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88화 (88/178)

< 충무로의 블루칩 (1) >

삼성동 코리아필름에서 열린 시사회는 VIP형식으로 진행됐다.

그렇다보니 영화업계 관계자들, 가까운 지인이나 특별 초청을 받은 이들로 객석이 채워졌다.

이윽고 무대로 나간 유태일 감독과 배우들은 일렬로 나열해 섰다.

유태일, 김진우, 박아현, 이도원 순이었다.

가장 먼저 마이크를 잡은 유태일 감독이 소감을 밝혔다.

“오늘 밤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번 영화가 개봉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격스럽고 기쁜 날인 것 같습니다. 이 자리는 무척 가까운 분들이나 초청받은 분들을 모셔서 더욱 떨리기도 하고요. 모두가 합심해서 찍은 영화기에 여러분의 소중한 시간이 아주 특별한 시간이 되실 거라고 자부합니다. 영화 재밌게 봐주시고요, 감사드립니다.”

그는 김진우에게 마이크를 쥐어주었다.

김진우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이번 영화에서 주인공인 형사 ‘오정태’를 연기한 김진우입니다. ‘오정태’란 인물 자체가 말이 없고 평면적인 캐릭터기 때문에 작은 움직임이나 변화만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영화 재밌게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은 박아현의 차례였다.

“저는 정태 처, ‘자순’을 연기한 박아현입니다. 유태일 감독님은 물론 뛰어난 배우들과 함께해서 너무 보람된 영화였어요. 많은 분량을 촬영하진 못했지만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더 애착이 가요. 도원 씨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호흡을 맞출 땐 무섭기도 했고…

많이 배웠습니다. 영화 즐겁게 감상 하세요-!”

객석에서 미미한 웃음이 터졌다.

박아현은 입술을 모으며 이도원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이도원이 넘겨받은 마이크를 후후 불어 확인한 뒤 말문을 열었다.

“저는 연쇄살인범 ‘윤도강’역을 연기한 이도원입니다.”

이도원은 뒷얘기가 궁금하도록 조금 느릿하게 덧붙였다.

“폭력을 유희처럼 느끼는 인물을 연기해야 했습니다. 동시에 우리 주변에 흔히 있을 것 같은 일상적인 모습으로 경각심을 심어드리려 노력했습니다. 영화 재밌게 보시고요, 감사합니다.”

유태일 감독과 배우들은 박수를 받으며 나란히 인사하고 퇴장했다.

막상 끝나고 나자 허무했다.

유태일 감독이 다소 떨떠름한 표정의 배우들에게 말했다.

“원래 VIP시사회는 영화가 끝나고 무대 인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 바로 초대한 가족이나 지인들과 만나서 밥도 먹고, 술도 한 잔 하는 경우가 빈번하니까. 근데 이번에는 언론시사회 일정이랑 겹쳐서 부득이하게 상영 전에 하게 된 거야.”

배우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태일 감독이 말을 이었다.

“이제 건대입구 베스트시네마로 가서 언론시사회를 하면 되는데… 인터뷰 질문지는 미리 주니까 잘 생각해 놓고.”

그는 애를 셋 데리고 다니는 것처럼 굴었다.

김진우, 박아현 모두 시사회는 처음이었고 이도원 역시 <우리의 심장> 시사회 때 군대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번이 두 번째인 유태일 감독이 길잡이 역할을 자처했다. 유태일 감독이 긴장한 바람에 간과한 것이 있다면, 이미 배우 매니저들이 스케줄 표를 받고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유태일 감독을 비롯한 세 배우가 시사회 일정을 모두 소화했을 땐 밤 열 시가 넘었다.

그들 모두 조금 피곤한 기색을 보였지만, 비로소 영화 촬영이 끝났다는 현실을 실감한 표정이었다.

시원섭섭하고 보람된 기분이 들었지만 아직 모든 일정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마침 삼성동 코리아필름에서 열린 VIP시사회 영화 상영이 끝나는 시간이었고, 뒷풀이가 압구정에서 있었다.

따라서 유태일 감독과 배우들은 뒷풀이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이도원은 밴에 올라 고개를 저었다.

“난 어째 촬영 보다 이게 더 힘들다.”

오준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천생 배우라 그렇지 뭐. 그나저나 네가 기뻐할 소식이 있는데. 오늘은 시사회 뒷풀이고, <악마의 재능> 쫑파티는 따로 개봉 당일인 8월 15일 오후 8시에 있다고 합니다.”

