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eady (3) >
이도원은 2020년 9월 25일 뮤지컬 <영웅>의 ‘안중근’ 역할에 캐스팅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10월 10일 대본 리딩 하루 전인 9일까지 하루도 빠짐 없이 연습실에 나가 연습을 했다.
“오빠. 그 새 몰라보게 늘었네요?”
“늘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이도원이 물었다.
“그래서, 부족한 점은?”
“여기서 소리가 끝까지 뻗지 않고 떨어지는 느낌이에요.”
차지은이 대본의 한 부분을 콕 집었다.
이도원은 대본과 노래의 악보를 대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역대가 너무 높은 건가?”
“아니, 아니에요.”
차지은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음을 점점 올린다는 느낌이 아니라 더 위에서 아래로 떨어트린다는 느낌으로 해보세요. 추상적이지만 소리는 상상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아요.”
노래에 관해선 주로 이도원이 먼저 차지은에게 피드백을 부탁했다. 그녀는 그때마다 겸손하게 대답했지만 지적할 때만큼은 칼같이 날카로웠다.
‘역시 노래 하나는 나보다 훨씬 잘해.’
이도원은 인정할 부분에선 깨끗이 인정하는 편이었다.
“다시 한 번 해볼게.”
이도원이 다시 한 번 노래를 불렀다.
차지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빠 진짜 독하네요. 대단해요.”
“왜?”
“그동안 엄청 연습했죠? 계속 녹음하고 들으면서 했을 것 같아요. 잠꼬대로 부를 정도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오빠 약간 음치거든요. 핀트가 살짝 내려가거나 올라가요.”
이도원은 치부를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풋 웃은 차지은이 말했다.
“걱정 말아요. 관객 중에 전문가가 없는 이상 그냥 속을 정도로 아주 미세한 차이니까. 하지만 전문가나 신용운 선생님이라면 바로 알아채실 거예요.”
“근데 넌 어떻게 알아?”
“전 음감이 좋은 편이거든요.”
이도원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겪은 바로 차지은은 노래를 잘 불렀다. 그냥 잘 부르는 게 아니고, 이곳의 누구 보다 잘 불렀다.
그때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차지은이 말했다.
“완벽하게 음감을 맞추려면…….”
그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피아노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널찍한 의자를 툭툭 쳤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여기 옆에 와서 앉아봐요.”
이도원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고분고분 차지은의 옆에 가서 앉았다.
이어서 차지은이 지시했다.
“제가 건반을 누르면 맞는 계이름을 쭉 끌면서 불러 봐요. 도-레-미-파-솔-라-시-도. 이렇게.”
그녀가 덧붙였다.
“음정이 어긋나지 않으면 잔음에 녹아들면서 오빠 목소리가 안 들릴 거예요. 건반으로 내는 소리만 들리겠죠.”
음정을 교정하는 방법이었다.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됐어.”
“그럼 시작.”
차지은이 건반을 눌렀다.
이도원은 따라 불렀다.
그러길 여러 번.
음정 교정을 삼십 분 쯤 했을 때 이도원이 물었다.
“이건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겠다. 음정은 그렇다 치고… 아까 내 음역 대에 벗어나는 노래는 없다고 했잖아? 음을 떨어트리는 느낌으로 부르라고. 그건 특훈법 없어?”
“너무 날로 드시려고 하시네요, 오라버니.”
이도원이 아쉬워 하려던 찰나 그녀가 덧붙였다.
“없긴 왜 없어요? 당연히 있지.”
씩 웃은 벌떡 차지은이 일어나서 말했다.
“일어나요.”
“네.”
이도원은 순순히 일어났다.
차지은은 넓은 공간에 서서 후우-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무언가 큰 결심을 한 사람처럼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이게 좀 우스꽝스럽긴 한데. 효과는 직방이에요.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음역대의 고음을 잡지 못한다는 건 습관이 잘못 들었다는 증거죠.”
차지은이 이도원에게 등을 돌렸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가랑이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이렇게.”
그녀가 원래대로 섰다.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는 걸 방지할 수 있어요. 물론 단점은 있죠. 이 연습은 과하게 반복하면 안 된다는 거? 머리로 피가 몰려서 바보가 될 수도 있고…….”
이도원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게.”
“하루에 다섯 번 이상은 하지 말고요.”
차지은은 재밌다는 듯 웃으며 팔짱을 끼고 지켜봤다.
