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100화 (100/178)

< Action (2) >

이도원은 직접 고른 말을 보았다.

힘찬 스탈리온(stallion; 수컷)이었다. 마종은 통칭 한라마, 제주마의 지구력과 강인함, 서러브렛의 유연성과 스피드를 물려받은 교배종이었다. 한라마는 대형마에 비해 체중이 적게 나가기 때문에 굴곡이 심한 필드승마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임천수는 이도원의 말이 움직이지 않도록 고삐를 잡고 말했다.

“처음이니까 여기 승마대를 밟고 올라타시면 됩니다.”

이도원은 그 지시에 따라 승마대를 밟고 말안장에 올랐다.

말 자체가 온순해서 움직이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금방 적응하시는군요.”

임천수는 놀란 눈으로 말했다.

보통 승마가 처음인 경우 어정쩡하게 앉기 마련이었다. 반면 이도원은 초반에만 어색하고 머지않아 자세가 안정됐다. 여기에는 남모르는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으니까.’

이도원은 내심 미소지었다.

그는 타임 슬립을 거치면서 승마에 대한 감각은 초기화되다시피 했었다.

그러나 임천수의 설명을 들으며 기억을 되짚었기에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이도원의 스탈리온은 워낙 훈련이 잘돼서 그런지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편했다.

“재밌네요.”

이도원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차근차근 승마를 배웠다.

어느덧 혼자 말을 모는 그를 보며 임천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그렇게 자신했는지 알겠습니다. 몸으로 익히는 게 상당히 빨라요. 액션 장면을 무난히 해내는 걸 봤을 때까진 긴가민가했는데 승마에도 재능이 있습니다.”

정윤욱 감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잖아도 시간이 부족했는데 다행이군요.”

이도원은 모두의 감탄을 뒤로 하고 두 시간 남짓 훈련을 받았다.

그 결과 첫 날은 단순한 평보로 도움 없이 말을 모는 데까지 익힐 수 있었다. 빠르게 진도를 나간 이도원은 정윤욱 감독을 비롯해 액션스쿨 배우들과 인사를 나누고 해산했다. 밴에 올랐을 때 이도원은 전신이 너덜너덜해진 느낌이었다. 다만 정신은 맑게 깨어있었다.

"은근히 빡세네."

이도원의 말에 오준식이 피식 웃었다.

"하여간 욕심은."

"많은 배우들이 괜히 부상을 각오하고 몸으로 때우는 게 아니란다."

“그럼 뭔데? 왜 굳이 부상을 감수해? 어리석게.”

오준식이 이때다 싶어 반대표를 던졌다.

하지만 이도원은 자신의 연기관을 굽히지 않고 대답했다.

"배우가 직접 맡은 배역에 할당된 장면을 모두 소화한다는 건 작품의 디테일만이 목적이 아니야. 대역배우를 쓰는 것과, 직접 모든 연기를 소화하는 건 배역에 대한 집중도에서도 차이가 나게 돼. 완전한 내 것과 공용으로 쓰는 건 애정부터가 다르잖아. 말로 표현하긴 힘들지만 완전히 다른 느낌이거든."

"어차피 티도 안날 텐데 무슨."

오준식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이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진검승부로 연기를 하게 되면 배우는 더 깊게 몰입할 수 있지. 진검승부냐, 다른 안전장치가 있느냐에 따라 관객이 영화를 눈으로 보느냐, 피부로 느끼느냐가 달라진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 말에 오준식은 반은 수긍하고 반은 의심했다.

"분량의 백 퍼센트를 모두 직접 연기했을 때, 백 프로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다 이거지?"

"그래. 액션 사극에서 액션이 빠지면 뭐가 남아? 액션을 포기하는 순간 얼굴마담이 되는 거야."

이도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그럼 너무 쪽팔리잖아."

*

영화 <투사> 10월 25일 크랭크 인 당일.

이도원은 지난 몇날며칠 동안 낮에는 승마와 액션훈련을, 밤에는 뮤지컬 연습에 힘썼다. 심지어 크랭크 인 당일조차 이도원은 이동하는 밴 안에서 대학교 과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과제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점이었다.

"넌 어째 교수님이 보내주신 자료를 쓱 보고 넘기고, 쓱 보고 넘기고 그런다? 그렇게 대충하다 학사경고 먹는 거 아니야?"

"아니, 아니."

이도원은 혀를 꼬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한테는 모두 복습 수준일 뿐."

그 오만한 대답에 보조석에 타고 있던 유성연이 헛웃음을 뱉었다.

"자신감이 과하면 못 쓰는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잖아?

