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eady (4) >
10월 10일.
영화 <투사>의 배급사 <청출어람> 본사.
대본 리딩 현장에 도착한 이도원과 오준식은 화장실을 들렀다. 리딩에 들어가면 두 시간 이상을 꼼짝없이 리딩 룸에 틀어박혀야 하기 때문이다.
“여긴 무슨 화장실이 우리 집 두 배만 하네.”
오준식이 두리번거리며 능청스레 감탄했다.
한편 손을 닦은 이도원은 거울을 통해 상태를 체크했다. 카메라 마사지의 효과인지 그간 분위기가 꽤 달라져 있었다. 그 점을 새삼스레 느낀 이도원이 씩 웃어보았다.
오준식이 손을 씻으며 그를 힐끔거렸다.
“그렇게 폼 안 재도 충분히 잘생겼어.”
“고맙다.”
이도원은 핸드타월로 물기를 닦고 화장실에서 나갔다.
그때 우연히 여자화장실에서 나오는 박아현과 마주쳤다.
그녀가 할짝 웃으며 아는 체를 했다.
“우와. 오랜만이네?”
함께 <악마의 재능> 무대 인사를 다닌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았지만 이도원은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잘 지냈고?”
“그럼! 이번 영화에서도 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완전 반갑다야. 감독님이 <악마의 재능> 보고 섭외명단을 올리셨나봐.”
박아현은 아직 캐스팅이 확정된 상황이 아니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모든 내막을 알고 박아현을 추천까지 한 이도원은 모른 척 맞장구를 쳐주었다.
“나도 네가 들어온다고 해서 꽤 놀랐다.”
이도원은 그 순간 낯선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미모의 한 여배우가 그들을 뚫어져라 직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누군지는 모두가 짐작할 수 있었다.
‘윤지민.’
섭외 문제로 떠들썩한 여배우, 윤지민은 금 새 표정을 바꾸었다. 그녀는 당찬 미소를 짓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반가워요. <투사> 배우들이죠?”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윤지민은 고개를 돌려 박아현을 바라보았다.
“아, 그쪽은 아닌가?”
노골적인 언사에 박아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단 한 마디로 박아현에게 모욕감을 안겨준 윤지민은 이도원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무튼 반가워요. 앞으로 잘 부탁하고요.”
눈웃음을 친 윤지민이 먼저 리딩 룸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가 문 앞에서 했던 말을 자리의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발칙한 것.”
이도원은 무심코 박아현의 표정을 보았다.
박아현은 수치심으로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를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쉰 이도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시작부터 일촉즉발이네.’
박아현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말했다.
“나 먼저 들어갈게.”
그녀는 성큼성큼 리딩 룸으로 들어갔다.
발걸음에 분노가 실려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며 곁에 있던 오준식이 물었다.
“설마 싸우려는 건 아니겠지? 걸음걸이가 딱 한판 할 기세인데.”
“설마.”
고개를 저은 이도원은 실실 웃고 있는 오준식의 표정을 발견했다.
“재미있냐?”
“원래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다고 하잖아. 뭐, 좋은 일은 아니지만 어차피 오늘 내에는 여배우가 결정될 테니까 촬영에는 지장없지 않을까?”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박아현. 괜히 윤지민한테 찍히면 골치 아플 텐데…….”
이도원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윤지민은 청순한 미모와 어울리는 천사 같은 행실로 잘 알려져 있었다.
반면 알 사람은 모두 안다. 그녀가 얼마나 독한 구석이 있는지, 여우 짓을 즐겨하는지.
‘함께 작업하긴 박아현이 편하겠지만.’
내심 바란 이도원은 실소했다.
박아현이 윤지민을 꺾고 캐스팅이 될 확률?
윤지민과 사이가 나쁜 정윤욱 감독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길뿐이다. 경험이나 연기력 면에서는 애초에 비교가 안 될 만큼 윤지민은 뛰어난 연기자였다.
‘그런 여배우가 대체 왜 <투사>에서만 유독 연기를 못했지?’
다시 생각해도 선듯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도원은 답 안 나오는 고민을 멈추고 리딩 룸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기라성 같은 선배 배우들에게 인사를 하며 지정석으로 가서 앉았다.