이도원이 허리를 숙어 가랑이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아---. 도-레-미-파-솔-라-시-도-.”
확실히 소리가 잘 나오는 걸 확인한 이도원은 원상태로 일어나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네.”
어깨를 으쓱인 차지은이 말했다.
“또 한 가지 팁을 더 주자면 미간으로 소리를 낸다고 생각해요. 소리는 척추를 타고 머리 위로 곡선을 그리며 떨어진다고 상상하면 편하죠. 소리를 오빠가 원하는 음으로 떨어트리는 거예요. 가사 한 글자에 한 음 씩! 툭툭 떨어트리는 거죠.”
차지은은 고운 소리를 냈다.
직접 시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확실히 그녀는 편하게 고음을 불렀다.
이도원은 감탄을 숨기지 않고 고개를 내저었다.
“허무하네. 난 그래도 내가 중간은 가는 줄 알았어. 다들 노래 잘 한다고 했거든. 근데 너한테 배워보니 산 넘어 산이다.”
“왜요? 걱정 돼요?”
잠깐 딴 곳을 보며 물은 차지은이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없지. 내가 걱정할 사람을 해야지.”
그녀는 못 말린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도원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던 것이다.
네 시간 정도 노래를 부른 두 사람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실질적인 연기연습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둘 밖에 없었기에 서로 배역인 ‘안중근’과 ‘링링’의 대사를 봐주기로 했다.
이제 이도원이 지휘봉을 잡을 차례였다. 연기는 차지은 보다 이도원이 한 수 위였다.
“나부터 하지.”
이도원이 대본을 들고 대사를 쳤다.
“앞으로 저와 여러분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일입니다.”
나직하고 굳건한 어조였다.
이도원은 다른 배역들의 대사를 생략했다.
“지금까지 서로 살아온 길은 달랐지만… 앞으로 가야할 길은 같습니다.”
그는 조국을 향한 절절한 마음을 담아 손을 뻗었다. 그리고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저와 여러분이 힘을 합친다면 수백, 수만의 일본군에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자, 다 함께 부딪쳐 봅시다!”
기다리고 있던 차지은이 ‘링링’이 될 차례였다. 그녀는 밝고 활기찬 목소리로 비장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여기, 만두 더 있습니다. 싸우지 말고 드세요.”
대본에서 시선을 돌린 차지은이 이도원을 불렀다.
“선생님?”
다음으로, 대본에는 (독립군들이 환호성을 지르면 그 사이로 링링이 나타나 안중근의 팔짱을 끼는데…)라는 설명문이 있었다. 이도원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바짝 다가온 차지은이 팔짱을 꼈다.
“와… 그 사이 더 잘 생겨지셨네?”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장난스럽게 묻는 모습이 ‘링링’인지, 차지은인지 헷갈릴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이도원 역시 ‘안중근’과 혼동될 만큼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느새 아가씨가 다 됐구나…….”
‘링링’의 오빠인 우덕순이 ‘안중근’을 놀리는 장면을 생략한 차지은은 허공을 보고 부끄러운 새소리를 냈다.
“오빠…….”
그녀는 고개를 돌린 살짝 돌린 채 바구니를 내미는 시늉을 했다.
“선생님. 먼 길 오셨는데 만두부터 드세요.”
이도원이 만두를 집는 시늉을 했다. 만두를 입안에 넣으려던 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굶주린 독립군들이 눈에 선했다.
“자, 다 같이 먹지.”
‘안중근’과 ‘링링’이 함께 등장하는 첫 장면은 거기까지였다.
이도원의 연기를 모두 본 차지은은 혀를 빼꼼 내밀며 고개를 흔들었다.
“오빠 연기는 뭐… 제가 뭐라고 지적하겠어요?”
엄살을 부리는 모습에 이도원이 피식 웃었다.
“너도 이제 딱히 연기적으로 지적할 건 없는 것 같은데? 내가 발견할 수준은 넘은 것 같다. 다만 아직 네가 가진 무기를 스스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야. 지금 정도 호흡과 발성이면 충분히 대사가 전달되겠지만, 멀리 떨어진 관객에게도 ‘링링’이란 인물을 정확히 이해시키려면 움직임도 중요해. 나한테 다가올 때나 팔짱을 낄 때 좀 더 가벼운 몸짓과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해봐.”
“역시 가차 없네요, 오빤. 말이 쉽죠…….”
차지은은 투덜대면서도 진지한 표정이었다.
이도원은 그녀가 무언가 깨우쳤음을 눈치 챘다.
