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03화 (103/178)

< Action (5) >

이도원은 컷 촬영을 하고 자리로 돌아와 막간을 이용해 대본을 펼쳤다.

‘다음 장면은 윤지민이랑 한다.’

올 것이 온 기분이었다.

곁에 있던 오준식이 목소를 낮추며 말했다.

“현장 분위기가 삽시간에 안 좋아졌어. 스태프들도 표정이 굳어있고. 정윤욱 감독과 윤지민 사이가 생각보다 더 안 좋은 것 같은데. 그래도 한때 연인이었다는 사람들 끼리 왜 그러냐.”

이도원은 대본을 넘기며 답했다.

“안 좋게 찢어졌으니까 그러겠지요.”

말은 무심한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도 업계에서 알아주는 프로들인데, 사적인 감정을 일에 개입시킨다고?’

사람 나름이니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도원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내가 본 두 사람은 그럴 인물이 아냐.’

성격이 어떤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두 사람 성향 자체가 프로페셔널 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곰 보단 여우에 가까운 인성을 가진 사람들인 것이다.

어쨌거나 당장 윤지민과 호흡을 맞춰야하는 이도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두 사람 개인사야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영 신경 쓰이는군.’

그때 밴 한 대가 현장으로 들어왔다. 윤지민이 탄 흰색 밴이었다. 곧 내린 윤지민이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이도원에게 다가왔다.

“잘 하고 있었어요?”

이도원은 불편한 기분을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 선배님.”

윤지민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도원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때 정윤욱 감독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자자. 이제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이도원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정윤욱 감독은 원래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항상 배우들과 논의를 거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막 바로 촬영에 들어가는 것이다. 더구나 이번 장면은 왕세자가 왕을 암살하기 전 공주와 미묘한 감정이 들어가는 장면이었다.

‘중요한 장면인데.’

아무 지시도, 논의도 없다. 하지만 세세한 부분까지 따지고 들 수도 없는 입장인지라 이도원은 별 말없이 자신의 자리로 가서 섰다.

윤지민 역시 그의 앞에 마주섰다.

그녀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화이팅.’

마침내 사인이 떨어졌다.

“레디- 액션!”

정윤욱 감독의 목소리와 함께 ‘민혜공주’ 역할의 윤지민이 대사를 쳤다.

“난 정략혼을 하게 될지 모르는 몸이에요.”

이도원은 묵묵부답으로 뒷짐을 지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윤지민이 대사를 이어갔다.

“당신 정도면 충분히 날 요구할 수 있을 거예요. 특히 세자가 왕권을 잡으면 더 반기겠죠. 군대의 충성이 장군에게로 향해있는데, 장군을 얻게 되는 거니까.”

이도원은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윤지민이 리딩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건조하게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리딩 때 풍부하고 세밀한 감정선으로 기회주의적 성향이 있는 ‘민혜공주’를 드러냈다면, 지금은 그저 ‘민혜공주’라는 캐릭터를 대사로서 지루하게 설명하는 느낌이었다.

그건 호흡을 주고받는 이도원이기에 가장 먼저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티를 낼 수도 없는 노릇.

이도원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소장은 이미 혼인한 몸입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날 받아주지 못하는 이유가 안돼요. 말했다시피 세자 입장에선 당신을 거부할 수 없을 테니까요.”

윤지민이 눈을 반짝이며 고집을 부렸다.

이도원은 고개를 저으며 완강하게 말했다.

“전쟁이 끝나는 대로 소장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윤지민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윤욱 감독이 사인을 보냈다.

“엔지. 배우들 잠깐 이리와 보세요.”

이도원과 윤지민이 정윤욱 감독에게로 갔다.

모니터를 빤히 보고 있던 정윤욱 감독이 윤지민에게 고개를 돌렸다.

“장난하나?”

윤지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라고요?”

정윤욱 감독이 모니터를 툭툭 치며 말했다.

“당신 눈으로 직접 봐. 이 따위로 연기를 해놓고 고의적이 아니라고?”

그는 이어서 물었다.

“지금 나한테 시위하는 건가?”

