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91화 (91/178)

< 충무로의 블루칩 (4) >

이동하는 사이 고민이 늘어났지만 밴은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를 지나 일산 MAC 방송국을 향해 달려갔다.

밴은 1시간 20분가량 걸려 방송국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유성연은 이도원을 이미 의상 코디대로 입힌 상태였다.

가을에 어울리는 청자켓과 반팔 티, 블랙진이 잘 어울렸다.

예능국에서 다시 메이크업을 해주기 때문에 유성연은 간단한 기초화장만 해주었다.

“이야. 인물이야, 인물.”

이도원의 얼굴을 보며 감탄한 유성연이 말했다.

“내 친구들이 싸인 받아 달래.”

“백 장이라도 해드릴 수 있어요.”

이도원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유성연이 특유의 큰 소리로 웃었다.

“호호, 이제 출격!”

이도원은 차문을 열고 나갔다.

오준식과 유성연 역시 뒤따라왔다.

세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예능국 세트로 올라갔다.

<라이브 연예계> 세트에 도착하자 TV로만 보던 MC들과 리포터들이 준비를 끝낸 뒤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그때 FD가 와서 말했다.

“저쪽 방에서 대기해주세요!”

드라마 현장에선 보기 드문 여자 FD였다.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과 두 사람은 대기실로 갔다.

그곳에서는 먼저 도착한 십대 후반의 학생이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그는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인사를 했다.

메이크업을 해주던 여자 아티스트는 코를 긁적이며 우두커니 서 있다가 이도원을 발견하고 입을 가렸다.

‘드디어 왔네? 나 완전 좋아하는데.’

연기를 잘해서 좋아했었다.

<우리의 심장>이나 <시간아! 돌아와>, <악마의 재능> 모두 평범한 차림과 나이를 속이는 특수 분장을 하고 나와서 미처 못 느꼈는데 실제로 보니 느낌이 또 달랐다.

그녀가 가진 이도원에 대한 인상이 ‘연기 잘하는 배우’에서 ‘느낌 있는 배우’로 급상승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도원은 그것까지 일일이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아, 안녕하세요.”

인사를 받아보니 어쩐지 민망했다. 타임 슬립 전, 후배들에게 인사를 받아봤지만 너무 오랜 기억이었다.

학생은 아랑곳 않고 자신을 밝혔다.

“저는 이번에 백 프로덕션 오디션을 보고 들어온 열아홉 살 심재빈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이 출연하신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백 프로덕션에 지원했습니다!”

학생, 심재빈은 우렁차게 자기소개를 했다.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티스트가 붙어 메이크업을 시작했다.

심재빈한테 붙어있던 아티스트는 아쉬운 듯 입을 다셨다.

‘이도원은 꼭 내가 해주고 싶었는데.’

그녀는 그 열망을 포기하고 대신 부탁했다.

“저 팬인데, 오늘 촬영 끝나고 싸인 좀 해주세요.”

“역시!”

심재빈이 방방 떴다.

“전 알아보시지도 못했는데, 선배님 팬이셨군요? 역시!”

이도원은 심재빈의 태도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가 아티스트에게 말했다.

“예. 감사합니다.”

이도원은 메이크업아티스트와 헤어아티스트에게 관리를 받았다.

모든 작업이 끝나고 오준식이 커피숍에서 사다준 커피를 나눠 마시고 있는데 FD가 문 틈새로 배꼼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촬영 시작할게요!”

이도원과 심재빈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세트에는 세 개의 의자가 세팅되어 있었다.

좌측으로 이도원과 심재빈이 나란히 앉자 맨 우측에 리포터가 착석했다.

“심재빈 배우는 오른쪽으로 조금만 더 돌아 앉아주세요.”

심재빈은 고분고분 촬영감독의 지시에 따랐다.

마침내 모든 준비를 완료한 PD가 시작 신호를 보냈다.

첫 스타트는 리포터가 끊었다.

“반갑습니다! 오늘은 충무로에 혜성처럼 등장한 스타죠? 이도원 씨를 모셨습니다!”

두 사람이 박수를 쳤다.