이도원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괜한 걱정을 살까봐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실상 그 정도로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이도원이 다른 학생들에 비해서 큰 효율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도원은 타임 슬립 전 이미 한 번 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경험이 있었다.

진즉 연기에 대한 이론들을 공부하고 동기선후배들과 함께 공연을 올리기도 했던 것이다.

'이미 다 배웠던 걸 짚어나가는 느낌이랄까?'

이도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렇다면 굳이 시간에 쫒기며 복습할 필요가 있나?

물론이다.

복습만으로도 충분히 새롭게 느끼는 바가 있었다. 전생의 학교와는 커리큘럼 자체가 달랐다. 덕분에 이도원은 한참 동안 잊고 있던 논문과 이론적인 자료들을 통해 연기에 대해 여러 각도로 접근할 수 있었다. 이는 현장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무기였다.

"나한테 오는 메일 모두 너한테도 전송하고 있으니까 짬 날 때마다 봐봐. 중간에 휴학하면서 배우지 못했던 것들을 배울 수 있을 거야."

이도원의 배려에 오준식은 가슴이 뭉클했다.

'나 같이 대접 받는 매니저도 드물겠지.'

그래서 고맙게 생각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열등감에 휩싸여 잠깐 주춤하긴 했지만.

오준식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고맙다.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틈 날 때마다 연습하고 있어."

이도원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네가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본다."

그들은 두 시간 반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장소는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의 논산천 특설세트장.

큰 규모의 몹씬 촬영이 가능한 곳이었다.

"휘유- 이제 고생 시작이구만?"

오준식이 짓궂게 물었다.

유성연 역시 그를 거들었다.

"날씨가 이래서 촬영하려면 엄청 춥겠다."

이도원은 두 사람이 얄밉게 느껴졌다.

'이것들이 날 놀리는 거야?'

확실히 사극에서 추위는 배우들이 맞서 싸워야하는 가장 큰 적이었다. 야외에서 이루어지는 촬영은 특히 더했다. 하물며 이 많은 인원이 동원되는 몹씬이라면-.

오준식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죽어나겠군. 엔지가 수십 번은 나겠는데?"

한편 조단역들과 보조출연자들도 속속들이 현장으로 도착했다.

연기자만 천여 명, 말도 백 마리나 동원된 대규모 촬영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정 감독이 이번 작품을 인생의 역작으로 만들려고 벼르고 있다더니, 한국영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 장면이 나오겠어."

말 위에 올라 새하얀 입김을 내뱉던 안유성이 나직이 말했다. 그는 팔십이 넘은 노구에 추위를 견디기 힘들 텐데도 편안한 얼굴이었다. 평생 촬영장을 전전해서 그런지 오히려 젊은 사람 보다 활기차 보였다. 대기시간이 길어지고 있음에도 안유성은 전혀 추운 내색을 하지도, 보채지도 않았다.

떨어져서 안유성을 바라보던 이도원은 내심 감탄했다.

'멋지군.'

안유성에게는 리딩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열기가 느껴졌다.

푸르르르-.

히히힝!

말들이 투레질을 하고 울음을 토해냈다. 카메라만 대도 실제 조선시대의 전투 현장이 나올 것 같은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이도원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한다니.'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총합하면 천오백 명에 이르렀다. 숫자로 말하면 큰 수치 같지 않은데 실제로 보니 들판을 뒤덮을 정도로 많은 인원이었다.

이 추운 날씨에 엔지라도 내면 이 많은 사람들이 기다려야 하고 눈총을 피할 수 없다. 그 와중 배우가 느끼는 부담감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긴장되지가 않아.'

이도원은 오히려 흥분이 됐다. 그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는 그 순간.

완벽한 환경을 조성해 준 정윤욱 감독이 확성기로 사인을 보냈다.

"선생님, 언제나처럼 좋은 연기 부탁드립니다! 자, 그럼 레디-!"

곳곳에 배치된 카메라에 불이 들어왔다.

장비들이 가동되자 정윤욱 감독이 외쳤다.

"액션!"

붐 오퍼레이터가 마이크를 카메라 밖에 걸었다.

임금 역할의 안유성이 대사를 쳤지만 미처 이도원이 있는 곳까지 들리진 않았다.

정윤욱 감독과 음향감독만이 헤드셋을 끼고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었다.

따라서 이도원은 눈으로나마 안유성이 연기하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황금 같은 기회다. 하나라도 더 배워야해.'

긴 독백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삼 분 정도가 흐른 후 정윤욱 감독이 크게 소리쳤다.

"컷-. 선생님, 확인하시죠!"

안유성은 천천히 말을 타고 와서 모니터링을 했다.

이도원 역시 그 틈에 껴서 안유성의 연기를 보았다.

충분히 잘빠진 장면이었다.

