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eady (5) >
“아바마마는 장군을 총애해요. 지나칠 만큼!”
윤지민은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도원은 그녀의 등장에 놀란 낯빛을 지우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많은 변화가 있었죠.”
이번에는 박아현의 차례였다.
박아현은 뜨거운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하지만 당신의 감정까지, 모든 것이 변한 건 아니겠죠?”
이도원이 대답하지 않고 외면했다.
‘민혜공주’ 역할을 두 여배우가 번갈아 대사를 쳤다. 그러나 이도원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호흡을 맞췄다.
다시 윤지민이 외쳤다.
“잠깐!”
그녀는 사이를 두고, 대사를 이어나갔다.
“얼굴을 보여줘요.”
이도원에 대본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윤지민은 설레는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그 미묘한 감정을 눈빛과 표정만으로 잘 나타내고 있었다.
‘아주 디테일한데. 작은 변화까지 놓치지 않고 있어.’
이도원은 내심 감탄했다.
잠시 바라보던 윤지민이 이어 말했다.
“심란해 보이는군요.”
이도원은 담담한 척 굳은 표정을 한 겹 둘렀다. 그는 내면의 참담한 얼굴을 살짝 드러낸 채 대답했다.
“병사들을 잃었습니다.”
다음으로 박아현이 물었다.
“아바마마께서 뭘 바라실까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도원은 느낄 수 있었다.
‘말렸군.’
승부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박아현의 음성에선 ‘민혜공주’로서의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가 내포하고 있는 감정은 가슴 깊이 연모하는 남자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경쟁자인 윤지민을 향한 당황스럽고 복잡한 심경이었다.
‘캐릭터에 전혀 몰입하지 못하고 있어. 몸과 마음이 모두 현실에 머물러 있다.’
이도원은 내색하지 않고 자신이 할 몫을 다했다.
“소인이 귀향할 때까지 건강하길 바라주시겠지요.”
이미 승기를 잡은 윤지민은 여유롭게 몰입하며 대답했다.
“거짓말. 장군은 거짓말과 어울리지 않아요.”
이도원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마마께는 한 번도 거짓말이 먹히질 않는군요.”
“장군은 제게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장군과 어울리지도 않고요. 장군은 소녀가 전하의 뜻을 거스르고 세자의 편에 설 거라고 생각하나요?”
원래는 박아현이 대사를 칠 부분이었지만 윤지민이 가로챘다.
박아현은 입을 열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딱히 재제하는 신호가 없었기에 이도원은 흔들리지 않고 다음 대사를 했다.
“마마께서는 살아남는 재능이 남다르십니다. 전하의 뜻을 거스르진 않겠지만 세자 저하 역시 지지하시겠지요.”
그때였다.
정윤욱 감독이 리딩을 중단했다.
“다른 분들은 잠시 휴식하시고, 지민 씨와 아현 씨는 잠깐 남아서 이야기 좀 나누시죠.”
그가 할 이야기는 자명했다. 윤지민이 지시를 따르지 않고 박아현의 순서를 빼앗은 부분에 대해 주의를 줄 터였다. 정윤욱 감독은 암묵적으로 박아현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아현의 표정을 본 이도원은 확신했다.
‘이미 늦었어.’
그 전부터 불안정한 심리상태로 연기에 임하던 박아현이었다. 최고의 컨디션을 발휘해도 상대가 될까 말까 한 판에 자신의 페이스를 완전히 잃고 상대에게 휘말렸다.
이도원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비롯한 배우들이 줄줄이 리딩 룸을 빠져나가 자리를 피해주었다.
‘왕세자’ 역의 정성우가 뒤에서 이도원을 불렀다.
“도원 씨. 커피나 한 잔 할까?”
“아! 선배님.”
이도원은 사양하지 않고 답했다.
“좋습니다.”
“일 층에 커피숍이 있으니까 그리로 가지.”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커피숍으로 갔다.
정성우가 이도원의 것까지 계산한 뒤 마주앉아 말했다.
“두 여자 때문에 몰입하는 데 불편하지? 상대역도 계속 바뀌고.”
“아닙니다. 제 배역에만 집중하면 되는 걸요.”
이도원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정성우는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도원 씨 정도 되면 그런 상황에는 휘둘리지 않겠지.”
그는 관자놀이를 검지를 구부려 톡톡 치며 말했다.
“연기란 게 이 멘탈 싸움이거든.”
“그렇죠.”
이도원이 순순히 수긍했다.
정성우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박아현이 충격 좀 받았겠어. 윤지민 그 여우 같은 계집애, 기를 완전히 죽여놓던데.”
“선배님.”
이도원이 그를 부른 뒤 물었다.
“섭외가 진행되고 있을 때부터 지민 선배랑 정윤욱 감독님 사이에 트러블이 있었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혹시 무슨 일인지 아세요?”
정성우는 말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난처한 표정으로 빤히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하긴, 너도 작품에 들어가는 배우니까 알 권리가 있겠지.”
