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92화 (92/178)

< Ready (1) >

이도원은 뜻밖의 문제에 봉착한 느낌이었다. 박아현의 연기력이 문제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실책이었다.

‘여배우 교체는 힘들겠군. 그저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나 자신한테 집중하는 수밖에.’

이도원은 일차적으로 단념하며 최선의 판단을 했다.

“대표님. 일단 우리 쪽에서 오디션 요청을 할 수 있을까요?”

“그건 어렵지 않다. 어차피 그쪽도 좋은 여배우를 찾고 있으니까.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당장 영화의 흥행을 위해 나설 수 있는 선은 여기까지. 그 이상은 역효과만 초래할 뿐이다.

이제 남은 건 박아현의 몫이었다.

이도원은 무대 인사 일정에서 빠졌으며 미리 계약됐던 세 건의 광고 촬영도 끝났다. 표면적으로는 공백기였으나 그는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투사>의 시나리오와 대본을 한시도 떼어놓지 않았다. 또한 뮤지컬 배역 오디션 대본을 함께 봐야했다.

‘<투사>에선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투기장의 노비로 전락한 조선 최고의 무장.’

이도원은 뮤지컬 <영웅>의 ‘안중근’ 쪽 대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극중에 나오는 독백 하나와 뮤지컬 곡 <누가 죄인인가>를 오디션으로 보게 된다.

<영웅>은 대한민국 창작 뮤지컬로 브로드웨이까지 진출해 기립박수를 받으며 극찬을 끌어낸 작품이었다. ‘안중근’이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는 내용의 웅장한 작품이었다.

‘부담이 크군.’

더구나 뮤지컬은 모든 배역에 더블캐스팅을 한다. 같은 배역의 다른 배우와 비교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도원이 남의 실력에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가 걱정하는 점은 따로 있었다.

‘대사 보다 중요한 건 움직임과 노래인데, 아직 많이 부족해.’

이도원은 노래에 큰 자신이 없었다. 목소리를 잃어봤던 그이기에 ‘노래’ 자체애는 연기만큼이나 갈증을 느끼고 있었지만 실력이 따라줄지가 의문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어진 시간도 많지 않았다. 내막을 알고 보니 이미 중영대학교 현역과 졸업생들이 두 달 전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고, 중간에 폭탄으로 들어가게 되는 상황이었다. 기존에 ‘안중근’ 역으로 캐스팅 됐던 배우가 목이 크게 상하면서 더 이상 연습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고 작곡가 조용현이 마침 중영대학교 휴학생인 이도원을 추천했던 것이다.

배역 오디션을 위해 연습실로 가는 길 이도원이 물었다.

“누나는?”

스타일리스트 유성연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시장조사 갔어.”

오디션에는 스타일링이 필요 없었기 때문에, 유성연은 이런 시간을 쪼개서 틈틈이 이도원이 입고 출연할 옷을 보러 다녔다. 이 점을 알고 있는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둘만 남은 자리.

오준식이 백미러로 힐끔거리며 화제를 돌렸다.

“넌 중간에 들어가는 건데. 뮤지컬 단원들, 텃새가 장난 아니겠지?”

이도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준식이 재차 말했다.

“같은 중영대라도… 이 업계가 선후배가 엄격하다 보니 심한 텃새를 부릴지도 모르겠네. 더구나 목이 상해서 배우가 빠진 것도 호재가 아닌데, 그 자리로 들어온 널 좋게 보진 않을 거야.”

이도원이 미간을 찌푸리고 백미러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어쩌자고?”

“네가 워낙 당당하지 않냐. 성격 좀 죽이라는 거지.”

그 말에 이도원은 오준식을 빤히 보았다.

<시간아! 돌아와> 촬영 때까지 오준식은 제 역할에 충실했다. 이도원과 장난을 주고받았지만 도를 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악마의 재능> 촬영이 끝났을 쯤부터 무언가 낌새가 이상했다. 지금까지 그저 바쁜 스케줄로 인해 서로 예민해 졌구나 하며 넘겼던 이도원이었지만.

‘촬영이 끝나면서 요즘에는 준식이의 일이 줄었어. 대기하는 시간이 많아져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건가? 아니면 스타일리스트가 들어왔을 때부터 어떤 영향을 받아서?’

