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eady (6) >
“소신이 살던 곳은 바닷가가 보이는 산 위의 작은 초가집입니다. 수평선을 활활 태우는 듯한 일출(日出) 때 즈음 일어나 지게를 짊어지죠. 바다 저 끝에부터 붉은 빛이 차츰차츰 밀려옵니다. 아침바람에 실린 비린내가 정신을 깨우죠. 그때쯤이면 등허리에 지게를 멘 지게꾼들이 산을 들락 입니다. 산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동안 산 등성이를 어루만지던 따스한 태양이 밤이 되면 바다 속으로 소리 없이 떨어지고요. 일몰(日沒)이죠. 가족들이 한 상에 모여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며 두런두런 이야길 나눕니다. 하루 종일 흘린 땀이 달콤한 양식으로 분해 밥상 위에 놓입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늑대 울음을 정겨운 가락으로 삼아 노래를 부르고, 어린 동생들은 안뜰을 뛰어다니죠. 풀밭에 드러누워 별을 보며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요.”
이도원의 눈동자가 상상 속에 아련히 잠겼다.
정윤욱 감독은 놀란 눈을 치켜떴다.
다른 배우들의 표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기가 작가야?’
이도원이 이런 세밀한 묘사가 섞인 대사를 지어낼 수 있었던 것은 배역에 대한 무한한 상상과 몰입이 만들어낸 걸과였다.
이도원은 대본 분석을 할 때부터 <투사>에서 자신이 연기하게 될 ‘조영선’의 가족관계는 물론, 영화에선 등장하지 않는 그들의 면면과 살던 곳의 모습까지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렸다.
상대역인 안유성은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이도원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은은한 미소를 띠며 답했다.
“평화롭고 행복한 곳이로군. 그대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
이도원이 꿈에서 깬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분부만 하시옵소서.”
“그대가 봐온 삶을 이 조선의 모든 이들이 누릴 수 있도록 해줬으면 좋겠다. 썩은 권신들을 몰아내고 그들의 권력을 빼앗아 백성들에게 돌려줘. 그대에게 그만한 권한을 주겠다. 이 영예로운 부탁을 거절하진 않겠지?”
“전하…!”
이도원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소신에게 어찌 그런 분부를 내리시옵니까. 감당키 어렵사옵니다. 부디 물러주시옵소서. 소신이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정치는 권신들의 몫이 아니옵니까?”
“그래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안유성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확고했다.
이도원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세자 저하께서 계시지 않사옵니까?”
“세자는 도덕적인 인물이 못 돼. 탐욕스럽고 영악하지. 오랫동안 곁에서 보아왔던 그대도 알지 않나?”
이도원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입술을 떨며, 그가 말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옵소서.”
“일몰 때까지 답을 내리도록.”
안유성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그대가 내 아들이면 좋았으련만… 아들처럼 손을 잡아주게.”
대사가 그치자 정적이 흘렀다.
배우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내 박수갈채가 쏟아지자 안유성이 말했다.
“도원이라고 했지? 연기하는 게 예사롭지 않아.”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도원이 대답했다.
정윤욱 감독은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손뼉을 치며 말했다.
“훌륭한 연기였습니다. 여세를 몰아서 계속하죠.”
*
두 시간이 다 돼서야 대본 리딩을 끝낸 이도원은 진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쟁쟁한 선배들 틈에서 연기를 하니 심력 소모가 전에 비해 컸다.
이도원은 선배들이 모두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기다리며 인사했다. 그 결과 이도원과 정성우, 윤지민, 조연 배우 둘은 마지막에 탑승했다.
“지민 씨.”
정성우가 윤지민을 불렀다.
그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네?”
“정 감독님과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영화에까지 지장은 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
윤지민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선배가 걱정하는 게 어떤 상황인 줄은 알겠어요. 하지만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로 과한 조언인 것 같은데요.”
성별이 다른 남녀배우 간에는 암묵적인 불문율이 있었다.
이도원은 정성우가 걱정됐다.
‘앞으로 어떤 배역으로 마주할지도 모르는데… 대개 남자 배우가 분량도 많고, 영향력도 세지만.’
간섭하기 시작하면 서로가 피곤해진다. 같은 연예계에서 활동을 하는 배우들이 괜히 남녀 간에 선을 두는 것이 아니었다.
이도원도 알고 있는 사실을 정성우가 모를리 없었다. 그러나 정성우는 괘씸한 마음이 더 컸다.
“좀 뜨나 싶으니까 선배 말이 우습나?”
말투가 돌변했다.
그제야 윤지민은 꼬랑지를 내렸다.
