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89화 (89/178)

< 충무로의 블루칩 (2) >

“박아현?”

뜬금없는 이름에 이상백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이도원은 그를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박아현의 계약기간은 내년 삼월까지입니다.”

“박아현을 스카우트 하잔 소리냐?”

이상백이 묻자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계약금만 맞으면 데려올 수 있을 겁니다.”

“…박아현이랑 이번 영화 같이 들어갔었지? 둘이 뭔가 오간 이야기가 있구나.”

“네. 우리 회사 수익분배비율을 알고도 계약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계약금 미정인 상태로 싸인까지 받아뒀습니다.”

곁에 앉은 오준식은 커피를 홀짝이며 눈치를 봤다.

이상백은 고개를 숙이고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의외로 노하지 않고 대답했다.

“잘했다.”

“푸흡!”

오준식이 마시던 커피를 도로 뱉었다.

이도원 역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본 이상백은 오히려 웃음을 터트렸다.

“의외라는 반응이구나. 왜, 내가 화라도 낼 줄 알았니? 백 프로덕션이 계약조건을 타 기획사들 보다 낮춘 것과 신인과 배우 관리비용에 많은 투자를 한 것은, ‘사람으로 사람을 얻는다’는 회사 이념이 뒷받침 된 결과다. 생각보다 빨리 성과가 나타난 셈이지만 우리는 이런 패턴으로 배우유입이 될 때를 기다리고 있었어. 조건이나 돈으로 얻은 사람은 갈라서기 쉽지만, 사람으로 얻은 사람은 신뢰라는 끈으로 꽁꽁 묶이게 되거든.”

이러한 부분을 구구절절 밝힌 적이 없던 이상백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윽고 이도원이 물었다.

“초반의 과도기를 감수하고 그런 계약조건을 만드신 거로군요.”

“우린 기성배우들의 계약비율이 불리한 대신 더 많은 투자를 한다. 대외적으로 잘 알려진 전문가들이 아닌, 업계 최고의 실력자들에게 관리를 받을 수 있지.”

이상백은 자랑스럽게 말을 이었다.

“배우의 이미지를 만들고 관리하는 트레이너들, 뷰티아티스트들, 매니저들, 작품을 선택하는 전략기획팀 모두 업계 최고다. 우리 소속 배우들은 질적으로 다른 관리를 받는다는 걸 체감하게 되겠지. 굳이 계약조건으로 현혹시키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입소문이 돌게 될 거다. 단지 그때까지 좀 더 시간이 걸릴 뿐이야.”

설명을 들은 오준식이 물었다.

“창립 초반에는 대세를 따르고 차후 방향을 바꾸셔도 되지 않나요? 그런다고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요. 외려 그 용단에 찬사를 보냈으면 보냈지…….

이상백은 고개를 저었다.

“신뢰를 생각한다면 번복하는 건 좋지 않다. 번복한다는 건 앞으로도 번복할 수 있다는 의미거든. 우리 회사의 이념을 보고, 듣고, 선택했는데, 그게 바뀐다면 얼마나 큰 실망이 될까? 그럼 기존에 있던 배우들은 불안정한 느낌을 받게 되겠지.”

이상백은 과연 어른이었다.

분명 이상을 꿈꾸지만 사업수완이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이도원은 오히려 자신이 단면적인 부분만 보고 오해했다는 걸 깨달았다.

한편 이상백이 덧붙였다.

“회사가 어려울 때조차도 이념을 바꾸지 않는 곳이라면 앞으로도 변치 않을 거라는 신뢰를 가질 수 있을 거야. 굳건한 회사 이념을 지키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하나의 이념으로 뭉칠 수 있다면 높은 파도를 만나도 살아남을 수 있지만, 이념을 잃고 침몰하는 회사라면 그건 회생불가다. 위기를 간신히 극복한다고 해도 그땐 이미 원동력도, 의욕도 모두 잃어버린 뒤일 테니까.”

이도원과 오준식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이도원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계약 조건 자체가 당장은 불리한 점일지 몰라. 다른 회사들에서도 이걸 백 프로덕션의 단점으로 인지하고 있겠지. 그래서 더더욱 백 프로덕션만의 핵심적인 장점이 될 수 있다. 잘만 되면 견제를 피하면서 서서히 시장을 장악할 수 있어. 입장 바꿔 생각해 보자. 내가 기성배우라면 돈이 탐날까, 명예가 탐날까?’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는 답안이었다.

