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상하다 (9) >
이도원과 차지은.
두 사람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 앞에는 VIP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클럽 <루시>에서 봤던 한 병에 천만 원 상당의 양주 대신 7,000원짜리 순대국밥이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룸 안에서 느꼈던 불쾌하고 역겨운 기분이 해소됐다.
이도원은 손을 들어 소주를 한 병 시키고 물었다.
“그래서, 널 보자마자 오늘 밤에 같이 있자고 했다고?”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다니까요? 가랑이 사이를 발로 걷어차고 나오려다… 휴, 불쌍해서 참았죠. 그나저나 오빤 거기 왜 간 거예요?”
“나도 비슷한 이유지.”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술병을 까고 잔을 채웠다.
“…찰 물건이 없어서 말았지만.”
차지은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요즘에는 재벌가 딸도 상납을 권유 받나?’
문득 호기심이 일었지만 이도원은 구태여 묻지 않았다.
괜히 남의 속사정을 들추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때 차지은이 말했다.
“남자나 여자나 똑같다니까? 전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고말고. 사람 차이지, 사람 차이.”
맞장구를 친 이도원이 미소 지었다.
“구구절절 변명하지 않아도 절로 믿음이 가는 우리 같은 사람도 있는데 말이야.”
“그래도 부부였다면 바로 이혼사유감이에요.”
“이십일 세기는 이혼이 너무 쉬워서 탈이야.”
“흥, 간 것 자체가 잘못이지?”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만.”
두 사람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며 소주 한 잔에 안 좋은 추억을 털어냈다. 그리고 두 잔째는 다른 이야기를 안줏거리 삼았다.
그 시작은 이도원이 열었다.
“결국 네가 성인이 됐다는 이유로 기획사에서 보냈다는 건데, 그 이름 느끼한 대표 놈이 결정한 거지?”
“느끼한 이름이요? 후후. 그랬죠. 망할 새끼.”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차지은이 어울리지 않는 욕설을 뱉었다.
고개를 주억거린 이도원이 말했다.
“계약 기간은 언제까지?”
“왜요? 아현 언니처럼 스카우트하려고?”
“나름 조용히 처리한다고 했는데 소문이 거기까지 돌았나?”
이도원이 피식 웃으며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갔다.
눈을 흘긴 차지은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냥 제가 따로 친분이 있을 뿐이에요. 언니 연기 활동할 때 현장에서 몇 번 봤거든요.”
“그렇게 안 봤는데 입이 상당히 가볍네.”
“아무튼! 누가 보면 오빠가 백 프로덕션 매니지먼트 팀 실장인 줄 알겠어요. 왜 배우가 스카우트를 하고 다녀요?”
“내 취미야.”
이도원은 또 구렁이 담 넘듯 답하며 잔을 채웠다.
“그래서, 계약기간은 언제 만료돼?”
“내년까진 꼼짝 마라에요.”
“음… 오늘 일. 폭로해버리고 싶네.”
“폭로해봐야 나만 손해죠. 실질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물론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여배우로서 제 손해겠지만.”
“우리나라 연예계는 너무 폐쇄적이야.”
이도원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차지은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오빤 어느 때 보면 백 년 묵은 구렁이 같다가, 또 어느 때 보면 영락없이 애 같다니까요? 지금 삐죽거리는 것도 귀엽고.”
“너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다.”
대충 대답한 이도원은 눈을 반짝였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차지은에게 제안했다.
“일 년만 참고 계약 연장하지 말고 있어. 내가 데려올 테니까. 혼수 안 해와도 되니까 백 프로덕션으로 시집오는 걸로 하자.”
“생각 좀 해볼게요.”
그녀의 대답을 끌어낸 이도원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 두 사람은 소주를 한 병 씩 마셨을 때쯤 일어났다.
차지은이 매니저를 부를 상황이 아니었기에, 이도원은 택시를 잡아주었다.
“데려다줘?”
“그런 건 묻지 않고 데려야 줘야 멋있는 거거든요.”
차지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대답했다.
“됐어요. 가까운데요, 뭘!”
참 씩씩했다.
보통의 어린 여배우라면 펑펑 울거나, 앞으로 어쩌나 하소연을 했을 것이다. 그래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차지은은 의연했다.
놀랍고 대견한 태도를 보여줬다.
