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04화 (104/178)

< Action (6) >

백 프로덕션 사무실.

이도원과 이상백은 진지한 표정으로 마주앉았다.

“일단 윤지민 분량을 제외하고 촬영한다고요?”

이도원의 질문에 이상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배급사 쪽에서 전한 바로는 정 감독이 여배우 교체를 요청했다더구나. 지난 번 현장에서의 일로 다른 배우들도 교체를 바라는 눈치다. 핑계는 ‘트러블로 인한 하차’지만 네 얘기를 들어보니 윤지민이 임신한 것 때문인 것 같군.”

곰곰이 생각하던 이상백이 덧붙여 말했다.

“정 감독도 어지간히 걱정됐나보다. 그런 쇼를 해서까지 윤지민을 빼려하다니.”

“투자사나 제작사, 윤지민 소속사에서는 왜 그렇게까지 윤지민을 고집하는 걸까요?”

이도원은 당최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에 이상백이 대답했다.

“윤지민이 전속모델로 계약돼 있는 회사가 최고투자자니까. 그들이 원하는 건 영화 투자수익만이 아니야. 전속모델의 인지도가 올라가면서 누릴 수 있는 홍보효과는 단기적인 수익의 수배에 달한다. 그러니 윤지민 소속사 역시 외압을 받고 있겠지.”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지민과 정윤욱 감독은 옛날에 교제했던 사이라고 들었어요. 혹시 둘 사이에 또 다시 뭔가가 있는 걸까요?”

그는 덧붙였다.

“만약 사적인 감정으로 모든 배우들에게 피해를 주는 거라면 실망할 것 같거든요.”

“글쎄…….”

이상백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의견을 말했다.

“내 생각이지만 그건 아닐 거다. 정 감독과 윤지민의 접점이 요 근래에 없기도 했고, 차기열과도 관계가 좋다고 들었어. 서로 이미지를 생각해 임신 사실을 공론화할 생각은 없는 것 같지만 혼담이 오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만약 사적인 감정이 개입됐다면 그저 정윤욱 감독의 호의와 배려 정도가 아닐까 한다.”

그 말을 들은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이상백이 말을 이었다.

“정말 다행인 점은 후보 선수가 있다는 거다. 이제와서 여배우를 다시 섭외하려 했다면 촬영기간이 미뤄지거나 영화 자체가 엎어졌을 텐데 박아현이 있으니 바로 교체가 가능한 거지.”

타임 슬립 전 윤지민은 교체되지 않았으나 현재에는 교체되려 하고 있었다.

이는 타임 슬립 전에 윤지민을 대신할 마땅한 후보자가 없었다는 의미기도 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허탈하게 웃은 이도원이 물었다.

“대표님은 이런 사실을 어떻게 다 아신 건가요?”

“맨 처음 박아현을 집어넣은 게 우리 아니냐? 더구나 박아현이 옮길 보금자리가 우리 회사라는 건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고. 나도 배급사와 투자사 측에서 들은 정보만 알고 있을 뿐이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문제에 대해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박아현은 연기에 대한 감이 좋아요. 더 없이 훌륭한 기회가 될 겁니다.”

이상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너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번까지의 촬영과는 달라. 신용운 선생이 네 연기를 보더니 여유가 부족하다고 말하더구나. 이번 작품은 여유만만 한 선배들이 많으니까 직접 체감하며 배울 점들이 많을 게다.”

이도원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예, 대표님. 명심하겠습니다.”

*

<투사>의 여배우는 박아현으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11월 중순이 돼서야 촬영이 속개됐다.

촬영 스케줄이 나오자 이도원은 현장으로 바로 투입됐다.

“이제 벌써 연말이네.”

오준식이 말을 시켰다.

“작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 년이군?”

오준식이 백미러로 그를 바라봤다.

“작년부터 촬영한 <시간아! 돌아와>랑 <악마의 재능> 모두 대박이었잖아. <악마의 재능>이 삼백 만 넘었지 아마?”

대본을 읽던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랬지.”

오준식이 흐흐 웃었다.

“연말시상식 기대되지?”

“실감 안 나. 오히려 일반 사람들이 더 실감 날걸?”

“하긴. 넌 차안, 현장, 연습실만 왔다 갔다 하니까. 사실 네 옆에만 붙어있는 나도 실감이 안 난다.”

