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05화 (105/178)

< Action (7) >

이도원은 카메라 화면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모니터를 통해 지켜보던 정윤욱 감독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러지?’

정윤욱 감독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이도원이 씨익 웃었다.

“뭐야?”

정윤욱 감독은 불현 듯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었다.

이도원을 부르려던 찰나 자신만 보고 있는 스태프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촬영준비 끝! 이라고 쓰여 있는 눈빛들.

‘그래, 일단 한 번 보자.’

잠시 갈등하던 정윤욱 감독은 마지못해 사인을 보내는 쪽을 택했다.

“레디-.”

정적이 감돌았다.

“액션!”

촬영 초반, 이도원은 전처럼 액션배우의 공격을 맞아주는 척 막고 피했다.

퍼억!

볼품없이 쓰러진 이도원이 박아현을 발견했다.

그녀를 본 이도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천천히 일어난 그는 말없이 옷을 툭툭 털었다.

그 순간 정면에 있던 액션배우가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도원이 목을 움켜쥐는 게 더 빨랐다.

“커헉!”

액션배우가 눈을 부릅뜨며 비명을 터트렸다.

이도원은 액션배우를 박아현이 서있는 울타리까지 밀어붙였다.

쿵!

액션배우가 울타리에 부딪혔다.

이도원은 박아현을 조용히 노려봤다.

‘으. 소름 돋아.’

박아현은 저도 모르게 손에 들려있는 증표를 만지작거렸다.

이도원의 눈빛이 거센 불길처럼 박아현을 집어삼켰다.

따라서 그녀의 얼굴이 잿빛으로 하얗게 탈색됐다.

“윽!”

그때 액션 배우가 정신을 차리며 이도원의 손을 뿌리쳤다.

“죽어!”

그는 연달아 발차기를 날렸다.

하지만 허무하리만치 가볍게 피해낸 이도원이 액션배우에게 시선을 돌리며 가슴팍에 연타를 먹였다. 실제로 치진 않았지만 액션배우는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이어서 이도원이 액션배우의 얼굴을 비껴서 찼다. 그러자 액션배우가 다시 한 번 들썩이며 완파됐다. 상대를 처치한 이도원은 전처럼 박아현을 무표정하게 노려보더니 이내 등을 돌렸다.

그 표정을 본 박아현은 가슴이 철렁 가라앉았다.

툭-.

증표가 떨어졌다.

그때 정윤욱 감독의 사인이 들려왔다.

“컷! 오-케이!”

정윤욱 감독은 바로 모니터를 돌려보며 배우들에게 손짓했다.

박아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미쳤다. 어떻게 그렇게 몰입해? 무섭다, 무서워.”

이도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로 대신했다.

박아현은 아직 부족했는지 감탄을 덧붙였다.

“뭐 좀 해보려 했더니 훅- 빨아들이네. 머릿속은 텅 비고 네 호흡에 맞춰서 저절로 움직이게 되더라.”

이도원이 물었다.

“아까 정한대로 잘 했어?”

“응. 의도해서 했다기보다 저절로 된 거지만.”

박아현은 무언가 찜찜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왠지 자신이 잘한 것 같지가 않았다. 이도원이 다 해준 기분인 들었다.

“잘했어.”

이도원은 어깨를 토닥이고 앞서갔다.

두 사람은 머지않아 방금 촬영한 장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니터를 통해 본 장면은 전에 비해 훨씬 인상적이고 자연스러웠다.

그에 정윤욱 감독이 흡족하게 웃었다.

“이도원, 요 예쁜 놈. 그리고.”

그는 박아현을 보며 이어 말했다.

“여배우 교체하길 잘했단 생각이 들게 해줘서 고맙다.”

*

촬영은 땅거미가 질 때까지 계속됐다.

임금 역할인 안유성과 이도원이 함께하는 장면이 남아있었다.

촬영 시간 삼십 분 전 안유성이 도착했다. 안유성은 직접 자신의 에쿠스를 몰고 현장에 왔다. 그는 편한 복장에 선글라스를 쓰고 차에서 내렸다.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건네는 인사를 받아준 안유성은 백발을 쓸어 넘기며 정윤욱 감독에게로 갔다.

“정 감독.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정윤욱 감독은 스태프 회의를 중단했다.

“예, 선생님.”

그는 안유성이 여간 일로 회의를 방해할 사람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안유성이 앞섰고 정윤욱 감독이 뒤따라갔다.

안유성은 촬영차 뒤편 공터로 가서 멈췄다.

“정 감독에게 잔소리를 하고 싶지 않지만… 자네, 문제가 좀 있더군.”

“문제라고 하시면…….”

“윤지민.”

짧게 답한 안유성이 덧붙었다.

“촬영에 무리를 빚어가며 여배우를 교체한 이유가 뭔가?”