다행히 윤지민과 박아현은 직접 부딪히지 않았는지 서로에게 신경을 끈 채 대본을 보고 있었다.
머지않아, 정윤욱 감독을 비롯해 배급사 대표와 투자단 대표가 함께 들어섰다.
세 사람을 본 순간 이도원은 직감했다.
‘박아현 섭외는 힘들어지겠군.’
그는 박아현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감독이 단독적으로 리딩을 주관하지 않는다면 결국 윤지민이 캐스팅 될 확률이 높았다.
미묘한 기류가 오가는 사이 민머리가 인상적인 정윤욱 감독이 말문을 열었다.
“모두들 이 자리에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갑고요. 여러 선배 배우들, 또 능력 있는 신인들을 모시게 돼서 영광입니다. 저와 함께 이번 리딩을 주관하실 두 분은 각각 배급사 <청출어람>의 대표님과 우리 영화 <투사> 투자단의 대표님이십니다.”
자연스럽게 <청출어람> 대표가 바톤을 넘겨받았다.
“저는 배급사 <청출어람>의 대표인 강재우 이삽니다. <투사>가 프리프로덕션 단계부터 큰 자금과 노력이 들어간 기대작이니만큼 이 자리에 직접 오게 됐습니다.”
투자단 대표 역시 짤막하게 말했다.
“모두 좋은 연기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대본 리딩은 대부분 긴장감을 동반할 수밖에 없지만 그건 대본을 읽을 때뿐, 나머지 시간은 대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그에 비해 <투사>의 분위기는 조금 어색했다.
그때 주위를 둘러보던 정윤욱 감독이 말했다.
“먼저 주인공 ‘조영선’ 역의 도원 씨부터 소개하죠.”
고개를 살짝 숙인 이도원이 일어나 말했다.
“‘조영선’ 역할을 연기하게 된 이도원입니다. 여기 계신 많은 선배님들의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정윤욱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명의 여배우를 보았다.
윤지민과 박아현이다.
“두 분은 좀 특수한 상황으로 모시게 됐습니다. 두 분, 소개해주시죠.”
윤지민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님들 안녕하세요. 허구인물인 ‘민혜공주’ 역의 윤지민이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모두 박수를 치는 가운데 다른 작품에서 안면이 있었던 선배들은 휘파람을 부르며 환영했다.
반면 박아현이 일어났을 땐 주변 분위기가 심드렁했다.
이도원은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가수활동 해서 인기 좀 얻었다고 선배 배역이나 탐내는 싸가지 없는 신인.’
모두들 그런 평을 하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박아현은 꿋꿋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얼마 전까지 가수활동을 하다 이번에 연기활동을 시작한 신인 박아현입니다. 원래 연기로 시작했고 계속 연기를 하고 싶었어요. 많은 지도 부탁드립니다.”
누구도 입 밖으로 뱉진 않았지만 무시하는 눈치였다.
대충 박수를 치며 그들은 속으로 생각할 것이다.
‘어차피 곧 안 보게 될 텐데.’
대부분이 윤지민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한편 박아현은 울상을 애써 숨기며 도로 앉았다.
이어서 주조연배우들이 배역과 이름, 소감 등을 말하며 한 사람 씩 자기소개를 마쳤다. 서로를 파악하는 시간이 끝나자 정윤욱 감독이 진도를 나갔다.
“지민 씨와 아현 씨는 같은 캐릭터니까 번갈아 가며 대본의 대사를 치면 됩니다. 나머지 분들은 알아서 잘해주시면 되고요. 그럼 시작하죠.”
<투사>의 배경은 조선시대였다. 영화 전체가 픽션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조선은 여진족을 몰아내고 두만강을 넘어 북벌에 성공한다. 이때의 총지휘관이 바로 이도원이 연기하는 ‘조영선’이다.
첫 장면은 몹 씬(mob scene; 군중 장면)으로 조선군 진영에서 시작된다. 첫 신호탄은 이도원의 독백이었다.
그는 대본을 보며, 굵직한 톤으로 대사를 쳤다.