호들갑스러운 분위기를 이어가며 리포터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또 한 분! 신인배우 심재빈 씨를 함께 모셨습니다-. 한 분 씩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다시 한 번 박수를 쳤다.

카메라가 이도원을 클로즈 업 했다.

“시청자여러분 안녕하세요. 이번에 <악마의 재능>으로 여러분을 찾아뵀던 배우 이도원입니다.”

‘배우 이도원입니다’를 말하는 순간.

이도원은 가슴 한구석이 뭉클했다.

‘배우.’

이도원은 한 단어를 곱씹으며 심재빈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시청자여러분 반갑습니다! 11월부터 방송되는 10부작 웹 드라마 <내 삶의 보물>로 찾아뵙게 된 신인연기자 심재빈입니다.”

리포터가 말했다.

“아하-! 도원 씨는 지금 충무로를 홀라당 태울 듯이 핫한 배우라는 평이 자자해요. <악마의 재능> 전에도 유태일 감독님과 작업하신 적이 있었다고요?”

“예. <우리의 심장>에서 함께 작업했었죠.”

“<우리의 심장>이 관객 수가 어떻게 됐죠?”

“최종성적이 52만 5천 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악마의 재능>도 개봉 첫날 7만을 넘는 기염을 토했고, 개봉 일주일 만에 벌써 50만을 넘겼어요. 얼마 전 종영된 <시간아! 돌아와>는 ‘시돌 신드롬’을 일으킬 만큼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죠. 유명세를 실감하시나요?”

“가끔요.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거나.”

이도원의 대답이 리포터가 웃음을 터트렸다.

“굉장히 소박하시네요. 아이스크림을 사먹을 때 유명세를 느낀다니. 그만큼 몰라보는 사람이 없다는 거겠죠?”

“하하. 뭐 그렇기야 하려고요.”

“하하하하…….”

리포터는 얼굴에 쥐가 났나 의심될 정도로 계속 웃으면서 화제를 돌렸다.

“도원 씨는 첫 작품인 <우리의 심장> 때부터 이미 연기력이 대단한 신인으로 주목 받았어요. 영화제에서 상을 탄 작품이 상업화까지 된 경우였죠?”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리포터는 속으로 불만을 곱씹었다.

‘왜 단답만 해?’

겉은 정반대로 부드럽게 물었다.

“이번 <악마의 재능>에서 살인범 보다 더 살인범 같은 연기를 보여줬어요. 그 전에 화제가 됐던 드라마 <시간아! 돌아와>에서 연기했던 따뜻한 캐릭터와는 상반된 인물을 연기했는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촬영기간이 겹칠 만큼 타이트 했고, 또 완전히 다른- 이 배역과 저 배역을 오가야하는 상황이었다고 들었는데요?”

연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이도원은 적극적으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예. 많은 준비를 했고 몰입하는 데는 문제가 안 됐어요. <악마의 재능> 촬영이 한참일 땐 <시간아! 돌아와>촬영이 완전 후반부였거든요.”

리포터는 진행을 매끄럽게 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도원과는 연기에 대한 부분을 중점적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반면 심재빈과는 웹 드라마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지에 대한 부분을 이야기 했다.

심재빈은 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자신 있게 대답했다.

“여기 계신 선배님처럼 훌륭한 연기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프로듀서가 고개를 저으며 속삭였다.

“이건 편집해야겠다야. 신인 둘이 선후배 따지면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한다는 소리 듣기 딱 좋아.”

프로듀서의 안목은 날카로웠다.

이도원은 아직 누군가의 목표가 될 급은 아니었다.

연기력은 그 수준이 될지 몰라도 이 바닥에서 누군가의 목표가 되려거든 ‘선배님’이 아닌 ‘선생님’ 소리를 들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아니면 두 호칭의 중간쯤이거나.

연륜과 유명세가 뒷받침 되지 않는 자랑은 객기고 야박한 평을 받는다. 좋든 싫든 점점에 오를 때까진 겸손한 태도만이 미덕인 것이다.

세상은 많이 바뀌었지만 대중의 시선은 아직도 많이 보수적이었다.

“츳츳!”

혓소리를 낸 프로듀서는 심재빈을 가리키고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심재빈 분은 최대한 컷할 테니까 질문 자체를 줄이라는 의미였다.

