독은 이도원의 연기를 극찬했다.

“다들 잘했지만 도원이는 그야말로 배역과 하나가 된 것 같던데. 연출이 배우를 봤을 적에 가장 뿌듯한 순간은 내가 시나리오를 쓸 때 상상했던 것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줄 때인데, 오늘은 그런 전율을 경험했다.”

쏟아지는 찬사에 이도원은 낯이 뜨거웠다.

심지어 그 자신은 어떻게 연기를 했는지 기억조차 안 났다. 그저 전과 달리 편하게 몰입하고 마음이 가는대로 연기했다는 느낌만 남아있었다.

그때, 촬영현장 제한선 밖으로부터 안유성이 나타났다.

안유성은 분량이 몇 회 차 없었기 때문에 촬영이 금방 끝난 상태였다. 가끔 현장에 놀러오고는 했는데, 주로 이도원의 연기를 보고 갔다.

“선생님.”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인사를 했다.

고개를 끄덕인 안유성이 정윤욱 감독에게 말했다.

“어서 한 번 돌려봐.”

고개를 끄덕인 정윤욱 감독이 모니터링을 시작했다.

방금 전 이도원이 보여준 연기는 모니터를 통해 봐도 여전히 충격적이었다.

정윤욱 감독은 다시 한 번 보며 생각했다.

‘이도원 같은 연기를 할 수 있는 이십 대 배우가 있을까?’

모를 일이지만 만약 있더라도 열 명 안쪽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편 안유성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도원의 연기를 모두 보았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하지?’

안유성으로서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제아무리 연기는 발상의 전환만으로도 한순간에 늘 수 있다지만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주변과 교감하면서 충분히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집중력 자체가 달라졌다는 건 믿기 힘든 일이야.’

안유성은 마음속으로 크게 놀랐다.

이도원이 영화의 라스트 씬에서 보여준 연기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배우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선사했던 것이다.

“신기하구먼.”

그가 만약 이도원만이 가진 능력을 알았다면 수긍했겠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한편 이도원은 이제야 가닥이 잡히는 느낌이었다.

‘드디어 맞는 옷을 찾은 기분이야.’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

12월 중순에 들어서며 영화 <투사>의 촬영이 절반 쯤 끝났다.

그동안 짬을 내서 뮤지컬 <영웅> 연습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연습실은 자주 나가지 못했지만.’

백 프로덕션은 연말정산으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도원은 사무실에서 이상백과 마주앉았다.

이상백이 먼저 운을 뗐다.

“연말에는 시상식 일정이 빡빡하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 탁자 위에 있는 초대장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상백이 말을 이었다.

“스케줄은 최대한 지장이 없도록 조정을 했다만 아마 좀 바쁠 거야. 드라마야 공중파가 아니니 단념해야겠지만 이번 영화 성적이 좋아. 더군다나 올 한 해 내내 이슈가 됐었고. 수상자 명단에는 반드시 올라가 있을 거다.”

“예.”

이도원은 의외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가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다고?’

물론 스스로 상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어느 정도 예측은 했으나 실감이 나진 않는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이도원의 표정을 보며 피식 웃은 이상백이 물었다.

“여배우 교체 이후 <투사> 촬영은 잘 되어가고 있다고?”

“예. 현장분위기도 좋고요.”

“그래. 잘 됐구나. 그리고 네가 궁금해 할 것 같아서 좀 알아봤다.”

이상백은 태블릿을 통해 한 언론 사이트에 로그인했다.

게시판에는 미공개 된 보도 자료들이 있었다.

이도원은 그곳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차지은 열애설?”

저도 모르게 놀라서 중얼거렸다.

[차지은, 같은 레드 엔터테인먼트 소속 김진우와 3개월 째 열애. 대외활동 당분간 중단?]

하필이면 상대가 김진우였다.

물론 중요한 건 이 기사가 오보라는 사실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차지은과 연습실에서 이런저런 이야길 나눴던 이도원이었기에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거, 잘못된 기사인 것 같은데요.”

“잘못된 기사는 아니다.”

이상백이 덧붙였다.

“의도적인 거짓말일 뿐이야. 레드 엔터테인먼트에선 차지은을 버리는 카드로 생각한 뒤 김진우를 밀어주려는 생각인 것 같다.”

이도원은 기가 막혔다.

“무슨 배우가 장기판 위의 말도 아니고… 열애설을 내서 무슨 효과를 노리는 걸까요?”

이상백은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노이즈마케팅이라고 보면 돼. 아이돌이 아닌 남자배우에게 열애설은 별 흠이 못된다. 오히려 대외적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더 호감을 사는 경우까지 있어. 더군다나 인지도가 높은 차지은과 아직 신인인 김진우와 열애설을 내면 전적으로 여배우인 차지은 쪽이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지. 그리고 동시에 김진우 목줄을 매달 수 있는 효과도 있고.”

“목줄이요?”

“결별설을 안 좋게 터트리면 되니까.”

이도원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당사자들은 왜 해명하지 않는 걸까요?”

“내 생각에는 차지은이 대담한 면이 있다면 머지않아 독단으로라도 곧 해명할 것 같다. 그래도 한 번 이슈가 된 셈이니까 김진우 입장에서 나쁠 게 없지.”

“이거 법적으로 문제되는 것 아닙니까?”

“추측성 기사잖아. 신고했다가 입을 타격이 더 크다. 그저 해명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야.”

이도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하다가 물었다.

“만약 저와 차지은이 열애하고 있다고 보도를 했습니다. 그럼 추측성 기사를 낸 기자와 레드 엔터를 묶어서 고소할 수 있을까요?”

이상백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둘이 무슨 일 있니?”

“아니요. 그냥 알아두려고 여쭤보는 거예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차지은도 내후년이면 우리 배우가 될 텐데, 보호해야죠.”

“행여나 그런 돌발행동을 할 생각은 말아라.”

단단히 못 박은 그가 대답을 해주었다.

“그렇게 되면 일이 복잡해지겠지. 하지만 기자들한테 찍힐 수가 있다. 언론과 척지어 봐야 손해인 건 알지?”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지은과 무슨 관계도 아니고 제가 피해를 받은 것도 아니지만 같은 배우로서 화가 나네요.”

“나도 레드 엔터가 이런 식으로 움직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일단은 이쪽 언론사에 전화해서 막아볼 생각이야. 네 말마따나 내후년에는 우리가 받아야할 배우인데 괜한 구설수에 오르게 놔둘 수는 없지.”

“예. 잘 부탁드립니다. 차지은이랑 친하거든요.”

“그래. 혹시나 나중에 알게 되면 무슨 일을 벌일까봐 미리 보여준 거야. 넌 지금 당면한 일에만 집중하도록 해라. 차지은한테도 얘기하지 말고.”

이도원은 이상백의 당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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