윤지민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도원은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정윤욱 감독은 이런 스타일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무서운 감독이긴 하지만 거친 감독은 아니었다. 더불어 배우들과의 교감과 소통을 중시하는 감독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지만, 이도원의 눈으로도 확인했던 부분이었다.

‘윤지민과 사이가 안 좋아서 과하게 반응하거나 혹은…….’

다른 이유가 있다.

물론 그 이유까지 알 수는 없었다.

이도원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정윤욱 감독이 말했다.

“똑바로 하세요. 투자자들이 편 들어줘서 현장 들어왔다고 기고만장하지 말고.”

정윤욱 감독은 고개를 돌렸다.

윤지민이 벌게진 눈으로 돌아갔다.

이도원 역시 그녀와 마주섰다.

‘예쁘긴 예쁘군.’

잘못해서 혼나고 우는 건데 애처롭고 절로 감싸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어디나 본능적인 판단일 뿐이고, 이도원은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그 사이 윤지민이 간신히 울음을 멈췄다.

이내 정윤욱 감독이 운을 뗐다.

“배우들 레디-.”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현장 분위기는 싸늘했다.

“액션.”

윤지민이 입을 열었다.

“난 정약혼인을… 아, 죄송합니다.”

그녀는 눈가를 훔치며 스태프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푹 쉰 정윤욱 감독이 말했다.

“바로 다시 갑니다. 레디- 액션.”

윤지민이 대사를 시작했다.

“난……. 아아.”

목소리가 떨렸기에 그녀는 대사를 멈췄다.

바라보던 정윤욱 감독이 손짓으로 촬영을 중지시켰다.

“…윤지민 씨. 잠깐 나 좀 볼까?”

“네…….”

윤지민이 힘없이 답하며 정윤욱 감독에게로 갔다.

이도원 역시 현장에서 빠졌다.

곁에 서있던 정성우가 물었다.

“이상하단 말야.”

“예?”

이도원이 묻자 정성우가 말을 이었다.

“내가 정 감독님이랑만 세 작품을 했거든? 지금까지 다 좋았던 건 아니야. 개떡 같은 여배우들도 있었고. 근데 한 번도 정 감독님이 저렇게 화내는 걸 본 적이 없거든. 이건 굉장히 이상해.”

정성우 역시 출중한 연기력을 가진 배우였다. 따라서 타인의 연기를 볼 때도 직관적으로 분석하는 습관이 몸에 베어 있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던 끝에 확인차원으로 물었다.

“윤지민도 이상하단 말이야. 왜 일부러 엔지를 내지? 넌 확실히 알 거 아니야. 쟤, 일부러 엔지 내는 거 맞지?”

이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저야 윤지민 선배가 원래 어떤지 모르니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일부러 내는 게 맞아. 그런데 윤지민만 평소 같지 않은 게 아니고 정윤욱 감독도 평소와 다르다면…….’

두 사람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뭘 위해서? 영화를 일부러 말아먹으려고?

그것도 앞뒤가 맞질 않았다.

어떤 상황인지 몰라도 이도원은 자신이 희생양이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정성우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배님. 괜히 짐작만 하면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으니까 감독님에게 직접 여쭈어 보는 게 어떨까요?”

정성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다. 타이밍을.”

“타이밍이요?”

“아직 나서서 말하기에는 부족해. 계속 어이없는 엔지가 나면 정 감독님께 조용히 한 번 얘기해 보는 편이 좋겠다.”

“알겠습니다.”

이도원이 순순히 대답했다.

그때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던 정윤욱 감독과 윤지민이 돌아왔다.

정윤욱 감독이 모니터 앞에 앉아 지시했다.

“다시 갑시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엔지가 났다.

현장 분위기는 점점 악화됐고, 마침내 정윤욱 감독이 폭발했다.

“야, 윤지민! 너 뭐하는 새끼야?”

욕설을 들은 윤지민은 그를 노려보다 자신의 앞에 있는 카메라를 손으로 내렸다.

“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촬영 못하겠어요.”