어차피 메인요리는 이도원이었으며, 심재빈은 많이 쳐줘야 애피타이저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

촬영은 두 시간 만에 마무리 됐다.

실제로 방송으로 나가는 분량은 십오 분 남짓이다.

촬영 분량 중 임펙트 있는 부분만을 골라 편집하기 때문인데, 이도원의 경우 예능이 익숙지 않았기 때문에 촬영시간이 길어진 케이스였다.

어쨌거나 게스트한테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기에 이도원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온 이도원은 이상백과 곧바로 미팅을 가졌다.

이상백은 직접 차를 끓여와 내주며 물었다.

“일 대 일 면담을 다 신청하고 웬일이냐? 내가 학교에 있을 때 이후로 네가 날 보자고 한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얼굴에 서운한 티가 났다.

미미하게 웃은 이도원이 일어나서 찻잔을 건네받으며 대답했다.

“이번 영화 <투사> 때문입니다.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지연된 정확한 이유를 알고 싶어서요.”

“여배우 때문이란 건 들있을 테고, 내막이 궁금하단 의미겠지?”

“예.”

이상백은 손가락으로 소파의 팔걸이를 두드렸다.

말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던 이상백이 입을 열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내가 알고 있는 부분까지만 말해주마. 여배우와 감독 사이에 심각한 트러블이 있었다.”

“윤지민과 정윤욱 감독 사이에요?”

“그래. 그 이상 알려진 건 없다. 양측에서도 쉬쉬하는 눈치고.”

탑 배우와 명감독 사이에 무슨 일이?

이도원은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물론 중요한 건 속사정이 아닌 결과였다.

“그럼 윤지민 케스팅은 불발되는 건가요?”

“이대로 여배우가 구해지지 않는다면 윤지민으로 가야겠지. 윤지민과 정윤욱 감독 서로가 원하진 않겠지만 나머지 배우들과 스태프들, 기획사들과 투자사들 눈도 있으니.”

“마땅한 여배우가 구해지지 않는 이유는요? 투자자들이 존재만으로 티켓파워가 있는 톱스타를 원해서인가요?”

“꽤 영리한 추측이지만 아니다. 여배우들 쪽에서 거절하고 있어.”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이도원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왜요? 정윤욱 감독이면 흥행수표 아닌가요? 게다가 이번 작품은 시나리오도 좋고, 자본도 넉넉하고, 영화 스케일도 큰데요.”

“문제는 그게 아니다. 촬영 기간도 길고 촬영 스케줄도 빡빡한데 탑배우들 중에는 시간이 되는 여배우가 없어. 이미지를 맞는 배우로 새로 발굴하자니, 오디션을 봐도 사극연기가 되는 배우가 없는 거야.”

이상백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내용은 전부 이도원의 입장에서 반길만한 사실들이었다.

이도원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우린 알고 있잖아요.”

“뭐?”

“박아현.”

짧게 말한 이도원이 덧붙였다.

“이미 계약금이랑 개런티 책정해서 계약서는 받아뒀죠. 자꾸 가수 활동을 고집하는 박아현이 못 마땅했는데 마침 우리가 데려가는 상황이에요. 머지않아 내년 삼월이면 우리 쪽으로 입적하고요. 변수는 없을 거고, 영화 개봉하면 개런티는 오를 겁니다. 박아현 연기력 되는 건 교수님도 고등학교 때부터 보셨으니 아시잖아요.”

“나도 알고 있지. 근데 그게, 문제가 있다.”

이상백은 난처한 얼굴로 덧붙였다.

“사극연기가 안 돼. 더구나 갖고 있는 표정도 적을 뿐더러 연기의 스펙트럼이 너무 좁다. <악마의 재능>에선 잘했다지만 기복도 심해. 괜히 가수를 준비시킨 게 아니다. 연기보다 노래와 춤을 더 잘하기 때문이야. 내가 우리 회사로 데려오는 걸 오케이 한 건, 트레이닝을 하고 만들어서 내보내면 신인 보단 나을거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운 좋게 <투사> 오디션을 합격한다고 해도 촬영에 들어갈 때까지 시일이 너무 촉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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