“뭔 놈의 파티를 몇 번을 하는 거야?”

이도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준식이 낄낄대며 약을 올렸다.

“신인이니까 여기저기 얼굴 비추는 게 낫고요. 전부 싹! 다! 하나도 빠짐없이 참석하셔야 합니다. 이 배우님. 흐흐.”

VIP시사회에는 가족이나 지인은 물론 의외로 많은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유태일 감독의 업계 선배들과, 그들이 동행한 배우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 다음으로 김진우가 소속된 대형 기획사 레드 엔터테인먼트의 배우들과 가수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물론 활동 경력이 좀 있는 박아현도 적지 않은 지인 배우들과 가수들이 와서 축하해주었다.

반면 일인기획사에 가까운 백 프로덕션 소속 이도원의 테이블은 조촐했다.

<시간아! 돌아와>를 함께한 동료배우들과 정용주, 민영기가 참석했다.

‘그래도 생각보단 많이 왔네. 다들 바빴을 텐데.’

이도원은 코끝이 찡해졌다.

<시간아! 돌아와>가족들은 이런 자리가 익숙지 않은 이도원의 식구들까지 챙겨주는 의리를 보여줬다.

잠시 입구에 멈춰 있던 이도원이 테이블로 가자 자리의 모두가 반색을 표했다.

“이야, 주인공 오셨네!”

정용주가 외치며 낄낄댔다.

“어휴- 왜 그런 무서운 역할을 했대? <시간아! 돌아와>처럼 휴먼드라마를 찍으라고.”

민영기가 옆에서 눈을 흘기며 말했다.

“난 정 PD님 때문에 여기 앉았다. PD님, 전 유태일 감독 선배라고요.”

“언제까지 대학물 안에서 놀 셈이야? 이제 그만 사회라는 바다로 나오라고. 이 우물 안 개구리야.”

두 사람은 여전히 티격태격 했다.

이도원은 미소를 띠며 일괄적으로 감사인사를 했다.

“모두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역들은 안 왔어요?”

“영화 관람 등급이 청소년관람불가잖아.”

정용주의 말에 이도원이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이다원 옆에 앉은 이웃집 여고생을 바라봤다.

“넌 어떻게 봤어?”

“그게… 전 몇 개월 안 남았잖아요? 어차피 다들 본다고요.”

군데 군데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 자리의 유일한 미성년자인 그녀의 반응이 귀여웠던 것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이도원이 말했다.

“그래도 술은 안 된다. 콜라 마셔.”

“네네! 오빠, 연기 완전 대박이었어요.”

곁에서 그 말을 들은 누나 이다원이 호들갑을 떨었다.

“난 지금도 무서워. 쟤랑 어떻게 한 지붕 아래에서 잔다니?”

사람들은 동조하는 목소리로 한 마디 씩 했다.

대부분 감탄 반, 놀람 반인 감상이었다.

이도원은 한 귀로 흘리며 어머니가 앉은 자리로 갔다.

“괜찮으세요?”

“안 괜찮다.”

간결하게 대답한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그런 연기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어찌나 뿌듯하던지…….”

어머니는 불쑥 울음을 터트렸다.

이도원이 어쩔 줄 몰라할 때, 이다원이 곁에서 안아주며 입으로는 삐죽였다.

“뿌듯하단 거랑 충격 받았다는 말을 헷갈리신 거 아녜요? 이상하네-.”

그때 다가온 유태일 감독이 이도원의 팔을 잡았다.

유태일 감독은 가장 먼저 이도원의 가족들에게 인사를 했다.

학교 선배였던 민영기에게 마저 깍듯한 인사를 건넨 뒤 모두에게 양해를 구했다.

“도원이 잠시 빌려가도 될까요? 인사 좀 시키려고요.”

이도원은 영화 관계자들과 배우들이 있는 테이블로 갔다.

영화 감독들은 먹이를 본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다.

“도원 씨. 이따 매니저 분한테 명함 줄 테니 나중에 한 번 봅시다.”

“도원 씨랑 한 번 작업해 보고 싶더군요. 정말 놀라운 연기였습니다.”

배우들도 못지않게 뜨거운 반응으로 다가왔다.

“신인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한 번 호흡을 맞출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앞으로 승승장구하길 바랍니다.”

그중에는 이도원도 익히 알고 있는 유명배우들도 있었다.

이도원은 잘 달구어진 철판처럼 점차 낯이 뜨거워졌다.

“다 감독님이 편집을 잘해주셔서 그렇습니다.”

