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02화 (102/178)

< Action (4) >

영화 <투사> 촬영이 한창인 때 이도원은 틈틈이 대학로의 뮤지컬 <영웅> 연습실을 나갔다. 이도원은 <영웅>의 ‘안중근’을 분석하며 <투사>의 ‘조영선’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진중한 성격의 애국자.

‘그나마 조금 편하겠어.’

<악마의 재능>과 <시간아! 돌아와>를 동시에 했을 때처럼 정반대 성향의 배역이 아니었다.

이도원이 홀로 연습실에 앉아있을 때, 정태화가 몇몇 단원들과 들어섰다.

정태화는 시계를 보더니 물었다.

“오늘도 연습실에서 자고 가려고?”

이도원은 말없이 빙긋 웃었다.

그의 주된 수면장소는 연습실과 차안이었다.

정태화가 고개를 흔들며 이어 말했다.

“그러다 몸 상한다. 컨디션 관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 잊지 말아.”

“알겠습니다. 명심하고 주의할게요.”

이도원은 순순히 대답했다.

정태화가 걱정할 정도인데 가족들은 오죽할 것인가.

하루하루 집에다 전화를 걸때면 현장의 간이숙소에서 잠을 잔다는 핑계를 댔다.

한편 정태화에게 이도원은 놀라운 후배였다.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음에도 허세를 부리진 않는다.

연기력은 볼 때마다 절로 혀를 내두를 만큼 훌륭했다.

부족했던 노래 실력 역시 매번 다른 사람처럼 늘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한다지만 이런 속도로 늘다니.’

정태화가 바라보는 곳.

이도원은 웜 업과 화술훈련을 하고 본격적인 연습에 돌입했다.

묵직한 소리가 음정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더 위에서 음을 하나 씩 내려놓는 것처럼 편안하게 불렀다.

비장한 표정과 눈빛이 가사에 녹아들었다. 그러나 정작 이도원은 마음에 차지 않았다.

‘민족의 한과 숙원을 노래하는데 웅장한 느낌만 있다. 애석한 감정은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어.’

이도원은 녹음기를 통해 자신이 부른 노래를 귀에 대고 들으며 고민했다.

‘배역에 몰입하기보다 노래 자체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야.’

신용운에게 박수를 받았을 때 느꼈던 자유로움이 없었다.

이도원은 이 문제점에 대해 스스로 완전히 배역에 녹아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무의식중에 <투사>의 ‘조영선’과 비슷하게 접근해서 그렇다. 두 배역 모두가 비슷한 성격이지만 ‘조영선’의 목적은 왕에 대한 충성심과 왕세자에 대한 복수심이다. 반면 ‘안중근’은 오로지 이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는 독립군이야. 두 인물의 목적 자체가 다르다.’

확실하게 분리를 해야 한다. 비슷한 성격의 인물이란 점이 이도원에게는 배역 간 헷갈리게 되는 난제로 적용했다.

이도원은 어느 정도 <영웅>의 노래와 대사들이 입에 익을 때쯤부터 일제강점기에 대한 책과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내가 배역과 교감하려면 이 시대부터 이해해야 한다.’

그는 시작점을 잡았다.

*

영화촬영 역시 바쁘게 진행됐다.

세트로 가는 도중 오준식이 말을 걸어왔다.

“완전히 연기에 빠져서 사는구나. 이거야 원, 밤낮 이중 생활하는 슈퍼히어로도 아니고. 영화촬영과 뮤지컬 연습을 동시에 하려니 많이 힘들지?”

이도원은 시트에 기대 고개만 흔들었다.

“힘들긴 한데 즐겁다. 이렇게 매력적인 역할들을 계속 할 수 있다니 정말 행운이지.”

그건 그렇다. 대부분 배우들이 배역이 없어서 못하지, 열정이나 시간이 부족해서 못하진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도원은 행복한 배우이자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오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잘 알고 있으니 다행이다. 힘들어도 초심을 잃지 마.”

그는 마음 한구석으로 이도원이 걱정됐다. 괜히 작품 욕심을 부리다 본인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일을 벌려놓은 것은 아닐까 내내 신경이 쓰였다. 영화나 뮤지컬이나 도중에 마음대로 때려치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밴이 현장에 도착했다. 군막 안을 재현한 세트장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이도원과 오준식은 인사를 하며 정윤욱 감독에게로 갔다. 정윤욱 감독이 배우들을 모아놓고 콘티를 배부하며 말했다.

“오늘은 ‘조영선’이 왕세자에 의해 토사구팽 당하는 장면입니다. 무엇보다 도원 씨의 감정연기가 중요해요.”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작팀은 잠시 장면에 대한 논의를 하고 곧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자, 클로즈 업.”

그리 말한 정윤욱 감독이 사인을 보냈다.

“배우 레디-액션.”

