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eady (7) >
이도원은 두 시간쯤 돼서 연습실을 나섰다.
‘아쉽다. 태화 선배한테 코칭받을 기회가 많지 않은데.’
입맛을 다신 그는 대학로의 커피숍으로 갔다.
박아현은 미리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선글라스와 모자로 완전무장을 한 상태였다. 휴대폰을 보고 있는 그녀의 앞에 앉은 이도원이 탁자를 툭툭 치며 말을 걸었다.
“저기요. 싸인 좀 해주세요. 너무 눈에 띄셔서 배우신 줄 바로 알아봤네요.”
“깜짝이야!”
박아현이 답하며 선글라스를 조금 내렸다.
이도원은 모자만 깊게 눌러썼지, 얼굴은 하나도 가리지 않고 있었다.
“나보다 더 유명하면서 그러고 다니면 어떻게 해? 주변에서 한 사람만 누구야! 말하면 우르르 몰려들어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일 걸?”
이도원은 항상 차만 타고 다녀서 그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어 말했다.
“그래도 너무 티 나지 않아?”
“요새는 이러고 다니면 성형한 줄 알고 사람 안 붙어. 게다가 연예인인가 의심해도, ‘선글라스 벗어 봐요, 얼굴 좀 보게!’ 이럴 수는 없잖아?”
박아현의 말은 꽤 합리적이었다.
이도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지나가다가 노점에 있는 선글라스 하나 사서 쓰지 뭐.”
고개를 끄덕인 박아현은 휴대폰으로 검색한 곳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해산하고, 이 술집에서 만나는 건 어때?”
“청담동?”
“여긴 누가 제보사진 잘 안 찍거든. 이쪽 동네 사는 사람들이 다른 동네 사람들 보다 확실히 스캔들도 적게 터지고.”
“괜히 비싼 동네 사는 게 아니네.”
이도원은 중얼거리더니 좋은 생각이 난 듯 씩 웃었다.
“내가 더 좋은 곳을 알고 있지.”
*
박아현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와, 이런 데가 진짜 있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이도원이 박아현을 데려온 곳은 연습실이 있는 건물의 옥상이었다. 연습 도중 바람 쐬러 몇 번 올라와 본 적이 있었다. 무엇보다 난로도 있고, 일회용 테이블도 있었다.
그때 박아현이 물었다.
“그나저나 또 무슨 뮤지컬이야? 지난번 영화, 드라마 동시에 할 때도 그렇고…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이도원이 피식 웃었다.
“인생은 짧고 할 일은 많고.”
그는 간단히 대답하며 말했다.
“연습실이라 판 벌리긴 좀 그래. 맥주나 마시자. 맥주는 뭐로?”
“아무거나!”
“그건 내가 제일 싫어하는 대답인데.”
중얼거린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맥주 사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이도원이 편의점에 가서 맥주 여섯 캔을 사왔다.
박아현이 캔을 따자 치익-김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입맛을 다셨다.
“난 소주가 체질인데. 게다가 원래 슬플 땐 쓴 술 마시는 거랬다고.”
“난 애 입맛이라 쓴 술은 싫다.”
뻔뻔하게 웃으며 대답한 이도원이 이어 물었다.
“그래. 자네 고민이 뭔가?”
“오늘 봤잖아.”
“뭐? 윤지민한테 발리는 거?”
박아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죽을래? 예전부터 느꼈는데, 너 진짜 띠꺼워.”
이도원은 잔잔한 미소와 함께 그녀를 보고 말했다.
“신경 쓰지 마라-.”
“뭐?”
“윤지민이 활동만 몇 년 차냐. 그런 여자가 너 잡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집중이 되겠어? 당연한 거야.”
“지금 위로해주는 거야? 위로해주는 건지, 아님 놀리는 건지 구분이 안 가네.”
구시렁 거린 박아현이 투덜댔다.
“맥주는 음료수야, 역시.”
“꼭 너 같이 말하는 애들이 제일 먼저 꽐라 된다던데.”
이도원이 슬쩍 놀렸다.
그러나 박아현은 대답하지 않고 옥상 아래를 보며 숨을 들이마셨다.
“아오! 윤지민 그년, 찍 소리도 못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결국 찍 소리도 못하는 건 나더라. 얼마나 억울했는지 알아? 분하고 열 받아서 울었어.”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겠지.”