정윤욱 감독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안유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는 프로들이네. 놀이터에서 소꿉놀이 하고 있는 게 아니야.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랬는지 궁금하군.”

안유성은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도 촬영현장에서 싫은 소리를 한다면 딱 한 가지 경우뿐이었다. 위약금을 물고 다신 대면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

정윤욱 감독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상 무리가 빗어지면 영화는 엎어진다.’

운이 나쁘면 빚더미에 앉게 될지도 몰랐다. 상황이 이쯤 되자 정윤욱 감독은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전 과거에 윤지민과 교제를 했었습니다.”

안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직이 한숨을 내쉰 정윤욱 감독이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젊었을 때 지나친 혈기로 실수 하나를 저질렀습니다. 당시 윤지민의 회사에서 은밀한 제안이 왔는데, 영화가 잘되고 사람들이 알아주니까 도를 넘게 되더군요. 그래! 갖은 고생을 다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특권 한 번 누려보자! 예술가에게 모든 경험은 배움이다!, 별의 별 합리화를 다해가며 일을 치고 나니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더랍니다. 후회감이 몰려왔죠. 그리고 하필 그 일을 갖고 기획사측 대표가 협박을 해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상황에서 가장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판단을 했죠. 바로 윤지민을 설득해서 열애설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대신 제가 아는 감독들이나 광고, 드라마, 예능 피디들도 설득해서 밀어줬죠. 딱 스폰서 의혹이 생기지 않을 정도만큼만 요.”

안유성이 혀를 찼다.

눈을 질끈 감은 정윤욱 감독이 말했다.

“그러다 윤지민을 사랑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 생각일 뿐… 그 친구는 생각이 다르더군요. 그래서 적당한 시기에 결별을 발표하고 서로 연락을 끊었습니다. 그 뒤로 전 여배우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고 영화만 미친 듯이 찍었지요. 그런데 이번 <투사>

의 프리프로덕션 막바지에 투자사와 배급사에서 윤지민을 낙점한 겁니다. 자회사 메인모델이니 무조건 주연으로 들어가야 한다더군요. 그렇다고 윤지민이 임신을 했다는 소문이 진짜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차기열과 윤지민 모두가 공인이기 때문이죠.”

안유성이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윤지민은 왜 자진하차하지 않았지?”

정윤욱 감독이 고개를 저었다.

“대한민국 최대의 배급사, 윤지민의 주 수입원인 광고의 광고주, 기획사 대표까지. 사방에서 출연 압박이 들어오니 아무리 유명한 여배우라도 멋대로 자진하차를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의를 일으킨 것으로 윤지민 하차를 정당화한 것입니다. 그마저도 박아현이라는 대체배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판단이었죠. 죄송합니다.”

안유성이 물었다.

“리딩 땐?”

“그땐 배급사 대표와 투자단 대표가 와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윤지민의 성격 정도는 꿰고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린 안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이야기를 마친 정윤욱 감독은 십 년 쯤 늙어보였다. 그는 안유성에게 구태여 함구해 달라는 말조차 건네지 않았다.

연예계에서 오래 살아남는 비결은 알아도 모른 척 묵묵히 지내는 것이다. 그리고 안유성은 이 바닥에서 가장 오래 활동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때 안유성이 정윤욱 감독에게 조언했다.

“아직 죄를 고백할 수 있을 때 고백하는 편이 낫네. 자존심을 지키려고 망설이다간 전부를 잃을 수 있으이.”

그 말을 남긴 안유성이 돌아섰다.

정윤욱 감독은 그의 등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

빈 공터를 나선 안유성은 나직이 한숨을 뱉었다.

“가슴이 답답하군.”

중얼거린 그는 대본을 읽고 있는 이도원에게 다가갔다.

“이름이 도원이라고 했나?”

이도원은 안유성을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앉게, 안아.”

안유성은 근처의 의자를 끌어다 이도원의 옆에 앉았다.

이도원은 얼른 믹스커피를 타서 내밀었다.

안유성은 미안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난 커피는 마시질 않아. 몸에 안 좋거든. 우리같은 사람들은 몸이 재산이지.”

“하하… 그렇죠.”

이도원은 멋쩍게 웃었다.

‘하긴. 야채주스 한 박스 마셔도 커피 열 잔이면 도로아미타불이지.’

요새 믹스커피에 취미를 붙였던 이도원은 생각 좀 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를 보던 안유성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몇 살이지?”

“스물두 살입니다.”

이도원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안유성은 흔쾌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친해지자고. 우리 둘이 호흡을 맞춰야하니까! 너무 늙은 친구라고 박대하진 말게.”

“하하……. 친구… 라니요. 대선배님이신 걸요.”

안유성이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대본 한 번 읽어보겠나?”

이도원은 활짝 웃었다.

