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eady (2) >
연습실은 이도원의 밀도 높은 목소리로 가득 찼다.
사이를 두고, 이도원이 대사를 쳤다.
“모두들 똑똑히 보시오!”
가슴 속 웅크린 한이 폭발했다.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살해한 미우라는 무죄, 이토를 쏴 죽인 나는 사형, 대체 일본법은 왜 이리 엉망이란 말입니까!”
이도원이 큰 소리로 독백하며 직후 레시타티보(recitative; 낭독하듯 노래하는 부분)로 전환했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 태어나, 조국을 위해 죽는 것-. 이것이 참된 영광이니-나 기꺼이 받아드리나-. 여기 계신 모든 분들, 저들의 거짓과 야욕에 속지 마시고-그들의 위선과 우리의 진실을 세계에 알려주시오--!”
이도원은 조국의 한을 그대로 품고 음정을 실어 불렀다. 목소리는 낮게 읊조릴 때도, 우렁차게 부를 때도 시종일관 굵직하고 근엄했다.
무섭게 치솟던 소리가 그치는 순간.
쿵!
이도원이 발을 굴렀다.
<영웅> 대본상에는 없던 움직임이었다.
신용운이 코러스를 넣었다.
네 사람이 부르는 합창 부분을 이도원이 홀로 짊어지고 이어나갔다.
“나라를 위해 싸운 우리, 과연 누가 죄인인가? 우리를 벌할 자 누구인가? 우리들은-움직였다-나라를 위해 싸운 우리, 누가 죄인인가? 우리를 벌할 자 누구인가? 우리는 용감했다-!”
이도원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
정적이 감돌고, 이도원이 호흡을 감아 물었다.
“누가 죄인인가?”
소름이 돋았다.
MR과 AR에 의지하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비록 연습실 구조상 마이크를 댄 것처럼 울렸지만 놀라운 건 변함없었다. 노래를 탁월하게 잘해서가 아니었다. 호흡과 발성은 안정적이었지만 노래 자체는 미흡했다. 하지만 이도원은 배우이지 가수가 아니다.
뮤지컬은 노래로 하는 연기다.
연기가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
얼굴 표정과 목소리, 몸짓에 감정을 얼마나 실을 수 있는가. 얼마나 짙은 호소력과 전달력을 가졌는가.
이도원은 그런 점에서 최고의 노래를 들려주진 못했지만, 놀라운 연기를 보여준 것이다.
마침내 신용운이 입을 열었다.
“아직 많이 다듬어야겠지만 갖고 있는 잠재성은 좋군.”
곁에 앉은 정태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이 좋은데요. 관객을 홀리는 폭발력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가 들리도록 평가를 했다.
일부는 고개를 끄덕이고, 또 일부는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도원은 내심 웃었다.
‘그래도 반은 설득했군.’
단 한 번의 연기로 우려되던 부분을 절반은 극복했다. 나머지 반을 설득하는 건 앞으로 감당해야 될 몫이었다.
이도원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신용운은 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다가 말했다.
“어차피 따로 활동을 하고 있는 졸업생끼리 모여서 이번 공연을 기획했다. 그러니 영화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준비하기에도 좋을 거야. 문제는 네가 중간에 들어왔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은 공연을 올리기까지 넉넉한 준비기간이 있었지만 넌 촉박하다는 뜻이지.”
“예.”
“다른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것만도 쉽지 않은 일이 될 거야. 더블 캐스팅이기 때문에 공연 때 실수라도 하면 사람들의 입에 비교돼 오르내릴 수도 있지.”
신용운이 주위를 한 번 쓸어본 뒤 이도원에게 물었다.
“누구도 네 영화 스케줄을 건들이진 않겠지만, 바쁘다고 해서 단원들에게 피해주면 안 돼. 약속 할 수 있나?”
이도원은 욕심이 들불처럼 이는 걸 느꼈다.
처음에는 복잡한 심정으로 이곳에 들어왔다. 앞으로 스케줄에 대한 번잡스러운 고민들이 이도원을 에워쌌었다. 하지만 <영웅>의 ‘안중근’을 연기하며, 그가 품은 민족의 한을 품고 가슴으로 노래하며 깨달았다.
이 기회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호소하고 전달할 수 있는 무대가 그를 유혹하고 있다는 것을.
“약속할 수 있습니다.”
이도원의 표정에는 한 점의 고민도 없었다.
‘반드시 해내겠다.’
신용운은 그 확고한 얼굴을 마주보며 그렇게 해석했다.