박아현은 고개를 돌려 이도원을 빤히 바라봤다.
“널 처음 봤을 때 나랑 별 실력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거든? 넌 우승, 난 준우승이었으니까. <우리의 심장> 때도 영화나 방송은 편집을 잘해서 잘나온 거겠지-스스로 위안했지. 그러다 <악마의 재능>을 찍고 정신이 번쩍 들더라? 그래서 나도 죽어라고 노력했거든?”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근데 이번에 보고 또 놀랐어. 다들 내가 윤지민을 보고 제대로 못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가 진짜 놀란 건 너야.”
박아현은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왜 똑같이 노력하는데 난 네 발끝도 따라가질 못하지? 분명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넌 무슨 생각으로 연기하는 거야?”
이도원은 모두 비운 알류미늄 캔을 구기며 대답할 말을 찾았다. 그러나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내가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을까?’
늘 위만 봤고,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한편 박아현은 뜨거운 시선을 보내며 대답을 촉구하고 있었다.
이윽고, 이도원이 입을 열었다.
“남 신경 쓸 시간에 네 자신한테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박아현이 화를 내려는 순간.
이도원이 덧붙였다.
“내가 생각하는 연기는 누가 더 많은 걸 가지느냐가 아니라, 누가 내 안의 어떤 것들을 더 많이 끄집어내느냐. 그게 관건이니까.”
그는 말을 이었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연기를 하냐고? 난 남들 연기에 감탄하지만 질투하진 않아. 내게 연기의 성공기준은 ‘남들이 뭐라든, 내 스스로 얼마나 즐겁게 연기를 했느냐’에 달렸으니까.”
박아현은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느낌에 빠졌다. 그녀는 멍하니 이도원을 보았다.
‘남을 아예 신경 쓰지 않는다고?’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 납득은 됐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일 순 없었다.
지금껏 박아현의 원동력은 남들과의 비교였다. 많은 영화배우들을 보며 그들처럼 연기를 하고 싶었다. 주변 친구들을 보며 우월감에 젖었고 그들에게 따라잡히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했다. 자신보다 연기를 잘하는 상대를 봤을 때 느낀 열등감을 떠올리며 노력으로 승화시켰다.
그걸 무기 삼았던 박아현이었다.
이도원은 그녀에게 물었다.
“넌 연기가 즐거운 거야, 주목받는 게 즐거운 거야?”
박아현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에 이도원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셰익스피어를 향해 ‘슈퍼작가’라고 하지 않고, 미켈란젤로를 보고 ‘슈퍼화가’라고 하지 않아. 그런 용어들은 모조리 공치사일 뿐이야. 공치사를 바라면 연기를 잘하고 싶어지지.”
그는 쐐기를 박았다.
“연기를 잘하려 하지 말고 정확하게 하려고 노력해. 그게 네가 가진 능력을 모두 쓸 수 있는 밑거름일 테니까.”
*
박아현은 매니저를 불러서 들어갔다.
한편 이도원은 연습실에 남았다.
창밖으로 박아현의 뒷모습을 본 차지은이 눈을 게슴치레 뜨고 물었다.
“여자친구?”
“어디서 반말이야.”
살짝 나무란 이도원이 대답했다.
“알 거 없다. 그나저나 연기나 맞춰보자.”
“저 갈 거거든요. 전 집에도 안 가요?”
까칠했다.
이도원이 벙 찐 표정이 됐다.
차지은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오빠 필요할 때만 찾고. 참 이기적이시네요.”
그녀는 가방을 매더니 휑하니 연습실을 나갔다.
반면 이도원은 곧바로 신경을 꺼버렸다.
“그럼 한 번 시작해 볼까-?”
그는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평소라면 차지은의 태도에 신경을 썼겠지만 지금은 머릿속이 온통 뮤지컬에 대한 생각들뿐이었다. 박아현에게 조언 아닌 조언을 해주면서 스스로 느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래도 연기랑 똑같다.’
이도원은 피식피식 웃으며 제 머리통을 후려쳤다.
‘연기는 잘하려고 하면 망한다면서, 왜 노래는 기를 쓰고 잘하려고 해?’
실실거리는 그를 누가 봤다면 단단히 미친놈인지 오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도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풀고, 목을 풀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연기처럼.’
