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90화 (90/178)

< 충무로의 블루칩 (3) >

“그간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해요, 교수님.”

학과장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네가 바쁘다는 건 대한민국이 다 아는 사실인데.”

“하하.”

이도원이 머쓱하게 웃었다.

학과장은 소파에 등을 묻으며 물었다.

“그런 바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찾아온 건 다시 휴학 연장을 하려는 목적인가?”

이도원은 생각을 정리하고 운을 뗐다.

“그게, 교수님께 상의해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지금 상황에서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 가장 잘 알고 계시는 분이니까요.”

중영대학교 연극영화과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학과장이다.

경우에 따라선 여러 권한을 행세할 수 있는 위치기도 했다.

더욱이 학과장은 이런 경우를 여러 번 보았을 터였다.

중영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재학 중이거나 졸업한 연예인은 이도원 뿐이 아니었다.

그런 의도를 파악한 학과장은 빙그레 웃었다.

“현명하군. 대부분 알아서 하거든.”

학과장은 세 손가락을 쭉 펴서 보여주었다.

“세 가지 선택이 있네. 첫째, 학교를 그만두는 것. 둘째, 이대로 계속 휴학하는 것. 셋째, 학교생활을 최대한 충실히 하면서 직업에 충실 하는 것.”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이 답했다.

“세 번째 방법이 궁금합니다.”

“한참 상승 가도를 달리는 배우들이나, 요즘 추세와는 상반되는 결정이로군. 하나만 해도 집중하기 힘들 텐데… 학업을 함께 수행하려면 힘들 거야. 어쩌면 지금의 생활에도 지장을 줄 수 있고.”

“되든 안 되든 일단은 해보자는 주의라서요.”

이도원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피식 웃은 학과장이 고개를 저었다.

“욕심이 많은 성격이야. 나는 자네가 걱정된다기보다, 자네를 제외한 다른 학생들에게 어떤식으로든 영향을 미칠까봐 걱정되는 거라네. 출석도 하지 않고, 교내 공연도 참여하지 못하는데 자신보다 성적이 높다면 누가 달가워하겠나?”

학과장이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도 자네에게 질투가 나는데, 이미 연예인이라는 욕하기 좋은 핑계거리까지 있지. 자네를 씹다보면 학교를 씹게 되고, 자네를 편애하는 교수들에게도 적의를 품을 수 있네. 자네야 학교를 떠나 현장으로 피신하면 그만이지만 이곳에 남겨진 학생들은 피해를 받게 되는 거지.”

설명을 들으며 이도원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아직은 제대로 된 교육자들이 많구나.’

보편적으로 학교는 연예인을 환영한다.

그만두려하면 오히려 잡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 홍보에 플러스 요인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관심을 받는 해당 학교 출신의 배우나 가수가 활동을 하면 알게 모르게 학교 홍보도 동시에 되는 셈이었다.

심지어 해당 학교의 연극영화과라면 많은 배우들을 배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부심과 전통이 되는 법이다.

그런데 학과장은 어정쩡하게 하려면 그만두라고 말하고 있었다.

“학업과 활동. 어느 하나 게을리 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도원은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학교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적다고 교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연기란 학문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그것이 이도원이 원하는 바였다.

‘그걸 현장에서 적용해 본다.’

이도원은 남들이 연기를 잘한다고 해서 안주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평생토록 개발을 멈추지 않아야하는 것이 이도원의 뚜렷한 배우관이었다.

일례로 이도원은 매번 새로운 배역을 만났을 때마다 첫사랑에 빠진 것처럼 가슴이 설렜다. 무한한 상상력으로 발상을 전환하고, 새로운 각도로 접근하고, 한 번도 가진 적 없었던 사상과 감정을 이해하는 일이 즐거웠다.

‘늘 새로움과 마주하는 직업.’

이도원이 연기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활활 타오르는 눈빛을 본 학과장은 가슴 한구석이 찌릿찌릿 했다.

영화 상영 전 극장에 앉아 오프닝을 기다릴 때처럼 기대감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이도원의 열정이 전염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말했다.