그때 꾸벅꾸벅 졸던 유성연이 끼어들었다.

“내 친구들은 도원이 보여 달라고 난리던데? 난 조금 실감 나.”

“덜 바빠서 그래. 일을 허투루 하고 있다는 증거야.”

오준식이 농담조로 말했다.

바로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던 이도원은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눈길을 돌렸다.

-오늘부터 현장으로 출근!

박아현의 메시지였다.

밴은 머지않아 현장에 도착했다. 이도원은 차에서 내리며 활기찬 인사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현장에는 울타리가 쳐진 커다란 원형 경기장이 있었다.

박아현은 한쪽에서 규수 댁 마님처럼 위장한 ‘민혜공주’ 분장을 하고 있었다.

“도원아!”

박아현이 반갑게 맞이했다.

이도원은 그녀의 앞에 가서 섰다.

“잘 어울리네? 연기는 많이 늘었어?”

박아현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보면 놀랄걸. 기대하고 있어! 네 덕분에 어마어마하게 늘었으니까.”

이도원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로 정윤욱 감독에게로 갔다.

“촬영 스케줄이 미뤄져서 당황했지?”

그렇게 물은 정윤욱 감독이 미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도원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녜요. 그동안 컨디션 조절하며 쉴 수 있어서 좋았어요.”

정윤욱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콘티를 주었다.

“오늘도 액션이다.”

이도원 역시 대본을 보며 이곳에 왔던 터라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촬영 분은 노비들 끼리 대결을 벌이는 장면이었다. 투기장에 돈을 건 양반들이 환호하고, 박아현이 그 틈에서 이도원을 지켜본다.

“한 번 잘 해보겠습니다.”

“그래. 여기선 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정윤욱 감독의 질문에 이도원이 대답했다.

“감정 변화겠죠. 액션 자체는 일 대 일로 합을 맞추는 거니까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초반에는 무기력하게 맞는 척 피하기만 하다가 민혜공주를 발견하고 왕세자에 대한 복수심을 상기하며 승리하는 장면이었다.

정윤욱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보여주라고.”

이도원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 임천수의 감독 하에 액션배우와 합을 맞췄다. 그리고 마침내 준비가 끝나자 정윤욱 감독이 확성기에 대고 외쳤다.

“배우들 위치해주세요!”

민혜공주 역의 박아현과 관중들 역할을 하는 보조출연자들이 울타리 밖으로 섰다.

카메라 한 대는 박아현의 표정을, 한 대는 이도원을 촬영하며, 마지막으로 공중에서 전체를 촬영하게 된다.

다음으로 이도원과 액션배우가 원형경기장으로 들어갔다.

이내 정윤욱 감독이 사인을 보냈다.

“레디-액션!”

이도원은 양손을 늘어뜨린 가만히 섰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텅 빈 동공으로 전방을 바라봤다.

‘표정 좋고.’

정윤욱 감독은 모니터를 지켜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는 이도원이 보여주는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이 흡족했다.

이처럼 좋은 배우는 모든 상황과 감정을 대사가 아닌 눈으로 말한다. 이도원은 그 명언을 고스란히 실행에 옮기는 배우였다.

한편 액션배우는 이도원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는 이도원의 의욕 없는 모습을 보고 이를 갈았다.

“이 새끼가!”

액션배우가 외치며 달려들었다.

그러자 이도원이 합을 맞춘 대로 움직였다.

주먹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몸을 숙이며 발길질을 손으로 쳐냈다.

겉으로는 한참을 못 막고 못 피한 척 넘어지고 뒹굴었다.

액션배우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뭐야 이거? 순 약골이잖아?”

이도원은 누운 채로 고개를 들다가 박아현을 발견했다.

순간 그의 얼굴에 차가운 분노가 서렸다.

이도원은 미간을 찌푸린 채 땅을 짚고 일어났다.

시선이 박아현에게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반면 눈길을 받는 박아현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머지않아,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렀다.

“어디 한눈을 팔아?”

액션배우가 달려드는 순간 이도원이 손을 뻗었다.

그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단숨에 상대의 목을 움켜쥐었다.

“컥!”

여전히 이도원의 시선은 박아현에게 고정돼 있었다.

액션배우는 온 몸으로 손을 뿌리쳤다.

“죽어!”

액션배우가 있는 힘껏 발차기를 날렸다.