완벽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미완성이란 뜻이다. 완벽해지려하지 말고 끊임없이 즐기고 연구해야 한다. 완벽이란 결과물이 아닌, 끊임없는 탐구 속에서 저절로 얻게 되는 티끌만한 부산물일 뿐이다.
‘편하게, 나를 비워라. 긴장과 함께하라.’
연기를 하지 않는 것, 어떤 규칙도 없이 배역에 몰입하는 것. 이도원은 자유 속에 몸을 녹였다. 그러자 굳어진 신체가 액체처럼 흩어졌다. 물처럼 퍼진 의식이 기체가 되어 공기 중에 떠다녔다.
노래 소리는 정해진 곳을 잃고 퍼져나갔다.
‘꽉 채운다.’
자유로운 소리가 공간들을 조금씩 채워나갔다. 그 소리가 연습실을 가득 메운 순간, 이도원의 호흡과 소리는 그가 노래하는 공간과 하나가 됐다. 또한 의식은 애국심과 염원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날을 기약하며>를 부르며 눈물이 흘렀다.
이도원은 미처 느끼지 못한 현상이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바라보는 한 사람.
신용운이 문 앞에서 석상처럼 섰다.
‘이 세상에 연기의 천재는 없다. 명연기가 있을 뿐.’
그는 이 장면을 기억 속에 하나도 빠짐없이 담았다.
숨을 죽이고,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함께 느끼려하지 않아도 저절로 감정에 동화된다.
노래 소리가 잦아들 때, 신용운은 호랑이 같은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그는 이도원에게 박수를 보냈다.
짝, 짝, 짝, 짝-.
이도원은 미처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멍하니 서있었다.
그런 이도원을 향해 신용운이 말했다.
“명연기였다.”
그런 순간을 경험하면 연습할 때든 무대에서든 언제고 또다시 수면 위로 나온다.
매번 그 같은 연기를 할 수는 없지만 배우로서 한계가 넓어지는 것이다.
이도원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 선생님.”
그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속이 시원합니다.”
*
집에 도착한 이도원은 곯아떨어졌다.
이불 위에는 어머니가 관리하는 통장이 놓여 있었다.
광고비와 영화, 드라마 개런티로 번 돈은 어느새 십억을 넘겼다. 뿐만 아니라 백 프로덕션이 성장하면서 그 수혜로 불어난 재산은 두 배 가까이 됐다.
물론 이도원도, 가족들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묶어둔 재산이 많았기에 경제활동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다원이 강아지를 한 마리 입양해 왔다는 것 정도.
몰래 이도원의 방안에 잠입한 이다원은 그의 얼굴 위에 새로운 가족인 골든리트리버 새끼를 올려놨다.
강아지가 이도원의 얼굴을 핥았다.
일어날 법도 한데, 이도원은 여전히 꿈나라였다.
“피곤하긴 피곤한가보네.”
짓궂은 장난을 치려던 이다원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강아지를 품에 안았다.
그때 이도원이 잠꼬대를 했다.
‘응?’
귀를 기울이던 이다원은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노래를 흥얼거리는 건지 대사를 하는 건지……. 연기가 그렇게 좋을까?”
그녀는 거실로 나와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아무래도 아들은 미친 게 분명해요.”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왜 그러니?”
한숨을 내쉰 이다원이 대답했다.
“글쎄, 자면서도 중얼중얼 연기를 하더라니까요?”
어머니가 포개던 빨래 감을 그녀에게 집어던졌다.
“이 계집애가! 동생이 얼마나 고생스러우면 그러겠어?”
“어어? 우리 아기 다쳐요, 우리 아기 다쳐!”
이다원이 강아지를 품에 안으며 방정을 떨었다.
실랑이를 하던 이다원은 어머니 앞에 앉으며 말했다.
“잠꼬대로 연기하면서 실실 웃더라니까요? 아주 징그러워 죽겠어.”
어머니가 게슴츠레하게 눈을 치켜떴다.
“그러니까 성공하는 거지. 승승장구하잖아?”
이도원 편을 든 어머니는 방문을 바라보며 남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그래도, 과유불급이라고 했는데…….’
부모의 마음이란 그렇다.
놀아도 걱정, 열심히 해도 걱정.
어머니는 너무 이른 나이부터 큰돈을 버는 아들이 마음 한구석으로 적잖이 신경 쓰였다.
< Ready (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