‘아마 금방 성장할 거야.’
이도원이 차지은을 보면서 느낀 점은 그녀가 영리하다는 사실이다. 차지은은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이도원의 지적을 소화했다. 조언을 반영해서 자신의 방식대로 표현하기도 했다.
‘확실히 돕는 재미가 있어.’
그렇잖아도 ‘링링’은 차지은과 성격이나 이미지가 비슷한 배역이었다. 귀엽고 쾌활한 목소리 또한 ‘링링’과 잘 어울렸다. 더불어 그녀가 노래를 부를 때면 이도원 조차 심장이 뛸 만큼 완벽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관객들도 반하게 될 것이다.
‘정말 ’링링‘에 차지은은 완벽한 캐스팅이다.’
이도원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차지은을 지켜봤다.
*
이도원은 밤늦게까지 연습에 몰두했다.
차지은이 먼저 들어갈 때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자정이 넘어서야 연습을 일단락 지었다.
이도원은 주차장으로 내려가 밴에 탑승했다.
“수고했어.”
오준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이 물었다.
“뭐하고 있었어?”
“대본연습.”
오준식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예전에 보던 대본으로 ‘최정우’ 배역 연습 하고 있었어.”
“독백 부분?”
“응. 독백이랑 내레이션.”
“준비되면 얘기해. 내가 했던 작품이니까 한 번 봐줄게.”
“큭. 감동이다.”
오준식은 호들갑을 떨며 시동을 걸었다. 두 사람은 지난번 술자리 뒤로 어느 정도 응어리가 풀린 상태였다.
그날부로 오준식은 많이 바뀌었다. 지쳐가던 연기에 대해 긍정적인 마음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급했던 마음을 내려놨다.
‘도원이의 매니저를 하게 돼서 다행이야.’
오준식은 이도원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도원은 집으로 가는 길 내내 <투사>의 대본을 들춰봤다.
“맞다. 준식아, 박아현 오디션은 어떻게 됐대?”
“아주 갈 데까지 갔나보더라.”
“뭐가?”
“내일 리딩 때 박아현이랑 윤지민을 동시에 부른다고 하던데? 동료 배우들 앞에서 배역을 두고 경쟁하게 생긴 건데… 나 참, 이게 무슨 일인지.”
“헐.”
이도원은 저절로 헛바람을 뱉었다. 오준식의 말대로 그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던 것이다.
오준식이 그에 대한 설명을 부연했다.
“정윤욱 감독이 투자자들과 타협을 본 건지, 아니면 단순히 윤지민을 망신주려는 건지… 당장 윤지민이 리딩장에 올지도 의문이야.”
“윤지민 입장에선 열 좀 받았겠네.”
“그렇지. 자존심이 팍 상할 거야. 근데 박아현이 더 대단하다? 그 대단한 톱스타 윤지민이랑, 그것도 십 년 가까이 차이 나는 선배랑 붙게 생겼는데도 꿋꿋히 내일 참석할 생각 인가봐.”
“박아현 입장에선 놓칠 수 없는 기회니까.”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정윤욱 감독의 블록버스터 주연이야. 한방에 배우로서의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지. 잘만하면 화려한 복귀가 가능한 상황인데 예의 지킨답시고 놓을 수 있겠어?”
“그건 그렇지. 어쨌거나 확실한 건 내일 리딩장 분위기가 대박 살 떨릴거라는 사실이야.”
오준식의 말에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는 구경하겠네.”
“윤지민과 박아현. 둘 다 너랑 호흡 맞출 텐데, 같은 대사 두 번 씩 해야되는거 아니야?”
오준식의 우려에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돌아가면서 대사를 치겠지. 초장부터 개판이군……. 점점 궁금해지는데?”
“뭐가?”
“정윤욱 감독과 윤지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어. 특히 감독과 여배우의 관계라면.”
이도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궁금타 이거지 뭐. 그나저나 <투사>에 어마어마한 선배들이 왜 이리 많아? 기 눌려서 숨도 제대로 못 쉬겠네.”
<투사>에 섭외된 조연배우들은 웬만한 주연을 상회하는 개런티를 받고 있는 최고의 배우들이었다.
이도원은 새삼 입에 침이 말랐다. 그들의 연기를 보고, 함께 호흡을 맞출 생각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낌없이 쏟아 붓고 많이 배우자.’
이도원은 초심으로 돌아가 다짐했다.
< Ready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