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86화 (86/178)

< 비상하다 (8) >

홍보영상제작은 생각보다 빠르게 마무리됐다.

영화 콘셉트대로 사진을 촬영하고 간단한 인터뷰를 딴 것이 전부였다.

촬영이 일사천리로 끝나고, 주차장에 내려왔을 때 김진우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오늘 시간되면 술이나 한 잔 할까?”

이도원은 전날 술이 떡이 되게 먹었기에 아직도 속이 쓰렸다.

만약 다른 사람의 제안이었다면 단박에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진우가 먼저 다가오는 것도, 술을 먹자는 제안을 하는 것도 의외였다.

이도원은 의구심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괜찮습니다.”

“저녁 아홉 시, 청담동 <루시>에서 보기로 하지.”

<루시>가 뭐하는 곳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각자의 밴에 오르자 오준식이 물었다.

“김진우가 웬일이지?”

“나도 그게 궁금해서 승낙했다.”

이도원은 휴대폰으로 <루시>란 곳을 검색했다.

고급 룸 식 술집이었으며 사진만 봤을 땐 비즈니스 장소로 애용되는 곳 같았다.

이도원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물었다.

“단 둘이 룸 식 술집을 갈 이유가 있나?”

“왜? 김진우가 그런 곳에서 보재?”

오준식이 잠깐 생각하더니 되물었다.

“여자 들어오는 데는 아니고?”

이도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런 곳은 아니야. 그냥 비싼 룸 술집 같은데?”

미간을 찌푸리고 중얼거리던 오준식이 씩 웃었다.

“그거네.”

“그거?”

이도원의 물음에 오준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폰서.”

곁에 있던 스타일리스트 유성연이 뜨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요새도 그런 게 있어? 정말로?”

“누나는 너무 순진해서 탈이라니까? 당연히 있지. 특히 김진우는 스폰서를 아주 잘 다루는 것 같더라만.”

오준식은 이도원의 지시로 한동안 김진우에 대한 소문에 귀를 기울였다.

그 결과 대충 짚이는 바가 있는 오준식이 물었다.

“어떡할 거야? 괜히 한 데 묶였다가 일 치룰 수도 있어.”

“갔다가 그런 거면 바로 나오지 뭐.”

이도원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도원은 지금 상황을 확신하고 있었다.

‘언제 적으로 돌아서도 이상하지 않은 상대의 약점은 많이 쥐고 있을수록 좋다. 김진우는 날 욕심이 많은 신인 정도로 보고 있어.’

김진우가 그를 믿어서 부른 건 아닐 터였다.

다만 이 바닥 생리가 그렇듯, 권력과 지위를 가진 스폰서에 관한 일을 감히 입에 담을 수 없으리라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날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군.’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김진우는 지난 기간 동안 스폰서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고 그들이 가진 부와 권력에 도취돼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을 터였다.

김진우는 그들이라면 어떤 위협으로부터라도 자신을 지켜줄 거라고 믿고 있을 테고, 오로지 그들에게 잘 보이려는 의존적인 목적만 가졌을 것이다.

‘넌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어. 돈이든 권력이든, 이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다는 사실.’

이도원은 오늘 자리에서 스폰서란 자들의 면면을 빠짐없이 기억해 둘 요량이었다. 스폰서를 영화판에서 쫓아내겠다는 훌륭한 영웅심은 아니었다.

다만 언제고 접촉해 올 외부적인 손길에 영향 받지 않아야겠다는 정도의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러려면 돌아가는 상황을 봐 둘 필요가 있었다.

이도원이 주식을 매수해 재산을 불리려는 것도 원래는 백 프로덕션을 구제하기 위해서가 아닌, 외압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는 목적이었다.

‘깨끗한 연예계 만들기 따위에는 관심 없지만… 만약을 대비해 무기를 한두 개 쯤 마련해 두는 건 나쁘지 않지.’

이도원은 피부관리와 헬스 트레이닝, 연기 트레이닝을 받고 청담동 <루시>로 향했다.

스타일리스트 유성연은 이미 퇴근한 상태였고 오준식이 남아 이도원을 <루시> 앞에 내려주고 물었다.

“기다릴까?”

“내가 애냐. 괜찮아.”

“조심해. 술집에 간 것 자체로는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쓸데없는 일에 연류 될 수도 있어. 그럼 다 끝장이야.”