“…학교에 나올 수 있거나 시험을 볼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직접 출석하게. 촬영 일정으로 힘들 땐 리포트로 대신하지. 다른 학생들이 제출하는 리포트 보다 높은 난이도로 제출하게끔 다른 교수들에게도 말해둘 생각이야. 자네는 직접 선배 배우들을 만나고 있고, 프로무대에서 뛰고 있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 보다 유리한 조건이라고 생각하네. 괜찮겠나?”

이도원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학과장이 말했다.

“알겠네. 자네에게 남들보다 어려운 과제를 내주는 대신, 자네가 시간에 쫓기는 부분을 감안해 학생들에게 공개된 정보들을 따로 보내주도록 하지. 교내공연, 워크숍, 수업내용, 발표논문 등 하나도 빠짐없이. 이건 내가 직접 처리할 생각이니까 문의할 점이 있거든 내게 직접 전화하도록 해.”

학과장은 명함을 건넸다.

잘 받아둔 이도원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이도원은 대답하면서도 설렘과 부담감이 반반이었다.

자신 있게 말했지만 일과 학업을 모두 소홀하지 않을 수 있을지.

아직은 확신할 수 없었다.

*

전국 열일곱 개 관에서 무대인사가 진행됐다.

열 개 관을 돌았을 때 즈음 마침내 차기작 <투사>의 스케줄이 나왔다.

이도원은 오전 무대인사와 오후 광고 촬영을 마치고 회사로 들어가는 길에 연락을 받았다.

정확히는 오준식이 전화를 받고 전해주었다.

“<투사> 대본 리딩은 10월 10일 토요일이야.”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은 날짜를 셈했다.

한 달 정도가 남아있었다.

지금은 선선한 날씨지만 그때쯤이면 슬슬 쌀쌀해질 테고, 촬영은 겨울부터 여름까지 진행될 확률이 높았다.

특히 액션사극은 배우들의 합이 잘 맞아야하고, 규모가 큰 장면이나 배우들이 승마 등에 익숙해지는 시간도 필요해서 기간을 훨씬 길게 잡고 촬영에 들어간다.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오준식이 짓궂게 놀렸다.

“고생길이 훤히 보이네.”

“남 말 하는구나.”

이도원이 씩 웃으며 앞좌석의 두 사람에게 말했다.

“내 고생은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의 고생이기도 하지.”

오준식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옆에서 보고 있던 유성연이 깔깔댔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도 재밌겠다, 사극이라니. 방송국 의상 팀에서 일할 때 사극하면서 죽고 싶었는데. 호호, 천 명 분 옷을 만들었다니까? 근데 이번에는 드라마 사극도 아니고 블랙버스터 급 영화 사극이라니… 내가 배우 한 명만 신경 써도 되는 스타일리스트라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몰랐는데, 유성연은 말이 많은 편이었다.

재잘대는 그녀를 보며 오준식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얼굴이 귀여워서 좋아했었는데… 볼수록 정말 내 스타일 아니야.’

오준식은 고개를 흔들었다.

두 사람을 보며 웃은 이도원이 불쑥 물었다.

“며칠 전에 온 신인은 잘하고 있어?”

“맞다. 아직 얼굴 못 봤지? 이따 오후에 <라이브 연예계> 인터뷰 있는데, 아마 거기서 볼 수 있을 거야. 그쪽으로 첫 출근하기로 돼있거든.”

“왜?”

이도원이 고개를 갸웃하자 오준식이 말했다.

“<투사> 후반에 조단역으로 들어가기로 되어있어. 그 전에 웹 드라마 하나 계약돼 있고. 홍보 차원에서 내보내는 거지. 그 녀석 하나로는 약하니까 너랑 묶어서 출연하는 거고.”

오준식은 씩 웃으며 덧붙였다.

“이렇다 할 커리어도 없는 녀석을 <투사>에 집어넣은 것도 끼워 팔기 개념. 네가 섭외에 응하는 조건으로 백 프로덕션에 조단역 자리 하나 달라는 거였지. 그 자리로 이번에 온 신인이 들어가는 거야.”

기획사에선 주연을 투입시키고 아직 인지도가 약한 배우들을 끼워 파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한 영화에 같은 회사 출신의 주연 배우와 조연들이 함께 출연하는 일이 잦았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결과는 남녀 주연을 한 회사에서 독점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남녀 주연 모두 배역 이미지에 적합하고 인지도가 높은 배우가 아닌 이상 기획사 측에서 해당 영화에 투자한다는 전제를 깔고 진행된다.