“이 주 뒤면 난… 남쪽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있을 것이다. 제군도 각자의 소망이 깊으면 이루어질 것이다.”
깊은 호흡을 장착한 목소리가 장내를 가득 채웠다.
“철통같이 뭉쳐 나를 따르라. 혹시 말을 타고 가다가… 시원한 바람이 부는 들판에서 혼자 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
이도원은 주위를 둘러보며 씩 웃었다.
“그곳은 바로 극락이며 제군은 이미 죽은 것이다.”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본상 (부관들, 웃는다)는 장면설명을 다른 배우들이 대신 웃으며 센스 있게 대체한 것이다.
이도원은 자연스럽게 대사를 이어나갔다.
“살아생전 우리의 명예는 죽은 뒤에도 영원할 것이다!”
그 음성에는 울림이 있었다.
단 한 번의 독백만으로 자리의 모든 배우들은 이도원이 여간 내기가 아님을 직감했다.
리딩 전 일각에선 이도원을 활동 경력도 짧을 뿐더러 근래 두각을 나타낸 풋내기라고 무시했으나, 직접 보니 호흡은 깊고 화술이 특출 났다. 마치 오랜 기간 무대연기를 하다 넘어온 관록 있는 배우를 보는 느낌을 줄 정도였다.
어쨌거나 다음 장면은 악역인 왕세자의 등장이었다.
‘왕세자’ 역할의 배우 정성우는 톱스타 반열에 올라간 지 십 년 가까이 된 베테랑이었다. 그는 십대 시절 데뷔 초반부터 화려한 외모로 주목받았고, 이십 대 중반에 들어서서 연기력이 폭발했다.
정성우는 이 자리에서도 연기내공을 발휘했다.
“전군의 신망을 등에 업었으니 권력이 탐날 텐데?”
차가운 인상으로 분한 정성우가 입 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그에 이도원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피아식별이 분명한 무관의 길이 제게 맞습니다.”
그 말에 정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어쩔 생각인가?”
“전쟁이 끝났으니 귀향하여 농사를 지을 생각입니다.”
이도원이 조용하지만 확고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정성우가 눈을 짤막하게 빛냈다.
“자네 같이 깨끗한 인물이 필요하네.”
이도원이 잠시 사이를 두고 물었다.
“제게 뭘 바라십니까?”
문득 정성우의 얼굴에 탐욕이 떠올랐다.
눈빛과 표정변화만으로 강렬한 감정을 드러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넨 지휘가 뭔지 잘 알아. 명령하면 누구나 복종하잖아?”
그는 열변을 토했다.
“신하들은 권모술수와 아첨에만 능해. 우리가 그들로부터 이 땅을 구원해야 하네. 때가 오면 자네의 충성을 기대해도 좋겠나?”
이도원은 이곳 리딩 룸 안의 가장 오랜 경력을 가진 백발의 선배 배우를 바라보고, 다시 정성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전하께서 허락하시면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겠습니다.”
정성우는 살짝 눈꺼풀을 떨었다.
“고향? 그댄 누구보다 자격이 있지만…….”
그는 이도원을 향해 비틀린 웃음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안일한 생각 말아. 곧 부르겠다.”
이도원은 왕세자 역할의 배우의 연기력에 감탄했다. 대사를 주고받으면서 물 흐르듯 전개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희열이었다.
‘지금까지 항상 혼자 수레를 끌었다면, 지금은 누군가가 뒤에 서서 밀어주는 기분이다.’
정성우 역시 놀람은 다르지 않았다.
‘이번 촬영. 재밌어지겠어.’
그는 이도원이 단번에 마음에 들었다.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성공가도를 달릴 정도로 충분한 욕심과 실력에 호감이 갔고, 많은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평범한 듯 잘생긴 얼굴도 호감 형이란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이 자리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윤지민과 박아현이었다. 둘만의 기류로 이 자리의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것이 괘씸했다. 많은 선배들이 보는 자리였기에 성질을 부리진 않았지만 마음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싸가지 없는 년들. 여러 선배님들과 감독님만 안 계셨어도 가만 안 뒀을 텐데.’
그때 윤지민이 이도원을 향해 ‘민혜공주’의 대사를 쳤다.
< Ready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