이도원을 빤히 바라보던 신용운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정태화 역시 이도원에게 시선을 떼며 신용운을 따라 쪽방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이도원은 몸을 휘청거렸다.
‘하고 싶다.’
어떤 상황들이 가로막든, 누가 뭐라고 하든 하고 싶다.
이도원은 <영웅>의 ‘안중근’ 배역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한편 방문을 닫은 정태화가 신용운에게 말했다.
“욕심이 과하면 전체를 망칠 수 있습니다. 선생님, 이도원에게는 연습할 시간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차라리 뮤지컬 배우를 섭외하시죠. 지금까지 여러 번 오디션을 봤고, 괜찮은 배우들도 있었잖습니까?”
신용운은 고개를 저었다.
“이도원으로 간다.”
“선생님!”
정태화가 목청을 높였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이도원으로 인해 망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신용운은 무섭게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지금 <영웅>에서 빠진 권명섭은 오랫동안 나와 함께한 제자다. 누구보다 이번 배역에 대한 욕심이 있었고, <영웅>에 집중했다. 우리 중 누가 그 녀석이 목 관리 하나도 못해 이런 상황이 초래될 줄 예측했나?”
정태화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았다. 가장 속이 상한 것은 그도, 단원들도 아닌 신용운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영웅>에서 빠진 권명섭은 신용운이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
신용운이 말했다.
“무려 칠 년이다. 그동안 군말 없이 내 밑에서 연기를 배웠다. 연극판만 전전하며 이제야 큰 공연을 할 기회를 잡았는데 멍청한 새끼가 배우의 기본인 목 관리 하나 못해서 그렇게 됐다.”
신용운의 목소리에서 안타까움이 가득 베어났다. 비록 욕으로 치장했지만 권명섭을 각별히 여기는 마음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 거다. 처한 여건이 어떻든 못할 놈은 못하고, 할 놈은 해. 억울해도 이도원은 해낼 놈이다. 지금까지 괜찮은 배우들이 왔다고? 우리가 관객에게 말하고자 하는 게 ‘그럭저럭 괜찮은 무대’인가?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백 년도 전에 겪었던 민족의 설움을 말해야 돼.”
신용운이 배역을 확정지었다.
“공연은 배우가 아닌 관객을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가장 능력 있고, 가장 인상 깊은 연기를 펼쳐줄 수 있는 배우로 간다.”
그날 저녁 이도원은 오준식의 동네로 갔다.
경기도 부천 범박동의 달동네.
두 사람은 허름한 순대국밥 집에 마주앉았다.
오준식은 굳은 표정이었다.
“내가 사는 곳을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목소리도 전에 없이 딱딱하게 나왔다.
오준식은 주인아주머니에게 톤을 바꾸며 주문했다.
“어머니, 여기 순대국밥 두 그릇이랑 소주 한 병만 주세요. 이슬이로요.”
음식과 술이 나오자 이도원이 먼저 잔을 채웠다.
오준식을 빤히 보던 이도원이 물었다.
“할 말 있으면 해라.”
오준식은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이도원은 말없이 잔을 내밀었다.
오준식이 잔을 부딪쳤고 한입에 술을 털어 넣었다.
“크-쓰다.”
말한 오준식이 김치 하나를 주워 먹었다.
이도원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 단데.”
“적당히 마셔.”
오준식이 말하며 술잔을 채웠다.
아예 작정한 듯 잔을 채우기 무섭게 마셨다.
주거니 받거니 한 병이 모두 비워질 때 쯤.
얼굴에 홍조가 낀 오준식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오늘 속에 있던 말 좀 하자.”
이도원이 묵묵히 그를 보았다.
이내, 오준식이 운을 뗐다.
“혹시 돈이 없으면 어떤 삶을 살지 생각해 본 적 있냐? 내가 더 어렸을 때, 난 판자촌에서 살았다. 눈 덮인 판자촌. 눈을 치우지를 않으니까 멀리서 보면 무척 예쁘지. 근데 가까이서 보면 어떤 줄 알아? 생지옥이 따로 없어. 길이 미끄러워 다치는 사람도 많은데 다, 공용 수돗가가 꽁꽁 얼어서 물이 안 나오지. 근데 또 판자가 나무라 눈이 녹아서 물까지 새네? 눈이나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안 그래도 추워 죽겠는데 존나게 물을 퍼내는 거야.”
피식 웃은 오준식이 말했다.