"영광입니다.“

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본 안유성은 미소를 지었다.

이도원은 목을 다듬고 대본을 펼쳤다.

왕족이 아닌 이에게 왕위를 계승하려는 왕과, 왕을 설득하려는 조영선의 대화였다.

이도원이 말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안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묵직하고 절절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단어로 상황과 감정을 모두 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도원은 그런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전례에 없는 일이옵니다. 조정대신들의 반발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테고, 이 나라가 이룬 모든 것들이 무너질 수도 있사옵니다. 조선에는 다시 한 번 피가 흐를 것이며 저 태양과 들판, 많은 이들의 목숨까지도 희생될 수 있사옵니다.”

안유성이 가늘게 미소 지었다.

“희생이 두려웠다면 전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을 이뤄도 그것이 권모술수를 일삼는 사갈의 피요, 시체라면 과인이 모두 짊어지겠다. 더 긴 세월 우리의 땅이 병폐로 물들지 않기 위해선 결단이 필요한 법……. 왕족 중에 슬기롭고 현명한 자가 없다면 격식과 관례를 벗어나 마땅한 자가 왕좌에 앉는 것이 옳다. 내가 자네에게 모든 군권을 일임한 것은 그 과정에서 흘릴 무고한 희생을 줄이라는 의미… 쿨럭!”

“전하!”

이도원이 안타깝게 불렀다.

안유성은 숨을 한동안 몰아쉬었다.

당장이라도 끊길 듯 한 숨소리.

“심려 말거라. 내, 후사를 정하기 전에는 결코 눈감지 못할 터이니.”

“전하……. 긴 전쟁이었사옵니다. 소장은…….”

이도원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안유성이 안타까운 표정을 가득 머금고 말했다.

“미안하구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작은 부탁 하나 들어주지 못해서… 조금만, 조금만 미루어주면 안되겠느냐?”

거기까지였다.

단 한 번 호흡을 맞춘 것뿐이다.

그런데 이도원은 전율이 일었다.

‘근엄한 발성. 끊길 듯 이어지는 호흡. 다양한 표정과 눈빛. 기술로 되는 수준이 아니야. 그냥 인물 자체다. 모든 연기가 자연스러운데도 인상적이고 섬세해.’

이도원은 지금 거대한 헤일이 덮치는 기분이나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거대한 산세를 마주한 기분과 흡사한 느낌을 받았다. 보는 것만으로 경이롭고 압도되는 자연을 경험한 기분이었다.

그때 안유성이 입을 열어 말했다.

“굳어있어.”

이도원이 안유성을 보았다.

궁금한 표정을 보며 미소지은 안유성이 살을 붙였다.

“자네 머릿속에 든 것이 연기뿐이라서 그래.”

“예?”

알쏭달쏭한 말에 이도원이 반문했다.

안유성은 곰곰이 생각하다 물었다.

“연기가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보는 게 좋겠군. 내가 아는 연기는 모두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야. 그런데 자네 연기기술만 보여주면 되겠나?”

안유성이 말을 이었다.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려면 자네가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아야 돼. 기계처럼 일만하며 살지 말고. 배우는 언제나 심신을 소중히 여기고 단련해야하지만,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라면 심상이 자유로울수록 좋은 법이야.”

이도원이 망설이다 물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안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연애하는 이야기를 예로 들어볼까? 자네가 여자를 모르고 연애도 안 해 봤는데 연기는 세계 최고로 잘하는 배우라고 치자고. 자네가 연기를 했을 때 분명 사람들은 입에 침이 마르게 찬사를 보낼 거야. 박수도 치겠지. 우리 같은 배우나 감독들은 더더욱 감탄을 할 거야. 하지만 그뿐이네.”

그가 물었다.

“자네의 연기를 보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지난 추억을 떠올리며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겠나?”

머리가 복잡해진 이도원은 되물었다.

“하지만 연기는 관객과 소통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려면 전달을 해야 하고, 더 특별한 방법으로 캐릭터를 묘사해야하지 않을까요?”

안유성은 어깨를 으쓱였다.

“일 리가 있어. 그러나 억지로 평범하지 않으려 하면 더 평범해 보일 뿐이야. 우리 모두가 특별한 생각을 하거든. 근데 머리를 열어보면 그 특별한 생각들이 별반 다르지 않단 말이지.”

그는 잔잔하게 웃으며 말을 끝맺었다.

“더 멋지게, 화려하게 만들려고 하면 대부분 모두가 상상하고 있는 것들이 나오지. 하지만 자네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면 특별해질 수 있을 걸세. 사람들은 개개인 모두가 특별하니까. 여기서 우리가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 속에 잠재된 것들을 좀 더 잘 보이게끔 드러내는 기술을 훈련했다는 것뿐이야.”

< Action (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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