“예.”
“내가 알기로는 윤지민도 이 영화를 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니야. 스케줄이 되는 배우도 윤지민 밖에 없을 뿐더러, 윤지민 마케팅 효과가 확실하니까, 투자자들이 윤지민네 회사랑 얘기해서 밀어붙이는 거지. 윤지민도 회사에선 영향력이 있지만 투자사들이 줄줄이 껴있으니 목소리를 내기가 곤란한 거고. 그럼 어째서 윤지민이 이 영화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느냐?”
정성우는 다리를 꼬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바닥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실이니까 숨길 것도 없다. 윤지민이 신인 때 뜬 영화가 바로 정윤욱 감독 작품이거든. 그 당시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돌고 있었어. 뜨려고 성 접대를 했다느니 말이 많았지만 표면적으로는 두 사람이 잠깐 만났다는 썰이 있지.”
여기까진 이도원도 어느 정도 짐작했던 범위 안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윤지민이 문제를 일으킬 사유가 안 된다.
“불편할 만도 하군요. 그래도 <투사> 같은 영화에 주연을 맡길 기회를 걷어찰 정도의 이유는 아니지 않나요?”
정성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이상 아는 건 없지만 확실한 건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거야. 참, 그리고 참고로 선배들 앞에선 지민이 까지 마라. 난 정윤욱 감독님을 좋아하고, 되려 윤지민을 별로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선배들 생각은 정 반대니까. 윤지민이 신인 때 정윤욱 감독이 접대를 요구했다고 질질 짜면서 사발 좀 푼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좀 그래.”
아무것도 확실한 건 없었다. 이 바닥 일이 대부분 아리송하긴 하다. 그렇지만 이도원은 영 찜찜했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두 사람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영화 하나를 그냥 말아먹는다고?“
전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럴만한 사람들이면 정윤욱 감독이나 윤지민 모두 그 자리까지 올라가지 못했을 터였다. 프로들이 일을 할 때만큼은 얼마나 이성적인지 이도원은 잘 알고 있었다.
의심스럽다고 해서 더 파고들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복잡하네요.”
그 말에 정성우가 빙긋 웃었다.
“원래 이쪽 일이 좀 그래. 신경 끄고 네 할 일에나 집중하는 게 답이다. 괜히 남 일에 신경써봐야 너만 손해니까 명심해. 이 바닥에서 어중간한 오지랖은 금물이야.”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선배님. 그리고 커피 감사히 마셨습니다.”
그는 센스 있게 테이블의 빨대 껍질을 치우고 먼저 엘리베이터를 잡아두었다.
두 사람이 리딩 룸으로 돌아갔을 땐 대부분 배우들이 다시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이도원에게 윙크를 한 정성우가 자리로 가서 앉았다.
이도원 역시 자리에 앉았다.
끝으로 정윤욱 감독이 입을 열었다.
“아현 씨는 스캐줄이 있어 먼저 돌아갔습니다. ‘민혜공주’ 역은 지민 씨가 계속해 하겠습니다. 현재 더블 캐스팅 상태이기 때문에 ‘민혜공주’ 배역으로 결정된 배우에게는 차후 따로 통보가 갈 겁니다.”
그러고 보니 박아현이 보이질 않았다.
‘윗선들끼리 얘기가 끝났나보군.’
말이 나중에 결과를 통보한다는 거지, 박아현은 떨어지고 윤지민이 발탁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수선한 장내를 훑은 정윤욱 감독이 담담하게 말했다.
“다음 대사, 지민 씨부터 계속하겠습니다.”
그 말에 따라 고개를 끄덕인 윤지민은 ‘민혜공주’ 역의 대사를 쳤다.
“멈춰요. 다시 만난 게 그렇게 거북해요?”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이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전투 때문에 지쳤을 뿐입니다.”
윤지민은 나직이 한숨을 쉬며 화제를 돌렸다.
“아바마마가 약해지셔서 마음이 아프겠군요.”
그녀는 이도원의 어깨를 어루만지듯 대본을 손으로 훑어 내리며 말했다.
“세자는 왕위를 물려받길 원해요. 전하께 그랬듯, 세자에게도 충성할 거죠?”
이도원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모호하게 답했다.
“…소인은 언제나 이 나라 조선을 섬깁니다.”
정윤욱 감독은 두 사람의 호흡이 제법 잘 맞자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으로 넘어갔다.
“다음, 도원 씨 독백. 전투에 지친 장군의 모습을 보여줍시다.”
이도원은 대본을 넘겼다. 그곳에는 ‘조영선’이 홀로 막사에서 조상들께 약식으로 제를 올리며 하는 독백이 쓰여 있었다.
한편 지금 이도원은 여러 외부적인 요인들로 생각할 것이 많았다. 리딩이었으니 망정이지 현장이었다면 지금 상태로 훌륭한 연기를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집중하자.’
이도원은 눈을 스윽 감았다 떴다.
진지한 표정과 우수에 젖은 눈빛.