“괜한 일 안 만든다.”

짧게 대답한 이도원이 <루시>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로 내려가자 종업원이 다가와 물었다.

“예약자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김진우입니다.”

“그런 분은 없는데…….”

말끝을 흐린 종업원은 난색을 표하다 말고 화색을 띠었다.

“아, 잠시만요!”

종업원은 지배인인 듯 보이는 남자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 돌아와서 말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통로를 지나 예약된 룸의 문이 열리자 술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상 위에는 고급양주와 샴페인이 깔려있었고 김진우가 손을 들며 환영했다.

“오, 왔어?”

그는 전에 보인 적 없는 미소를 드러내며 이도원을 소개했다.

“누나가 그렇게 보고 싶다고 했던 이도원 배우 납셨습니다.”

김진우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이도원을 낯선 여자 옆에 앉혔다.

자리에 있는 스폰서들은 길을 지나다니다 보면 눈에 띌 만큼의 미모를 가졌지만 은근히 인위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성형 한 번 잘 됐네.’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저항하지 않고 엉덩이를 붙였다.

바로 옆에 앉은 여자가 반갑게 술을 따라주었다.

“이야, 반갑네요! 진우가 데려온다고 호언장담 했지만 진짜 볼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드라마 잘 봤어요.”

그녀는 친근하게 이도원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이도원은 굉장히 불쾌한 상태였지만 티를 내지 않고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는 김진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옆에 앉은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김진우는 현장에서 보인 적 없는 풀어진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도원은 그 표정이 가식이란 걸 어렵지 않게 느꼈다. 껍데기 안에 감춰진 속마음은 분노와 모멸감일 것이다.

‘성미에 맞을 리가 없지.’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옆자리의 여성에게 마주 술을 따랐다. 콜콜콜- 떨어지며 잔을 채우는 샛노란 술을 바라보던 그녀가 물었다.

“이런 자리 와 본 적 있어요?”

“아니요. 처음인데 나쁘지 않네요. 미녀도, 술도 있고. 제가 계산해야하는 건 아니죠?”

이도원의 질문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한편 김진우는 속이 뒤틀렸다.

‘당장 뛰쳐나갈 줄 알았는데…?’

중견기업인 대선 타이어의 막내딸이 보고 싶다고 해서 부르긴 했다. 어차피 자신은 부르는 데까지 부탁을 받았으니 만남만 성사시켜주면 뒤끝이 어찌되든 무관한 것이다.

또한 김진우는 이도원이 이런 자리를 기피할 줄로 예상했다. 오히려 대선 타이어의 막내딸에게는 빚을 하나 떠안기고, 이도원에게 스폰서를 빼앗길 걱정도 없으니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었다. 그런데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이도원이 자리에 금방 적응한 것이다.

“…진우 형이랑 딱 붙어서 뒹굴었다니까요? 상대가 여자라도 힘에 부쳤을 텐데, 남자랑 열일곱 시간을 뒹굴다니 죽을 맛이었죠.”

설상가상으로 자리에 모인 스폰서 모두가 웃음을 터트리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도원은 아직 개봉하지 않은 <악마의 재능> 촬영 장면을 이야기해주면서, 현장 뒷이야기를 미리 듣는다는 우월감과 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동시에 자극하고 있었다.

“어쨌든 제 얘길 들었으니 영화를 더 재밌게 보실 수 있겠네요. 아마 보시는 동안 아! 저 장면이 그 장면이구나! 하실 수 있을 거예요. 남자친구 분들 한테도 알려주시고요.”

눈을 찡긋하며 씩 웃는다.

그 표정을 보는 김진우는 미칠 노릇이었다.

‘저 새끼, 대체 뭐야?’

이도원은 대본 리딩 때부터 자신이 스폰서가 있음을 경멸하는 태도로 비꼬았다. 적어도 김진우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런데 막상 스폰서들과 자리를 마련해주니 자신 보다 한 술 더 뜬다.

너무 능수능란 하다.

‘…죽 쒀서 개 주게 생겼군.’

김진우는 위기감을 느꼈다.

오래 관계를 유지한 김진우는 똥차고 이도원은 신차다.

스폰서들은 자신의 권력만큼이나 실증을 잘 느낀다.