“그래도 그때보다 지금은 좀 낫다. 판자촌에서 벗어났거든. 그래도 가난은 여전하더라. 난 연기학원을 다닌 적이 없어. 연기학원 대신 현장에서 돈 받고 일했지. 내가 왜 처음 연기를 했는지 알아? TV에 나오는 새끼들은 다 부자더라고. 부자가 되고 싶어서 시작했다. 남들은 예술이니 뭐니 이빨까지만 난 돈 때문에 시작했다.”
이도원은 잔을 채워주며 가만히 듣고 있었다.
오준식이 두서없이 지껄였다.
“어려서부터 내 밥값, 애들 용돈 버느라 학교생활도 제대로 못했지. 그래도 복지 정책이라고 나오는 돈으로 할머니 약값은 해결했다. 근데 웬 걸, 둘째 놈이 연년생이라 스무 살 넘으니까 군대 가라더라. 군대에서 야간 근무 서면서 존나게 추운데 머릿속에선 할머니 걱정이 그치질 않아. 이렇게 추운데 또 박스 줍는다고 쓸데없이 돈도 안 되는 거, 그거 줍는다고 밤거리를 헤매고 있진 않을까…….”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오준식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이도원은 오준식의 호흡을 관찰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
문득 스스로가 저주스럽게 느껴졌다.
무심결이라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연기란, 배우란 그런 직업이었다.
한편 서럽게 울던 오준식이 말을 이었다.
“가난이란 놈이 질겨.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연기를 포기해야만 했지. 근데 이미 연기가 내 인생의 유일한 희망이 돼버렸더라고. 이 세상에서 행복할 게 없는 내가, 연기를 할 때만큼은 즐겁더라. 가난도 절망도 탈출구는 연기뿐이었지.”
오준식은 흐흐 웃었다.
반쯤 울고 반쯤 웃는다.
“그래서 꿈 언저리라도 있으려고 로드 일을 하게 됐다. 우리 회사가 매니지먼트 월급이 많거든? 집도 못 들어가고 일하는데 다른 곳은 초봉 팔십 받고, 삼 개월 일한 뒤에 백이십 받아. 그리고 한 십 년 구르면 웬만한 직장인 보단 많이 받는다. 대부분 다 떨어져나가니까 남은 사람만 버는 거지. 일거리는 늘겠지만 뭐, 버티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버티는 건 자신 있는데 말이야. 게다가 우리 회사는 처음부터 기본은 주거든. 그 시간에 알바 하는 것 보다 나을 정도?”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준식은 그간 쌓인 한이 깊었는지 한참 동안 하소연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도원이 궁금했던 부분을 말했다.
“처음에는 네가 잘되기만을 바랬다. 근데 나도 사람이다 보니 열등감이 생기더라.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하게 돼고.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고 하지 않냐? 내가 꿈꾸던 인생을 사는 널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낭 화가 나더라고. 일 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데 넌 화려한 삶. 난 시궁창.”
오준식이 창밖의 신축 아파트를 가리켰다.
“쟤들이랑 나랑 이렇게 가까이 사는데, 하늘과 땅 차이잖아? 지금도 네가 잘되길 바라는데, 자꾸 화가 난다. 내 신세가. 넌 바로 옆에서 몇 십 억 씩 버는데 난 간신히 할머니 약값 벌고, 애들 학비 벌면서 근근이 살고 있지.”
그는 이어 물었다.
“불공평하지 않냐? 너나 나나, 누구나 인생은 치열하게 살고 있는데 말이야.”
이도원은 대답을 미루고 술을 털어 넘겼다.
탁-소주잔을 내려놓은 이도원이 입을 열었다.
“난 네 상황이 돼 본 적 없다. 짐작은 해도 공감은 못 해. 근데 준식아.”
잠시 고민하던 그는 말을 이었다.
“다 좋은데 포기하진 마라. 네 세상과 내 세상을 구분 짓지도 말고.”
이도원의 말 속에는 경험과 진심이 담겨있었다.
그 역시 타임 슬립하기 전 목소리를 잃고 헤맸다. 완전한 연기를 영영 할 수 없게 되었고 가난은 실과 바늘처럼 따라왔다. 말도 못하는 반쪽짜리 배우라는 멍울을 뒤집어썼다.
물론 그들은 서로의 속내까지 공감하진 못했다. 오준식도 이도원에게 해답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털어놓을 곳이 필요했을 뿐이다. 이도원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이도원은 고개를 돌려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바라봤다.
세상에 의지대로 되는 것은 없다.
그저 열심히 버티고, 희망을 놓지 않을 뿐.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그리고.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