그는 고민해봤자 소용없다는 생각을 하고 물었다.

“오늘 오디션 끝나면 술이나 한 잔 할까?”

오준식이 당황한 얼굴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오늘 일찍 들어가 봐야 해서. 오랜만에 가족들도 봐야하고…….”

“너희 집 근처에서 회포 풀자. 집에는 나 혼자 갈 테니까 걱정 말고.”

오준식은 뜨끔 했다. 이도원의 태도가 전과 같지 않았던 것이다. 날카롭게 빛나는 눈과 강압적인 분위기가 벤 말투가 그랬다.

“…알겠다.”

오준식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밴이 달리는 동안 두 사람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차가 움직이는 소음과 이도원이 대본을 넘기는 소리만 오준식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도착하기 무섭게 이도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문을 열고 내렸다.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 일 보고 있어.”

칼같이 자른 이도원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연습실이 나타났다.

밖에서부터 배우들이 목을 푸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일반인들이 들으면 이상한 괴성일 수 있겠지만, 배우들에게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발성이 탄탄하군.’

이도원은 잠시 감청을 하다 안으로 들어섰다.

드문드문 이도원을 발견한 단원들이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이도원은 개의치 않고 주위를 훑었다. 거울 앞에서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고 목을 푸는 여자의 뒷모습을 본 이도원은 조금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안녕하세요. ‘안중근’ 열사 역 오디션을 보러 온 이도원입니다.”

그때 여자가 몸을 돌렸다.

‘아!’

이도원은 깜짝 놀랐다.

아주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감독님한테 오빠가 온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진짜 왔네요!”

그녀는 바로 차지은이었다.

‘활동을 못하게 한다더니… 여기 있었네.’

반면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너도 중영대 학생이야?”

“몰랐어요? 하긴 저도 오빠가 중영대 입학한 걸 감독님한테 얘기 듣고 알았으니까요. 그래도 전 조그맣게 기사까지 떴다고요.”

이도원은 머쓱해졌다.

“신입생이겠네.”

“네. 졸업한 선배들도 참여하는 공연이라 떨려요. 재학생은 ‘링링’ 역할 밖에 없거든요.”

뮤지컬 <영웅>의 ‘링링’은 ‘안중근’을 사랑하는 소녀로, 가장 나이가 어린 배역이었다. 어쩐지 역할이 잘 어울린다 싶어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한 남자가 일어나서 다가왔다.

조금 굳은 표정의 남자는 악수를 청했다.

“난 정태화라고 한다. 재작년에 졸업했고, 지금은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고 있지. <영웅>에서 네가 오디션 볼 배역인 ‘안중근’ 역할이다. 네가 합격한다면 아마 나와 더블캐스팅으로 무대에 서게 될 거야.”

“반갑습니다. 선배님.”

이도원이 손을 맞잡았다.

남자, 정태화는 연습실 쪽방을 가리켰다.

“감독님께 인사드리고 나와. 오디션은 십 분 후 보기로 하지.”

“알겠습니다.”

이도원은 차지은에게 눈인사를 하고 쪽방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안으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직하지만 폭발적인 힘과 울림이 있는 음성.

익숙했다.

‘설마…….’

이도원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신용운이 있었다.

뮤지컬 연출은 주로 배우들이 한다. 배우들은 연극영화과에서 연기만 배우지 않는다. 무대를 만드는 스태프부터 연출까지 무대의 모든 것을 배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배우들이 연극과 뮤지컬을 기획하고 연출한다.

신용운 역시 트레이너 이전에 연극과 뮤지컬을 하는 배우이자, 동시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실력 있는 무대연출자 중 하나였다.

“이도원.”

신용운이 씩 웃으며 말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준비는 많이 했나?”

“예…….”

이곳에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도원은 뒷말을 삼켰다.

그를 보며 신용운이 말했다.

“뭐해? 나가서 준비해. 바로 따라 나갈 테니까.”

이도원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뒤 문을 열고 나갔다.

연습실 벽에 붙어 앉아 스트레칭을 하는 배우들, 앉아서 쉬고 있던 배우들, 거울을 마주보고 목을 풀고 있던 배우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결코 호의적인 눈빛은 아니었다.