이도원은 묘한 표정으로 택시 문을 닫았다. 차지은을 먼저 떠나보낸 그는 길을 건너 줄줄이 늘어서있는 택시들 중 맨 앞 차를 타고 주소를 말했다.
택시가 성수대교를 넘어 내부순환도로를 달리는 동안 이도원은 창문을 반쯤 열어둔 채 생각에 잠겼다.
‘곧 대학교 여름방학이 시작된다.’
6월 초순이었으니, 중순부터 8월까지 중영대학교 여름방학이다. 한 학기 휴학을 해둔 상태였으나, 차기작 <투사>에 들어가려면 연장 신청을 해야만 하는 상황인 것이다.
‘학교에 한 번 가봐야겠어. 교수님이랑도 상담을 해보는 게 좋겠지.’
얼굴도 내비치지 못한 불민한 제자였지만, 그래도 지금이나마 직접 찾아뵙고 인사 겸 상담을 하는 것이 도리란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뒤흔드는 첫째 이유가 주변 상황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데 대한 고민이라면, 둘째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기대와 흥분이었다.
이도원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곧 영화 개봉이다.’
*
<악마의 재능> 스케줄이 확정됐다.
포스터와 예고편 공개는 7월 15일.
VIP시사회와 언론시사회는 8월 8일 오후 8시 삼성동 코리아필름, 9시 건대입구 베스트시네마.
본격적인 개봉 날짜는 8월 15일이었다.
이후 전국 열일곱 개 관에서 무대 인사를 하게 된다.
배우들은 그 외에도 관객과 소통하는 여러 행사에 참여해야 했다.
스케줄을 받아본 이도원이 운전 중인 오준식에게 물었다.
“<투사> 계약은 어떻게 됐어?”
“그쪽에서 개런티를 상한선까지 올려서 제안했어. 그 이상 바라는 건 도리에 어긋나서 진행하는 쪽으로 얘기가 되고 있고. 아마도 성사만 되면 <투사>스케줄 때문에라도 무대인사는 중간에 빠져야 할 거야.”
“시기가 의도적이라는 느낌이 나는데?”
“역시 날카롭네.”
감탄한 오준식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네 말이 맞아. 의도한 거야. 일부러 계약 내용을 조절하면서 질질 끈 이유도, 무대인사랑 <투사>스케줄이 겹치도록 설계한 거지.”
“무대인사에서 빠지면 이유를 밝히면서 자연스럽게 내년 개봉 예정작 <투사>에 들어간다고 알릴 수 있으니까? 저절로 <투사>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면서 홍보효과를 누릴 수 있겠지.”
“역시 똑똑해. 넌 배우를 하지 말고 전략기획팀으로 들어갔어야 됐어.”
오준식은 혀를 내둘렀다.
피식 웃은 이도원이 화제를 돌렸다.
“광고 진행 상황은 어때?”
“마침 얘기하려 했는데 회사에서 전속으로 광고 하나 넣을 예정인가 봐. 조건도 좋고 <악마의 재능>으로 강렬한 인상을 줄 걸 감안해서, 살인범 이미지 완화에도 도움이 되는 화장품으로.”
“광고주 측에서 그걸 오케이 해?”
“요새 최고 주가를 올리는 신인인데, 기피할 이유가 없지.”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이 오준식에게 말했다.
“그리고 차지은에 대한 것 좀 알아봐.”
“차지은? 역시 너 차지은을…….”
말끝을 흐린 오준식이 장난을 쳤다.
“안 돼. 장가가기에는 아직 이르지 않냐? 한참 활동하고 있는데 말이야.”
“진지하게 장난치지 말고. 차지은은 왜 활동이 뜸하지?”
“<꿈의 비상> 찍고 쉬는 중. 이라는 게 공개용 멘트인데, 자세한 내막이야 알 수 없지. 내가 봤을 땐 기획사 쪽이랑 트러블이 있어서 더는 밀어주지 않는 것 같아.”
“말 안 듣는 사냥개는 물지 못하게 굶겨 죽이겠다?”
“뭐 비슷한 느낌이지.”
“가지가지 하네.”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개새끼들.”
“원래 이 바닥이 그렇지 뭘. 계약에 묶여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둥지 잘 옮기면 살아남는 거고. 근데 레드 엔터가 버린 카드를 누가 쓰겠어? 잘 길들인 노비 하나 얻자고 터줏대감을 적으로 돌리는 꼴인데.”
“말이 좀 그렇다? 노비라니.”
“레드 엔터 사정이 그렇다는 거지.”