그는 모든 질문에 겸손하게 대답하며 술을 받아마셨다.

보는 눈이 많은 자리였기에 정신이 취하진 않았다.

그러나 워낙 많은 술잔을 받았기에 멀쩡하지도 않았다.

‘내일 골이 빠개지겠군.’

이도원은 그런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그럼에도 긴 밤 내내 자리를 뜨지 못했다.

*

<악마의 재능> 개봉 첫 날부터 인터넷 반응은 감탄 일색이었다.

영화 소재 상 호불호가 갈렸지만 연기력 면에서는 이견이 없었다.

백 프로덕션 사무실에서 오준식이 히죽거리며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그는 이도원을 맞은편에 앉혀두고 관람객의 영화평들을 죽 읽어 내렸다.

“남자 주인공 진짜 살인마인 줄. 이도원이 살인마인지, 살인마가 이도원인지 구분이 안 간다. 잔인한 장면을 절제된 액션으로 포장한 훌륭한 스릴러. 보는 내내 말로 설명하긴 힘든 긴장감을 느꼈다. 영화는 어떤 잔인한 행위도 보여주지 않는다, 신인배우가 보여주는 눈빛만으로 충분했다. 영화를 보고 집에 오는 길 이도원 이름을 검색하게 되는 영화. <시간아! 돌아와>에서 보여준 연기랑은 정반대, 소름끼쳤다. 기타 등등.”

오준식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인터넷 기사도 대박이네. ‘한국 영화표 살인마의 재탄생.’, ‘<양들의 침묵> 안소니 홉킨스 vs <악마의 재능> 이도원’? 이 정도야? 아무리 그래도 <양들의 침묵> 홉킨스 형님이라니… 이건 너무 갔다.”

<양들의 침묵>의 안소니 홉킨스는 1편에서 단 15분의 출연만으로 그해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또한 그가 연기한 ‘한니발 렉터’는 영화역사상 최고의 캐릭터 중 하나로 손꼽힌다.

수많은 찬사를 접한 이도원은 기쁨 반, 부담 반이었다.

‘인터넷을 보는 것만으로 이렇게 실감된다니.’

인터넷의 호평들이 빠짐없이 와 닿는다.

악평 역시 비수처럼 심장을 찌를 터였다.

이도원은 많은 배우들이 왜 악플에 시달리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때 이상백이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두 사람. 어제 <악마의 재능>팀 쫑파티는 잘 했고?”

쫑파티는 드라마 씨네마시티에서 진행됐다.

제작진은 대관료를 지불하고 상영관 하나를 대관했다.

연회장소 느낌의 상영관이었기에, 모두 함께 샴페인을 터트리며 <악마의 재능>을 관람했다.

이후에도 2차까지 달렸던 기억이 생생했다.

오준식과 이도원이 나란히 대답했다.

“예. 대표님.”

“물론이죠.”

오랜만에 마주한 이상백은 전 보다 얼굴이 훨씬 좋아져 있었다.

백 프로덕션에서 투자했던 <악마의 재능> 반응은 시사회 때부터 뜨거웠다.

이도원도 승승장구하며 큰 수익을 벌어들이는 중이었다.

즉, 어느 정도 재정난에 대한 고민을 털어낸 셈이었다.

이상백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내가 두 사람을 부른 건 <투사> 제작이 당분간 딜레이 될 것 같아서다. 여배우 섭외 문제로 투자자들과 연출부 간 대립이 있어. 초반부터 삐걱대는 것 같아서 발을 빼고 싶지만 이미 계약한 내용이라 그것도 힘들게 됐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프리프로덕션부터… 문제가 있어.’

그가 생각에 잠겨있을 때 오준식이 물었다.

“그럼 뮤지컬부터 들어가게 되는 건가요?”

“그래. 도원이 생각은 어떠니?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큰 건이야.”

이도원이 고민에서 깨어나며 대답했다.

“물론 좋죠. 뮤지컬과 연극도 병행하고 싶었거든요.”

“그래. 연극은 좀 더 여유가 생기면 하자.”

이상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나저나 이번에 신인 하나가 들어올 예정이야.”

“신인이요?”

“말인 신인 배우지, 활동 경험은 없고 내년에 고등학교 졸업하는 녀석이다.”

“그렇군요.”

이도원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처리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문제가 남아있었다.

심호흡을 한 이도원이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대표님. 박아현에 관해 할 말이 있습니다.”

< 충무로의 블루칩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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