이도원은 깊은 눈으로 두 손을 내려다봤다. 그릇을 가득 채운 수면 아래 선홍색 핏물이 번져가고 있었다. 귀에서는 병사들의 절규가 들려오고, 불길에 휩싸인 전장과 죽어나가는 병사들의 모습이 두 눈에 선했다.

이도원이 멍하니 환청과 환각에 둘러싸여있는 그때, ‘왕세자’ 역할의 정성우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이도원은 그를 발견하고는 무릎을 꿇었다.

“저하.”

정성우는 아직 눈물자국이 남아있는 얼굴로 말했다.

“아바마마가 돌아가셨네. 자네를 만난 뒤더군.”

이도원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막사로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이도원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중얼거리던 이도원의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딱딱한 표정은 이내 정성우를 추궁하는 불신을 품었다.

정성우의 슬픈 표정 속, 그의 내면이 담긴 동공에 야망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횃불이 비추는 불빛이 냉기가 흐르는 정성우의 옆면을 비추었다.

훌륭한 연기력과 연출이 어우러져 두 사람이 돋보였다.

이윽고 정성우의 눈빛을 읽은 이도원이 말했다.

“전하의 죽음. 저하께서 저지른 일이군요.”

정성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여봐라. 장군을 모셔라.”

병사들이 다가와 이도원을 양쪽에서 잡지만 이도원은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응했다. 그는 왕세자를 노려보면서도 섣불리 굴지 않고 물었다.

“설마 가족들까지 손댄 겁니까?”

시선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공기마저 건조하게 말리는 음성을 들은 정성우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정성우는 내색하지 않고 다음 대사를 쳤다.

“임금을 살해한 죄. 자네의 구족을 능지처참해야하지 않겠나? 곧 만날 수 있을 게야.”

그 말을 들은 이도원이 눈을 부릅뜨며 달려들었다.

“으아아!”

고함을 내지르는 순간, 병사가 뒷목을 가격했다.

이도원이 기절하는 데까지.

“컷!”

정윤욱 감독이 컷 사인을 보내고 손짓으로 배우들을 불렀다. 따라서 이도원과 정성우는 모니터로 갔다.

장면을 모두 감상한 정성우가 이도원에게 물었다.

“한 번 더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예. 선배님.”

이도원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정윤욱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시 갑시다.”

촬영이 계속됐다.

정성우가 이도원을 팽시키는 씬은 여섯 번 째 촬영에 들어가서야 만족스러운 장면이 나왔다. 두 사람의 연기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카메라 구도와 병사 역할 보조출연자들의 위치를 바꿔서 촬영했다.

모니터링을 마친 정윤욱 감독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 호흡이 잘 맞는데.’

생각한 그는 이도원에게 말했다.

“다음 씬은 액션. 도원이 혼자 들어간다. 준비 됐지?”

“예.”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촬영장소로 넘어가기 위해 모든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차를 타고 인근 야산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막바로 촬영준비가 시작됐다.

먼저 배우들은 리허설을 했다. 기마병 셋이 앞서가고, 이도원이 내의만 입은 채 포승줄에 묶여 맨발로 뒤따랐다. 이도원은 얼음 위를 걷는 듯 발이 시렸다. 더구나 쌀쌀한 날씨에 홑겹 내의 한 장만 입은 상태였다.

이도원은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더럽게 춥네,’

한편 스태프들은 동선을 확인하며 이도원이 걷는 곳의 자갈을 치우고 고운 흙을 깔았다.

배우들이 분장까지 마치자 정윤욱 감독이 말했다.

“배우들 위치해주세요!”

확성기를 통해 산에 메아리가 맺혔다.

이도원과 기마병 셋은 시작위치로 가서 행렬을 맞췄다.

배우들을 본 정윤욱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고 지시를 내렸다.

“레디-액션!”

이도원은 반역죄에 대한 추국을 받는 대신 야산으로 끌려가는 상황이었다.

숲길을 걸으며 이도원이 기마병들에게 말했다.

“왕세자가 비밀리에 날 제거하려 하나보군.”

그 말에 기마병들은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말을 몰았다.

카메라가 따라붙고, 일 분 정도 걸어 평평한 지대에 도착했다.

이내 기마병 하나가 멀리 나가서 주변 경계를 했다.

나머지 두 명은 말에서 내려 이도원의 앞뒤에 위치했다.

“빨리 끝내도록.”

말한 이도원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뒤에 선 기마병은 뒤에서 목을 칠 자세를 취했다.

그때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고통 없이 죽여라.”

기마병 둘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잇따라 이도원의 뒤에 섰던 기마병이 검을 거꾸로 잡았다. 단번에 목을 찔러 죽이려는 의도였다.

이도원이 스윽 눈을 감았다. 복수를 단념하고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모습이었다.

기마병이 말했다.

“직접 모시진 않았지만, 그동안 장군과 한편에서 싸운 것만으로 영광이었습니다.”