‘이전에 내 배역을 맡았던 배우가 적잖이 신뢰를 받고 있었나보군.’

이도원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 반응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오히려 차지은과 신용운을 보고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후.”

이도원은 나직이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이윽고, 목을 고르는 그의 발성이 연습실을 채워나갔다.

머지않아 신용운이 나오자 모든 배우들이 일어나 인사를 하고 벽에 붙어 앉았다. 이내 연습실 정중앙에 위치한 책상에 신용운과 정태화가 앉았다. 이도원이 그 앞에 서자, 신용운이 마침내 운을 뗐다.

“대사는 생략하고 노래부터 봅시다.”

이도원은 당황하지 않았다. 자신 있는 부분은 대사였지만, 신용운은 그의 연기 실력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

한편 신용운은 이도원이 부족한 부분은 지도하고 연습시키면 얼마든 채울 수 있는 재능을 가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때문에 구태여 다시 확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노래 실력은 모르고 있었다.

이도원의 노래 실력을 모르는 건 차지은도 마찬가지였다.

‘머리를 비우고.’

신용운이 펜을 손 안에서 돌리는 걸 빤히 보던 이도원은 눈을 슥 감았다. 눈을 감자 들숨과 날숨, 가쁜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이도원은 천천히 호흡을 가라앉혔다.

‘안정된 호흡에서 안정된 발성이 나온다.’

이도원은 두 발의 간격을 어깨 넓이로 벌렸다. 바닥을 딛고 있는 두 발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땅바닥에 뿌리를 내린 듯 발이 감기는 느낌이 들었다.

‘목소리는 땅으로부터 나온다.’

다리를 고정시킨 이도원은 상체의 힘을 뺐다. 어깨를 털어 긴장을 내쫓으며 몸을 이완시켰다. 이도원은 속이 통나무처럼 텅 비어버린 느낌으로 생각했다.

‘소리가 나오는 통로가 될 뿐.’

허리와 목을 이어주는 척추를 곧게 펴고 가슴을 올리며 턱을 당겼다.

“스으으으-.”

입으로 허파에 있는 모든 바람을 뺐다.

“스으으읍.”

코를 이용해 바닥에 고정된 발바닥까지 숨을 들이마셨다.

이도원은 감겼던 눈을 지그시 떴다.

일련의 준비과정이 십 초 내에 끝났다.

그는 턱을 고정하고 입을 크게 벌렸다.

“대한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엄격하고 웅장한 느낌이 응축된 목소리였다.

정확한 음정과 절제된 발성은 단숨에 귀를 사로잡았다.

“대한의 황제를 폭력으로 폐위시킨 죄-. 을사늑약과 정미늑약을 가제로 체결케 한 죄-. 무고한 대한의 사람들을 대량 학살한 죄--.”

그때 신용운이 불쑥 가성으로 코러스를 집어넣었다.

“누가 죄인인가? 누가 죄인인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개입에도 이도원은 당황하지 않고 몰입했다.

“조선의 토지와 광산과 산림을 빼앗은 죄-. 제일은행권 화폐를 강제로 사용케 한 죄-. 보호를 핑계로 대한의 군대를 강제 무장 해제시킨 죄-. 교과서를 빼앗아 불태우고 교육을 방해한 죄--.”

신용운이 다시 한 번 반주 같은 코러스를 입혔다.

“누가 죄인인가? 누가 죄인인가?”

이도원이 노래를 이었다.

“한국인들의 외교권을 빼앗고 유학을 금지한 죄-. 신문사를 강제로 철폐하고 언론을 장악한 죄-. 대한의 사법권을 동의 없이 강제로 장악 유린한 죄-. 정권을 폭력으로 찬탈하고 대한의 독립을 파괴한 죄--.”

다시 한 번 코러스, 그리고.

이도원은 의연한 표정으로 노래했다.

“대한제국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원한다며-세계에 뻔뻔스런 거짓말을 퍼뜨리며 세계인을 농락한 죄-. 현재 대한이 태평 무사한 것처럼 천황을 속이고-밖으로 세계 사람들을 모두 속인 죄-. 동양의 평화를 철저히 파괴한 천인공노의 죄 때문이다--!”

그 음성이 점차 올라가며 폭발적인 힘을 내기 시작했다.

< Ready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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