하지만 안유성의 표정은 심각해보였다.

"정 감독. 한 번 더 가도 될까?"

"그럼요. 역시 원 테이크에 오케이는 좀 아쉽죠?"

정윤욱 감독이 깍듯하게 답했다. 가볍게 웃은 안유성이 그의 등을 두드린 뒤 다시 말을 타고 자리로 돌아갔다.

촬영준비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정윤욱 감독은 직접 카메라가 위치한 곳까지 가서 촬영감독과 상의하고 각도를 조정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정윤욱 감독이 물었다.

"선생님 준비되셨죠?"

안유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윤욱 감독이 사인을 보냈다.

"레디- 액션!"

배우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힘찬 발성이었다.

감독의 사인은 현장 분위기에 따라 바뀐다.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장면에선 나직하게, 밝은 분위기의 장면에선 쾌활하게, 지금처럼 웅장한 장면에서는 감독의 사인 역시 힘차게 울려 퍼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정윤욱 감독의 사인은 굳이 확성기가 없더라도 배우를 북돋아줄 수 있을 만큼 우렁찼다.

'관록과 능력을 모두 가진 연출과 배우가 힘을 합하니까 정말 볼만 하구나.'

감탄한 이도원은 가슴속 깊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새롭고 놀라웠다. 왠지 이곳에서 산더미 같은 선물세트를 얻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다음으로 불화살이 하늘을 나는 장면을 촬영했다. 가볍게 제작된 각궁과 화살에 불을 붙이고 쏘아 올렸다. 그리고 반대편에 숲속에선 소화 작업을 했다. 마지막으로, 적진이 불타오르는 장면은 편집 단계에서 CG처리를 했다. 불화살이 날아오르는 장면까지 촬영한 정윤욱 감독은 배우들과 몇몇 스태프들을 불러들였다.

"다들 잘 알겠지만 중요 장면들은 모조리 롱테이크로 갈 겁니다. 그건 액션도 마찬가지. 기마대가 평보로 천천히 숲에서 대열을 갖춥니다. 그리고 촬영이 시작되면 도원이의 명령을 신호로 움직이면 됩니다. 스태프들은 보조출연, 단역들한테도 메시지 전달 잘 하고. 화끈하게 여진족과 부딪히는 장면을 뽑아봅시다!"

오늘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까지 마무리가 되어야 했다.

더군다나 말이 넘어지는 장면을 삼 회 이상 촬영하면 동물보호협회에서 재제가 들어온다. 따라서 매트리스를 깔고 삼 회 이하로 촬영을 끝내야하는 것이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도 촬영준비는 한참 걸렸다. 독성이 없는 염색약을 사용해 일일이 피 분장을 하고 갑옷에 불에 그슬린 듯이 효과를 냈다. 일련의 과정에서 배우들이 대기하는 동안 현장 밖에 불을 피워 쉴 곳을 마련했다. 그러나 손발은 이미 차갑게 변했고, 콧물은 하염없이 흘렀으며, 머리는 지끈거렸다.

오준식은 이도원의 어깨 위로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

"으 씨. 발가락 자르고 싶다. 10월이면 아직 선선해야하는데 왜 이리 춥냐. 이쪽도 이렇게 추운데, 저쪽은 얼마나 추울까?"

오준식이 바라보는 곳.

덜덜 떨며 옹기종기 모여 앉은 단역들과 보조출연자들이 보였다. 그들의 환경은 훨씬 열악했다. 물론 저쪽이나 이쪽이나 잊을만 하면 불어오는 쌀쌀맞은 바람이 점점 몸을 얼리는 건 똑같았다.

근래 일교차가 컸기 때문에 체감온도는 더 낮았다

"최대한 엔지 없이 가야지."

이도원은 굳게 다짐했다.

촬영준비는 장장 두 시간이 걸렸다. 이제 곧 전투장면이기 때문에 더욱 오래 걸린 것이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자 정윤욱 감독이 확성기로 외쳤다.

"배우들 들어와 주세요!"

이도원은 말에 오르며 날숨을 뱉었다. 새하얀 입김이 눈앞까지 올라왔다. 체온이 낮아 피로감이 더 심했다. 갑옷을 입고 염색약을 칠해 무겁고 찝찝하기까지 했다.

'진짜 전장터에 나와 있는 기분이군.'

고삐를 잡은 이도원은 현장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기마병 역할의 말 탄 병사 백 명이 일렬횡대로 도열했다.

철그럭, 철그럭-.

갑옷 소리가 고요해진 평원을 울렸다.

그리고 마침내, 날카로운 눈빛으로 현장을 훑던 정윤욱 감독이 외쳤다.

< Action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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