이렇게 되면 막장이다.

모든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현장에서 나왔다.

정윤욱 감독은 윤지민을 불러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중간 중간 소리를 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보던 정성우가 말했다.

“아무래도 물어보는 게 낫겠다. 아무래도 이상해. 왜냐하면 정 감독님은 화가 나면 얼굴이 벌게지거든?”

정성우가 물었다.

“지금은 소리를 질러서 벌겋게 됐지만, 아깐 멀쩡했지?”

“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심 확신했다.

‘둘 사이에 뭔가 있다.’

정성우는 이도원의 팔을 툭 치며 말했다.

“가자.”

“가요? 어디를요?”

이도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저도 갑니까?”

“그럼 선배 시켜먹고, 뒷짐 지고 지켜보려고?”

정성우가 나무라자 이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가야죠. 앞장서겠습니다.”

두 사람은 정윤욱 감독과 윤지민이 싸우는 현장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도원이 한참 열을 올리는 정윤욱 감독을 부르려고 입을 열었다.

“저, 감독님.”

정윤욱 감독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정성우가 이도원의 어깨를 잡으며 앞으로 나섰다.

“배우가 발성이 왜 그래? 감독님. 정 감독님!”

그때서야 정윤욱 감독이 정성우를 돌아보았다.

“아, 성우 씨.”

정성우가 처음부터 강수를 두었다.

“죄송하지만 이대로는 곤란합니다. 저는 지민 씨 연기력도, 감독님 연출 방식도 잘 알고 있어요. 지민 씨는 지금 일부러 엔지를 내고 있습니다. 감독님은 평소 보다 훨씬 흥분하고 계시고요. 감독과 주연 여배우가 다투면 현장 분위기는 어떻게 됩니까?”

그는 스태프들이 모여 있는 쪽을 가리켰다.

“저 꼴입니다. 만약 안유성 선생님이 계셨다면 크게 노하셨을 겁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도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성깔 한 번 대단하네. 아무리 주연이라지만 배우가 감독한테 저렇게 쏘아붙이다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아니면 내가 타임 슬립 전 조연만 해서 유독 감독님들한테 조심스러운 건가?’

생각해보면 주연 배우들은 제법 자기주장도 강했다. 웬만한 감독들은 주연한테 함부로 하지 못했다.

물론 정윤욱 감독 같이 흥행 보증수표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역시나, 정윤욱 감독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도를 넘는 것 같은데? 이 현장의 감독은 접니다. 제가 배우를 혼내고 관리하는 게 뭐가 잘못됐습니까?”

“상황이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얘기한 겁니다. 배우들이 연출을 모르듯 감독님도 연기를 해본 적이 없으시니까, 크게 꾸짖으시는 방법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지금 나한테 훈수를 뒀어요? 그것도 신인배우인 도원 씨 앞에서?”

정윤욱 감독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정성우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저, 감독님이 세 번째 불러주셨습니다. 그런 제가 봤을 때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입니다. 지금.”

“됐습니다.”

정윤욱 감독은 말을 자르며 답했다.

“오늘 촬영은 이만 접겠습니다.”

그는 스태프들이 있는 곳으로 먼저 내려갔다.

윤지민은 간헐적으로 흐느끼며 울다가 뒤따라 내려갔다.

정성우는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이도원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정윤욱 감독과 윤지민이 짜고 판을 흔드는 게 분명하다. 이유가 뭘까?’

이도원이 정성우를 보며 물었다.

“선배님. 너무 흥분하신 것 아니에요?”

“일부러 그랬다.”

정성우가 목소를 낮추며 말했다.

“뭔가가 있어. 넌 잘 모르겠지만 감독님은 절대 이런 일로 촬영을 접는 분이 아니다. 설령 접더라도 불미스러운 상황은 모두 그 자리에서 해결을 봐야 되는 분이야. 저렇게 피한다는 건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라고 봐야지.”

두 사람 사이에 뭔가가 있다. 그런데 그게 뭔지는 모른다.

이도원은 <투사>라는 영화가 제대로 나오기 위해선 그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 Action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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