오준식은 한숨을 푹 쉬었다.
“난 레드 엔터 오디션에 떨어진 걸 감사히 여긴다. 돈을 잘 벌게 해주면 뭐해? 그것도 화려한 생활이 전부인 사람이나 잘 맞는 거지, 개처럼 굴리는데.”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차지은은 예전부터 불려 다니기 바빴지.’
<우리의 심장> 촬영 때도 언제나 바빴던 모습이 떠올랐다. 절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오준식이 물었다.
“그나저나 박아현 영입 건은 어쩌게? 이제 초읽기 하고 있는데, 몰래 계약한 걸 대표님이 아시는 날에는 뒤집어질걸?”
이도원은 이상백이 화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토록 인자한 사람을 화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인생의 스승이자 든든한 조력자인 이상백을 지키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감당해야 될 몫인데. 어차피 차지은까지 영입하려면 허락을 구해내야 돼.”
“차지은까지 영입한다고?”
오준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넌 너무 위험한 인간이야. 난 안전주의 스타일인데, 체질상 안 맞는 것 같아.”
짐짓 진지하게 말하지만, 이도원은 그게 농담임을 알고 물었다.
“내 편이 되어줄 거지?”
“아니, 난…….”
“네가 거절하면 난 매니저를 바꿔달라고 건의할 거야. 신용운 선생님이 오늘부터 네 연기를 봐주신다고 하셨는데…….”
“뭐어?”
오준식이 흥분하다 말고 차를 대로변에 세운 뒤, 마저 흥분했다.
“그게 진짜야? 씨이… 꼭 말을 해도 그런 식으로 해요. 매니저를 바꾸긴 왜 바꿔? 당연히 네 편이지.”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이도원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오준식은 대로변을 벗어나 다시 운전을 했다.
“근데 진짜 신용운 선생님이 내 연기를 봐주신대? 그냥 앞에서 하면 막 보기만 하신다는 거 아니지? 가르쳐 주신다는 거 맞지?”
*
2020년 8월 8일.
<악마의 재능> VIP시사회는 강남구 삼성동에 소재한 코리아필름에서 열렸다.
<악마의 재능>의 감독 유태일과 주연인 이도원, 박아현은 뒷문을 통해 극장 안의 VIP 대기실로 들어갔다.
김진우는 광고 촬영 때문에 조금 늦는다는 연락이 온 상태였다.
한편 상영 삼십 분 전부터 초청 관객들이 영화관 내부를 채웠다.
극장 매점 코너에선 단체에 대비해 팝콘과 음료를 준비했고, 안내를 맡은 아르바이트생들 역시 배우 입장 라인과 VIP입장 라인을 나누며 바쁘게 움직였다.
시사회에 초대받은 배우들도 속속들이 영화관에 입장했다. 그중에는 <시간아! 돌아와>에 출연했던 배우들도 보였다. 이도원이 일찍이 초대권을 보낸 것이다.
또한 가족이나 지인들은 다른 관객들처럼 정문으로 입장했다.
이도원의 경우 친누나인 이다원이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시사회 초대권을 보내주기로 약속했던 이웃집 여고생 역시 두 사람과 함께였다. 문자로 그들이 왔다는 연락을 받은 이도원은 새삼 가슴이 울렁거렸다.
‘하필이면 연쇄살인범 역할이라니.’
어머니께는 초대권을 드리지 말 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그때 옆자리에 앉아있던 박아현이 미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기분 어때? 엄청 떨리지?”
“조금.”
이도원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건 평소 말이 많던 박아현도 조용했다. 비록 조단역이었지만, 박아현 입장에서도 긴장이 되긴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때 유태일 감독이 손목시계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8월 8일 오후 8시, 개봉 십 분 전이다.”
마침내 <악마의 재능>이 첫 상영을 앞두고 있었다. 세 사람은 기분 좋은 초조함을 음미하며 대기했다.
상영관 안에서 예고편이 나올 시간쯤, 마지막으로 김진우가 도착했다.
김진우는 이도원을 보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를 본 박아현이 이도원에게 물었다.
“왜 저래?”
이도원이 대답하려 할 때였다.
대기실 문을 살짝 연 관계자가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배우분들은 2분 뒤 영화 시작 전 입장하시겠습니다.”
죽을 고생을 하며 촬영한 <악마의 재능>.
이도원 인생의 첫 무대인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비상하다 (9)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