“알겠어요. 죄송해요, 성우 선배. 민감한 부분이기도 하고, 요새 스트레스를 받던 부분이라 제가 도를 넘었네요.”
정성우 역시 더는 다그치지 않았다.
“아무튼 내 말은 명심해요.”
띵-엘리베이터가 일 층에 도착했다.
정성우는 휙 나가버렸다.
이도원은 내리기 전 윤지민의 표정을 똑똑히 봤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정성우의 등을 노려보고 있었다.
‘단단히 뿔 낫군.’
이도원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별 신경 쓰지 않고 정문으로 나갔다.
정성우의 밴과 이도원의 밴이 꼬리를 물고 서있었다.
정성우가 차에 오르며 이도원에게 손을 흔들었다.
“조만간 보자.”
“들어가십시오, 선배님.”
이도원은 구십 도로 인사하고 제자리에 서서 정성우를 보냈다.
‘이런 점은 죽었다 깨도 달라지지 않는군.’
타임 슬립 전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연극물, 방송물을 모두 먹었던 이도원이었다. 이 바닥에서 허례허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호의는 언제든 칼날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다음 날 바로 소문이 돌겠지.’
한 순간 기분 나쁜 티를 내도 그 시간부로 버릇없는 후배로 낙인찍히는 곳이었다.
선배들은 말한다. ‘배우가 기분 나쁘다고 표정 한 번 찌푸리면 팬들은 바로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 한다’고. 즉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이 팬들의 반응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선배배우의 안배라는 의미였다.
‘핑계 한 번 좋다.’
이도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밴에 올랐다.
오준식은 백미러로 그를 보고 피식 웃었다.
“완전히 얼굴이 맛이 갔네.”
“말도 마라.”
이도원은 시트 깊숙이 몸을 묻었다.
“한 일 년 치 인사는 다 한 것 같다. 목 빠지는 줄 알았어.”
“다 그런 거지 뭐. 박아현은 먼저 나가던데?”
“응. 아마도 윤지민으로 확정된 분위기야.”
“울더라.”
오준식은 뒷좌석에 두고 간 이도원의 휴대폰을 눈짓하며 말했다.
“문자 온 것 같던데 확인해 봐. 박아현이다에 내 팔 한 짝 걸지.”
“그 팔, 간수 잘해라. 내거니까.”
이도원은 휴대폰 액정을 확인하고 입맛을 다셨다.
오준식의 추측대로 박아현이었던 것이다.
이도원은 은근슬쩍 주제를 돌렸다.
“성연이 누나는 어디 갔나?”
괜한 스타일리스트 찾기에 나섰다.
오준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리딩이니까 시장조사 갔지. 그 누나, 요새 네가 촬영이 없어서 다른 쪽으로 바쁘다. 차라리 촬영이라도 있으면 대기하면서 쉬기라도 하지. 네가 까다롭게 구는 것도 아니고 편하다고 좋아했는데.”
“전에는 누구 스타일리스트였다고?”
“글쎄…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태여 알 필요 없는 것이다.
“오늘 따로 스케줄 없지?”
“응. 리딩이 언제 끝날지 몰라서 비워뒀지.”
“연습실로 가자.”
“연습실?”
“대학로.”
대학로 연습실은 뮤지컬 <영웅>의 연습실을 가리켰다.
오준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까지 대본 읽고 또 연습하러 가?”
“응.”
이도원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박아현의 문자 내용 전문을 확인했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아무래도 충격이 컸을 것이다.
이도원이 답장을 했다.
-왜?
곧바로 문자가 왔다.
-술 한 잔 사줘.
-몇 시?
-여덟 시에 스케줄 끝나.
이도원은 잠깐 생각하다 답장을 보냈다.
-아홉시, 대학로.
그는 오준식에게 말했다.
“나 연습실에 내려주고 오늘은 퇴근해. 신용운아카데미 가서 연기 연습 하든지.”
“얼씨구, 웬 일?”
“저녁 약속 잡혀서.”
“누구? 박아현?”
“응.”
이도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충격이 큰가 보네.”
“거 봐. 내가 크다고 했잖아.”
오준식이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위로가 필요할 것 같더라고. 그래도 스캔들은 조심해라. 오픈된 곳 가지 말고, 같이 움직이지 말고.”
오준식은 엄마처럼 잔소리를 했다.
그사이 밴은 대학로로 갔다. 이도원이 도착해서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을 땐, ‘안중근’ 역으로 더블 캐스팅 된 정태화와 ‘링링’ 역의 차지은이 연습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안녕.”