불현듯 이도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자연스레 자리에 앉은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느낌이 바뀌었어.’
가장 먼저 느낀 건 윤지민이었다.
정성우 역시 흥미로운 표정이 됐다.
‘보여줄 게 남았다, 이거지?’
그 순간 이도원이 입을 열어 대사를 뱉었다.
“조상님, 저를 이끌어주소서.”
고개가 살짝 들렸다.
“아버지, 가족을 지켜주세요.”
이도원은 스르륵 눈을 감으며 가슴에 손을 올렸다.
미간에 주름이 잡혔고 표정은 완전히 몰입됐다.
“어머니께 곧 만나러 간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는 다시 한 번 바랬다.
“조상님. 제게 가르치신 명예를 지키며 살게 해주소서.”
절제돼 있지만 감성을 자극하는 묵직함이 있었다.
‘사람 잘 봤어.’
정성우는 흡족하게 웃었다.
윤지민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편 다른 배우들도 이채로운 눈빛으로 이도원을 주목하고 있었고, 그건 정윤욱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잘 됐군. 이제부터 감정이 깊게 들어가는 씬인데, 압도적인 대선배의 호흡을 따라갈 수 있을지… 실력 좀 볼까?’
대본을 넘긴 정윤욱 감독이 주문했다.
“다음은 왕과 장군의 대화입니다. 안유성 선생님과 도원 씨 호흡을 한 번 맞춰보죠.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존재만으로도 묵직한 카리스마를 풍기는 이 자리의 최고참. 안유성은 마치 원래 왕의 삶을 살아온 인물처럼 자연스럽게 대사를 말했다.
“곁에 오너라… 어서.”
“전하.”
이도원이 복잡한 감정을 담고 안유성을 불렀다.
노쇠한 왕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정이 깃들었다.
안유성이 온화한 미소를 베어 물고 미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지쳤어… 과인은 그대를 아들처럼 여기지.”
그는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뭐든 이야기 해 보아라. 남자답게 터놓고.”
이도원은 감정을 숨기며 본분에 충실한 말투로 답했다.
“장병 오천 명이 동사 직전이옵니다. 삼 천 명은 부상 이옵고 이 천여 명이 죽음을 앞두고 있사옵니다. 그들의 죽음이 헛되었다고 믿고 싶지 않사옵니다.”
그가 고개를 들며 안유성을 직시했다.
“그들은 조선을 위해 싸웠고 전하를 위해 죽사옵니다. 부디 나약해지지 마옵소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뜨거운 눈빛이 안유성을 향했다.
안유성이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
“난 이제 곧 죽는다.”
그는 이도원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과인은 진정으로 부국강병 한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출발부터 불가능했던 나약한 꿈일 뿐이었지. 모든 것이 한 순간의 꿈이야. 밖으로 아무리 멀리까지 영토를 넓힌다고 해도, 지금도 내부에선 악취 나는 정치가 계속되고 있지 않나?”
안유성은 자신의 일평생 삶을 송두리째 내다버리는 말을 하면서도 결코 괴로워 보이지 않았다.
이도원은 속으로 감탄했다.
‘대부분 저같은 대본을 받으면 괴로운 마음을 표현하겠지. 하지만 삶의 끝에서 현명한 인간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모든 걸 내려놓는 것일까.’
오히려 홀가분하게 자신의 인생이 덧없음을 인정하며 노쇠한 왕의 모습을 설득한 안유성의 애드리브가 이어졌다.
“사람은 누구나 마지막을 앞두면 지난 삶을 돌아보게 되지. 후세에 난 어떻게 기억될까? 위대한 정복자? 피로 얼룩진 폭군? 용맹한 투사? 아니, 아니야.”
고개를 흔든 안유성이 눈을 반짝 빛내며 이도원에게 물었다.
“그대 이야기를 해보라. 우리끼리니까 편하게 이야기를 해봐. 그대의 고향은 어떻지? 그대가 사랑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은은한 미소를 지은 안유성은 마치 아이와 같은 표정이었다.
대본에는 없는 장면이고 대사다.
안유성은 지금, 이도원의 역량을 시험하고 있었다. 애드리브를 던지면서 얼마나 받아칠 수 있을지 궁금해 하며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이도원은 시험대 위에서도 긴장하지 않았다.
이곳은 리딩 룸이 아닌 왕의 처소로 지어진 군막이었다.
차디찬 전장에서도 유일하게 포근하고 따뜻한 곳이다.
이도원의 심상으로 주위의 세세한 풍경이 떠올랐다.
조금 더울 정도의 따스한 불빛, 눅눅한 노인의 향기, 지친 피로감과 어깨를 누르는 갑옷의 무게, 비단이불의 부드러운 촉감까지 고스란히 느끼며…….
평생을 충성해 온 왕과 편안히 대화를 나누는 충신처럼.
아버지 같이 모시고 따르는 왕을 대하는 아들과 같은 자세로.
이도원이 말했다.
< Ready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