순간 가볍게 피한 이도원은 액션배우에게로 눈을 돌리며 가슴팍에 연타를 집어넣었다. 여러 번 주먹질을 하는 시늉을 하자 액션배우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이도원은 끝내기로 얼굴에 발차기를 날렸다. 그 모습에 보조출연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연기를 했다.

이도원과 박아현이 서로를 뚫어져라 마주보았다.

이내 무심한 표정의 이도원이 몸을 돌렸다.

저벅저벅 걷는 그의 뒷모습을 쫓는 박아현의 시선은 더할 나위 없이 애처로웠다.

얼굴을 절반 쯤 가렸음에도 눈빛만으로 이도원을 향한 미안한 감정과 애틋한 마음이 소용돌이치는 게 엿보였다.

숨죽이던 정윤욱 감독이 외쳤다.

“컷! 배우들 모니터링 하세요!”

이도원과 박아현은 모니터 쪽으로 갔다.

도중에 이도원이 말했다.

“많이 늘었던데? 네 말대로 깜짝 놀랐다.”

박아현은 거 보라는 듯 씩 웃었다.

두 사람은 모니터링을 했다.

박아현은 썩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도원은 무표정했다.

배우들의 얼굴을 살피던 정윤욱 감독이 물었다.

“도원이, 왜 그래? 문제 있어?”

“아, 감독님.”

이도원은 잠시 생각하던 끝에 대답했다.

“좀 더 괜찮게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잠깐 아현이랑 얘기 좀 해도 될까요?”

정윤욱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시간 많다. 두 시간 해도 돼.”

피식 웃은 이도원은 박아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박아현의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랐지만 그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공터로 가자 박아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왜?”

“연기는 좋았어. 다만 움직임이 가미되면 더 살아있는 장면이 나올 것 같다.”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내가 등장하기 전부터 증표를 만지작거리면서 초조하고 불안한 심리를 표현하는 건 어때?”

영화 초반 민혜공주가 조영선에게 증표 하나를 준다.

반면 조영선은 누명을 쓰고 사형 당하러 갔을 때 이 증표를 흘리게 된다.

민혜공주는 이 증표를 보고 조영선이 죽은 줄 알다가 살아있다는 정보를 듣고 투기장까지 직접 방문한 것이다.

시나리오상 내용을 봤을 때 이도원의 조언은 제법 그럴싸했다.

박아현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리고 또 있어?”

“응. 내가 뒤 돌 때 쯤 증표를 떨어트리는 거야.”

“차라리 맞고 있을 때 초조한 반응을 보이는 건 어때?”

“아니.”

이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민혜공주는 조영선이 노비한테 질 실력이 아니란 걸 알잖아. 자, 민혜공주의 초조함과 두려움은 조영선이 자신을 증오할 게 빤한 데서 오는 감정이야. 그러다 조영선이 뒤돌아 설 때 확신하는 거지. 끝났구나. 그리고 증표를 툭-. 어때?”

박아현은 곰곰이 생각해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가자.”

이도원이 흡족하게 웃었다.

그때 박아현이 손을 들며 말했다.

“나도 할 말 있어.”

뜻밖의 말에 이도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뭔데?”

“지금은 표정연기로만 감정을 전달하고 있잖아?”

그렇게 물은 박아현이 덧붙였다.

“그런데 네 말을 듣다보니까, 맞기만 하던 네가 싸우려고 다짐하는 순간의 변화를 상징적인 동작으로 표출하는 건 어떨까 싶어.”

이도원이 곰곰이 생각하다 되물었다.

“어떤 동작?”

박아현이 혀를 내밀며 대답했다.

“나도 몰라. 그것까진 생각 안 해봤네.”

“움직임…….”

이도원이 중얼거렸다.

그는 전생에서 마임배우였다.

무언극은 발상의 전환을 하지 않으면 지루할 수밖에 없다.

대사도 없는 빤한 움직임만으로는 관객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데 한계가 있다.

발상이 새롭지 않다면 그건 내용 설명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 이도원의 머릿속을 번뜩이며 스쳐지나가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하자. 조영선이 진중한 성격의 인물이라고 해서 연기까지 굳어질 필요는 없어. 캐릭터를 묘사하려 하면 지루해진다. 그저 인물에 몰입하고, 제약을 푼다.’

< Action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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