‘어차피 광고만 찍어도 돈은 굴러들어온다. 하지만 훌륭한 사람들에게 트레이닝을 받고, 많은 작품들 중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마음껏 선택할 수 있다는 건 탐나는 일이야. 명예는 배우 혼자만의 힘으로는 쌓을 수 없으니까.’

이도원은 소파에 등을 묻었다.

생각해보니 그가 신인이었음에도 많은 작품들 중 골라서 참여할 수 있었던 건 오롯이 백 프로덕션의 역량이었던 것이다.

‘미래를 알고 있는 내게는 백 프로덕션이 신의 한수였어.’

그만 침몰하는 백 프로덕션을 견인하는 게 아니었다.

백 프로덕션 역시 이도원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있었다.

완벽한 상호작용이 만든 결과가 지금의 이도원이었다.

이도원은 백 프로덕션의 이념을 들은 소감을 확신어린 한 마디로 대신했다.

“잘 될 거예요.”

*

다음 날.

집에서 눈을 뜬 이도원은 심호흡을 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방망이질을 해댔다.

모처럼 익숙한 꿈을 꾸었다. 타임 슬립한 뒤 한동안 시달렸던 악몽이었다.

아직도 꿈에서 본 죽음의 순간이 뇌리에 남았다.

“후우…….”

나직이 숨을 흩트린 이도원은 누운 채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꿈이야 꿈.”

이도원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렇게라도 자각하지 않으면, 오히려 지금 순간이 꿈은 아닐까 두려운 마음이 물밀 듯 밀려오고는 했다.

상체를 벌떡 일으킨 이도원은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양치를 했다.

그런 뒤 간단한 웜 업을 하고 체력단련과 화술훈련을 했다.

인간의 습관이란 무섭다.

이도원은 언제부터인가 하루라도 훈련을 거르면 온몸에 가시가 돋친 기분에 시달렸다.

그는 이어 야채주스를 갈아 마시며 모처럼의 여유를 즐겼다.

아침 일찍 나간 어머니가 식탁 위에 올려둔 신문을 읽은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대문짝만하게 <악마의 재능>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잘 나오고 있네.”

영화 성적이 좋았다.

시사회 때부터 워낙 화제가 돼서 개봉 첫 날부터 7만 명을 넘겼다.

블랙버스터로 기획된 영화도 아니었고, 신인 감독과 배우들로 구성된 영화 치고는 대단한 수치였다.

개봉 직후 막 바로 주말로 들어서며 관객 수가 증가하고 있다.

그건 주차 별로 또 다시 탄력을 받을 예정이라는 암시적인 의미였다.

“아주 좋아.”

빙긋 웃은 이도원은 베스트컨디션이었다.

그는 TV의 음악프로그램을 켜고 거실에 앉아 공책을 폈다.

펜 끝으로 마룻바닥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에 잠겼다.

“오늘이 아니면 학교 갈 시간이 없겠어.”

이도원은 스케줄을 쓰다 말고 중얼거렸다.

내일부터 쭉 무대인사와 광고촬영이 이어진다.

또한 언제 뮤지컬 일정이 잡힐지, 영화 일정이 잡힐지 알 수 없었다.

조율이야 회사에서 하겠지만 이도원 역시 그에 맞춰서 움직여야하는 상황인 것이다.

‘준식이한테 연락을 해야 하나?’

면허도 없고 차도 없다.

이도원은 진작 신경 쓰지 못한 걸 뼈저리게 후회하며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자네, 오늘 쉬고 있나?”

-아니. 쉬는 건 너지. 난 월급쟁이라 회사 나왔다. 그동안 밀린 서류업무 처리하고 있어.

“로드가 웬 서류업무?”

-스케줄 정리랑 프로필 수정. 근데 왜?

“널 사무실 지옥에서 꺼내주려고 전화했지.”

이도원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휴학 신청하러 가려고. 나 좀 데려다 줘.”

-고맙습니다. 이 배우님. 이따 뵙겠습니다.

오준식은 짐짓 사무적으로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도원은 오준식을 기다리며 뭘 할까 하다가 태블릿으로 제휴된 영화들을 구매했다.

모두가 ‘사극’이었다.