이도원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 섰던 기마병은 눈을 질끈 감으며 거꾸로 잡은 검을 찔렀다.

그때였다.

이도원이 움직였다.

상체를 흔들어 검을 피한 이도원은 칼날을 맨손으로 잡았다. 그 상태로 벌떡 일어나며 기마병의 턱주가리를 머리로 들이받았다.

“컥!”

기마병이 휘청대는 사이 이도원은 맨손으로 가로챈 검을 이용해 가슴을 찔렀다. 심장을 찔린 기마병이 쓰러지자 이도원이 검을 회수했다.

한편 정면에 있던 기마병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검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뽑히질 않았다.

“검에 서리가 끼면 잘 빠지지 않는 법.”

이도원은 망설임 없이 양손으로 잡은 검을 내려쳤다.

투구가 쪼개지며 검을 뽑으려던 기마병이 쓰러졌다.

“미안하다.”

중얼거린 이도원은 날쌘 범처럼 움직였다. 그는 나무 뒤에 숨어 멀리서 주변을 경계하는 기마병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불렀다.

삐익- 소리를 들은 기마병이 말을 돌려 이도원을 발견했다.

“제길!”

소리친 기마병이 돌진했다.

이도원은 검을 단단히 잡고 거리가 가까워질 때를 기다렸다.

“합!”

기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검을 휘두르며 엇갈렸다.

비틀대던 이도원은 옆구리를 잡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마상에 있던 기마병이 맥없이 낙마했다. 갑옷에는 이도원의 검이 박혀있었다.

“후우, 후우, 후우-.”

이도원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기마병이 몰던 말 세 마리를 데려왔다. 고향까지 먼 길을 쉼 없이 달려야하기에 세 마리가 모두 필요한 것이다.

실제로 보는 듯 리얼한 장면이 완성됐다. 비록 카메라들이 여러 구도에서 찍었지만 아직 부족했다.

‘생각보다 훨씬 잘해줬어!’

희열어린 웃음을 띤 정윤욱 감독이 컷 사인을 보냈다.

“컷. 오케이! 일단 모니터링 하세요.”

그 말을 들은 이도원이 기마병 역할을 수행한 액션배우들을 일으켜주었다. 액션배우들은 하나같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바로 액션스쿨 들어와도 되겠습니다.”

이도원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머지않아 배우들은 모니터를 통해 방금 촬영한 장면을 확인했다. 그때 정윤욱 감독이 이도원과 액션배우들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어때? 오케이 하고 다음 샷 찍으면 될 것 같은데.”

액션배우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도원도 모처럼 한 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감독님.”

구석에 서있던 오준식이 다가와 재빨리 이도원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오준식이 속삭였다.

“웬일로 단번에 오케이 하네? 너도 춥긴 춥나보다.”

농담을 던지는 것이다.

이도원은 맞장구를 쳐주었다.

“한겨울에 팬티만 입고 있는 기분이야. 군대에서 알통구보 했을 때 보다 춥다.”

알통구보는 군대에서 이른 아침부터 웃통을 벗고 구보하는 걸 뜻했다. 그 말을 엿들은 정성우가 끼어들었다.

“벌써 군대 갔다 왔어? 몇 살이지?”

“예. 작년에 제대했습니다. 스물두 살입니다.”

“빨리도 갔다 왔네.”

정성우는 목을 긁적이며 덧붙였다.

“난 아직 인데.”

그는 삼십대 초반의 배우였다. 더 이상 미루기도 뭐한 나이.

정성우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번 영화 끝나면 가려고 신청해 뒀다. 그전에 따로 한 잔 하자. 군대 노하우도 좀 알려달라고.”

“네. 좋습니다.”

주변에서는 스태프들이 장비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 동안 이도원과 정성우는 대기하며 대화를 나눴다.

“윤지민 말이다.”

정성우가 고민 끝에 운을 뗐다.

“모두 쉬쉬하는 분위기지만 임신했다는 소문이 있더라. 너와도 겹치는 장면이 있으니까 조심할 부분은 조심하라고 미리 말해주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이도원은 내심 크게 놀랐다.

‘임신?’

타임 슬립 전에 윤지민이 임신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나 되짚어봤지만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전에도 윤지민 팬이 아니었기에 자세한 사생활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긴 했다.

‘이혼했다고 들었는데… 그 남편이랑 만났던 시기가 현재랑 겹치는 것 같고.’

곰곰이 생각하던 이도원이 물었다.

“선배님. 윤지민 선배님, 지금 누구랑 연애한다고 공개된 것 있나요?”

“TV 안 보나보네.”

피식 웃은 정성우가 말을 이었다.

“재벌 2세랑 교제하고 있잖아? 아, 이제 2세가 아닌가? 곧 <키스톤월드> 회장이 될 차기열 씨가 윤지민 애인이야.”

< Action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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