이도원이 정태화와 차지은에게 인사했다.
“어? 오늘 리딩 있다더니, 오셨네요?”
차지은이 반갑게 말했다.
정태화도 고개를 끄덕였다.
“왔어?”
“예. 다른 선배들은 오늘도 안 보이네요.”
“다들 연극 하나 씩 하고 있어서 바빠. 그쪽 연습도 나가야하니까.”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정태화가 물었다.
“노래 많이 늘었다고?”
“아직 턱 없이 부족합니다.”
이도원이 겸손하게 대답했다.
정태화는 팔짱을 끼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한 번 해봐. 봐줄게.”
“아직 목도 안 풀었지만… 봐주신다면 또 안 할 수가 없죠.”
이도원은 스트레칭을 마무리 짓고 정태화 앞에 섰다.
제자리에서 뛰며 신체의 긴장을 한 번 털어낸 이도원은 호흡을 들이마셨다.
“스으으읍.”
이도원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갑니다.”
정태화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들어와라.”
이내 이도원이 <영웅>의 <그날을 기약하며>를 시작했다.
“이천만 동포에-깊은 한숨을 대신하듯-불어오는-이 바-람.”
굵직하되 감미로운 목소리가 흔들림 없이 이어졌다.
“잠자던 내-영혼. 지친 나에게 스쳐가며-말하네. 이제는 떠-나가야 할 시간. 그것-은 너의 길-.”
정태화의 동공에 이채가 감돌았다.
‘확 늘었어? 해낼 놈이라는 선생님 말씀이 이런 뜻이었나.’
그 속내를 아랑곳 않고 이도원이 불렀다.
“험난한 시련을 겪을 수 밖-에 없겠지. 머나-먼 타국, 땅에서-.”
다음은 다른 배역의 파트였고, 정태화가 입을 열었다.
그는 이도원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성량으로 압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내게-주어진 운명.”
깊은 호흡에서 나오는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계속됐다.
“잊을 수 없는 건-빼앗긴 조국, 신용하는 우리의 부모형제-.”
이도원은 팔에 소름이 우수수 돋았다.
‘묻히면 안 돼.’
굳게 마음먹은 이도원은 호흡을 정리하고 노래를 시작했다.
동시에 정태화가 미성으로 바꾸며 목소리를 얹었다.
“우리가 가는 길-기약 없는 내일과 두려운 미래. 하지만 포-기 할 수는 없어-. 우리-후손 위-해-.”
처음에는 삐걱대던 이중창이 점점 본궤도로 올랐다.
‘단번에…….’
이도원은 한 번도 맞춰본 적 없는 자신과 완벽에 가까운 호흡을 보여주는 정태화를 보고 놀랐다. 그러나 금세 노래에 집중했다.
“시간이 흐르면 역사 속에서-사라져-. 이-름도 없겠지만-. 나 오늘-이 순간, 후회 없이, 살고 싶어-.”
음이 올라가며 연습실을 꽉 채웠다.
“그날을 위-하여! 우리 모두 어깨를 감싸며-말하네. 힘을 내-자고-.“
클라이맥스였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착착 감겼다.
바람이여 도우-소서. 우리에게 힘을 주오. 기억되어 있는 그 날을 위-해-. 자, 우리들의 외침-세상이 들으리라-. 민족의 울음, 뜨거운 열-정!”
정태화는 발을 뺐다.
순간 이도원이 마지막 소절을 불렀다.
“사랑하는 조국을-위-해-!”
노래 소리가 뚝 멎자, 차지은이 박수를 쳤다.
“와! 오빠들 완전 멋있어요.”
정태화는 감탄을 생략하고 이도원에게 말했다.
“이건 뮤지컬이야. 음원 녹음이 아니다. 중간중간 집중이 깨지더군. 표정에도 신경쓰지 못하고.”
“네.”
이도원은 순순히 인정했다.
‘선배가 너무 잘하니까 놀라서 그런 거라고요.’
일순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말 그대로 변명일 뿐이다.
카메라 앞에서와는 달리 모든 무대는 단 한 번뿐이다.
즉, 무대에선 실수란 개념 자체가 없다.
이도원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다시 해보겠습니다.”
어느덧 땀이 흐르고 있었다.
피식 웃은 정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야.’
그는 큰 결심을 하고 말했다.
“몇 번이고 해봐라. 이대로 서서 시원하게 까주마.”
말은 거칠었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따뜻했다.
최고의 뮤지컬 배우인 정태화가 몇 번이고 봐준다는 말은 뮤지컬 생 초짜인 이도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다.
< Ready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