기왕 영화감상을 하려고 마음먹은 마당에 <투사> 촬영에 앞서서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모니터링 하려는 의도였다.

“보면 볼수록 쉽지 않아.”

이도원은 입맛을 다셨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이상백에게 받았던 <투사> 시나리오를 가져왔다.

그리고 지금 보는 사극들과 <투사> 시나리오 대사의 감정이나 내용이 비슷한 부분에 참고할 주석을 달아두었다. 감정이 묻어나는 단어나 문장에 동그라미를 치고 위에 흡사한 영화 제목과 배역 이름을 쓰는 식이었다.

‘이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도원은 열린 마음으로 자신의 방식을 개발했다.

작품과 인물해석은 어느 정도 마친 상태였지만 끝없이 대본 연구가 진행될수록 마음이 즐거웠다.

그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이도원은 이어폰을 빼고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뒤편에서 오준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착 삼 분 전이야. 나와.

“알겠다.”

짧게 대답한 이도원은 흰 티에 청바지를 입고 모자를 썼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그는 피식 웃으며, 스스로에게 낮고 굵직한 목소리 톤으로 말했다.

“그럼 다녀오겠소!”

*

이도원은 오준식이 운전하는 밴을 타고 흑석동의 중영대학교로 갔다.

오랜만에 찾은 곳이라 그런지 감회가 새로웠다.

마지막으로 중영대학교를 왔던 것이 군 휴학 신청을 할 때였다.

촬영 스케줄로 인한 휴학 연장은 회사에서 대리인을 보내 처리했던 것이다.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 년이 넘었네.’

그동안 군대를 갔다 오고 드라마와 영화를 찍었다.

파노라마처럼 지난 일들을 떠올리고 있을 때 밴이 중영대 공연예술원 주차장에 멈췄다.

“다녀와. 여기 있을게.”

오준식의 말에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서 내렸다.

“기다리고 계시오. 내 다녀올 터이니.”

그 말투를 들으며 오준식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또 시작이네.”

이도원은 개의치 않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연극영화과 학생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미모가 매력적인 사람이 하나씩은 끼어있고, 머리는 풀어헤치고 있으며, 편안한 추리닝을 입고 공연예술원 건물 안을 걸어 다닌다면 십중팔구 연극영화과였다.

“저기요.”

이도원이 먼저 말을 붙였다.

네 명이서 뭉쳐있던 학생들이 이도원을 보았다.

그중 여학생 둘은 입을 막았고, 남학생 둘도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도원?”

“세상에!”

“헐.”

“대박.”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감탄을 터트렸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혹시 학과장실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저도요!”

여학생 둘이 재빨리 나섰다.

남학생들은 잠시 망설이더니 은근슬쩍 가세했다.

“팬입니다.”

“영화 잘 봤어요.”

이도원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간단한 위치만 들을 생각으로 물어봤는데 길잡이를 넷이나 고용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도원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감사합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기에 이내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의외로 별다른 대화가 오고 가진 않았다.

학생들은 은연중에 이도원을 불편하게 여겼고, 또 그만큼 신기하게 여겼다.

그들은 이도원의 얼굴을 훔쳐보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근데 학교는 왜 오신 거예요? 다음 학기 휴학하러 오신 거예요?”

여학생이 모처럼 질문했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결정한 건 없고, 교수님을 뵈러 왔습니다.”

이도원은 웃는 얼굴로 대답해주었다.

여학생은 그렇구나 하며 말했다.

“학교 오세요! 오빠 중영대학교 연극영화과라는 얘기 듣고 기대했거든요. 저 <시간아! 돌아와> 두 번이나 봤어요. 진짜로요.”

“가능하면 자주 나올게요.”

그때 여학생이 학과장실 앞에서 멈췄다.

돌아온다고 돌아온 것인데 벌써 도착했다.

학생들은 하나 같이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도원은 씩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봐요.”

“네, 오빠! 안녕히 가세요.”

“아… 진짜 아쉽다.”

그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느끼며 문에다 노크를 했다.

“예. 들어오세요.”

이도원은 도망치듯 학과장실 문을 열고 쏙 들어갔다.

창가 쪽에 면접 때 보았던 학과장이 앉아있었다.

그는 이도원을 발견하고 반색을 했다.

“오랜만이군, 자네.”

이도원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살짝 미소 지었다.

< 충무로의 블루칩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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