이도원이 활동하며 알게 된 부분은 딱 이쯤까지였다.

“그럼 여배우도 우리 쪽에서 정할 수 있나?”

“음… 나도 거기까진 잘 모르겠는데.”

오준식이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이도원은 질문을 바꾸었다.

“여배우는 정해진 거야?”

“아직 정해지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 리딩 날짜가 정해진 건 더 지체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래도 발 등에 불 떨어졌으니까 머지않아 결판이 나지 않을까?”

그 말을 들은 이도원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프리프로덕션 단계부터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회사에서 <투사>에 투자하는 일은 없다. 주연으로 집어넣을 소속 여배우도 아직 없지. 여기서 박아현을 추천하면 어떻게 돌아갈까?’

박아현은 개런티가 높지 않았다.

더구나 아직까지 연기력이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대로 두면 블랙버스터급 영화인 <투사> 주연으로 물망에 오를 일은 없을 터였다.

애초에 많은 섭외비용이 책정됐기 때문에 굳이 검증되지 않은 여배우를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안되겠군.’

그럼에도 이도원은 포기하지 않고 확인차원에서 물었다.

“준식아. 이번에 갈등이 빚어졌던 여배우가 누구야?”

“윤지민.”

타임 슬립 전과 달라진 점은 없었다.

윤지민은 톱스타 급 여배우였다.

<투사>를 침몰시킬 장본인이기도 했다.

‘좀 더 파고들 방법이 없을까?’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 수가 없으니 답답했다.

섭외단계에서 왜 갈등을 빚었는지.

투자사, 제작사, 기획사, 연출부 간에 어떤 이해관계가 얽혀있는지.

훤히 알고 있어야만 여배우 교체의 가능성이 생긴다.

그런데 이도원이 알고 있는 사실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알 만 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

“준식아. 대표님과 미팅 좀 잡아줘.”

“알겠어. 근데 왜 갑자기?”

오준식이 묻자, 이도원이 대답했다.

“박아현이 이번 영화 여주인공으로 들어가면 그림 좀 나올 것 같아서. 아직까진 같은 기획사도 아니니까 우리 쪽에서 몰래 밀어준다고 해도 문제될 건 없고. 어차피 내년 삼월이면 박아현은 우리 회사로 넘어올 것 아니야? 그때쯤이면 한참 촬영 중일 텐데, 나쁠 거 없잖아.”

오준식은 이도원의 부연설명을 전혀 다른 쪽으로 해석했다.

“차지은인 줄 알았더니, 박아현이야? 너 그렇게 두 여자 사이에서 결정 장애 일으키면 안 돼. 그거 상대방 피 말리는 짓이라고.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다, 이거야.”

그 말에 유성연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려운 이야기가 오고 가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고 있던 찰나에 잘됐다 싶어 끼어든 것이다.

“도원이랑, 박아현이랑 차지은 사이에 뭐가 있어? 설마 삼각관계 뭐 그런 거야?”

추측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이도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두 사람의 뒤통수를 봤다.

“준식이는 운전이나 하고 누나도 좀.”

오준식이 굴하지 않고 자신의 추측이 제법 신빙성이 있다는 태도로 물었다.

“아니면 차지은도 있는데 왜 박아현이야? 차지은도 내년만 지나면 우리 회사로 넘어올지 모르는데.”

이도원이 헤드레스트를 툭 치며 말했다.

“멍청아, 걔는 레드 엔터 대표한테 찍혔잖아. 그냥 두고 보겠어? 게다가 내년 지나면 영화가 개봉하고 한참 후인데, 우리 회사로 데려올 애 개런티 올려줘서 어쩌자는 거야. 참도 어서 데려가세요, 하겠다.”

“그건 그렇네. 그래도 영화 망하면 개런티 떨어질 수도 있지 뭘…….”

오준식이 구시렁거렸다.

이도원은 고개를 흔들며 부탁했다.

“무튼, 대표님이랑 미팅 잡아줘.”

< 충무로의 블루칩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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