이도원이 이런 태도를 보일 줄 알았다면 김진우는 이 만남을 주선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사사건건 내 앞 길을 훼방 놓는 거지?’

김진우는 주마등처럼 <악마의 재능>에 섭외되기까지 과정이 떠올랐다.

KAS 국장 딸에게 술시중 노래시중을 든 대가로 드라마 외주 제작사 대표와 점심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세 사람은 점심을 먹고 헤어졌고, 제작사 대표는 KAS국장 딸의 부탁을 부담스러워하며 오디션 하나를 소개해주었다.

그게 바로 <악마의 재능> 주연 오디션이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당당히 오디션에 합격할 수 있지 않았냐고?

만약 이런 수단을 쓰지 않았다면 당장 아버지인 김봉민 의원의 방해 공작이 이어졌을 터였다. 스폰서의 개입이 없었다면 영화 투자자들에게 손을 써서 김진우의 섭외를 좌초시켰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김진우가 하필 언론 쪽에 스폰서를 만든 이유는 간단했다.

레드 엔터테인먼트를 쥐고 흔드는 김봉민 의원 입장에선 굳이 언론과 접촉해 새장 안의 새인 김진우를 막기에는 긁어 부스럼이요, 불편한 상황인 것이다. 막고자 하면 얼마든 막을 수 있는 김봉민 의원이기에 진흙탕 싸움이 되기 전 김진우가 패배를 시인하고 물러나는 그림을 원하고 있었다.

김봉민 의원의 방심이 김진우에게는 기회였다.

‘기회가 생겼을 때 확실하고 빠른 길을 가야 한다.’

김진우는 수도 없이 생각했다.

그런데 첫 영화에서부터 이도원이라는 장애물을 만났다.

단번에 각광받으며 비상하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됐고, 스포트라이트는 이도원의 차지가 되게 생겼다. 김진우는 촬영 내내 이도원의 능력에 눌려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심지어 비교되는 굴욕까지 겪었다.

‘그동안 굴욕감을 견뎌내며 쌓아왔던 공든 탑까지 빼앗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

김진우는 애가 탔다.

그나마 자신에게는 이도원에게 없는 편법이 있다고 자부했다.

아예 이도원을 불러서 그를 보고 싶어 하는 스폰서들과 단절시키려는 심산으로, 미리 언질해주지 않고 이 자리에 초대했다.

헌데 이도원은 예상과는 반대로 눈웃음을 치며 말하고 있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빨리와요!”

“휴대폰 뺐고 보내야 되는 거 아니야? 도망 못 가게.”

깔깔깔 웃음소리가 김진우를 괴롭혔다.

이도원은 룸을 나갔다.

김진우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잠깐 이야기들 나누고 계세요. 저도 화장실 좀 다녀 올게요.”

모처럼 굳은 김진우의 표정을 본 그녀들이 한 소리 씩 했다.

“어머, 기분 안 좋아보이는데?”

“목소리 쫙 깔고 말하는거 보니 괜히 도원이 갈구려는 거 아니야?”

“갈구지마!”

‘썅년들.’

김진우는 속으로 생각하며 대답하지 않고 룸을 나왔다.

문앞 통로에서 이도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김진우가 뒤따라 나올 것을 알았다는 듯이.

“뭐야?”

김진우가 저도 모르게 당황한 물음을 던졌다.

그때 불쑥 이도원이 손을 뻗었다. 이도원은 김진우의 뒷목을 감싸며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하나 말해줄까?”

말투가 달라졌다.

이도원은 서늘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수작질로 쌓은 공든 탑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야. 사람들이 모두 바보같이 착해서 양심을 지킨다고 생각하나?”

한 발 물러나며 천천히 떨어진 그가 김진우의 가슴을 쓸듯이 두 번 두드리고 피식 웃었다.

“더 불쌍해지지 마라. 잡아먹기도 미안해지니까.”

그 말을 남긴 이도원은 등을 돌렸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이유는 없었다.

한편 뒤에 남겨진 김진우는 돌처럼 굳어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패배감으로 머리가 마비됐다. 큰 불길이 일어나 그를 집어삼키듯 굴욕감이 자존심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

‘나쁜 새낀 줄만 알았더니 알수록 불쌍한 새끼네.’

이도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굉장히 불쾌했다. 일순 이 자리에서 김진우가 공 들인 탑을 무너트려버려야 하나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이내, 복수한답시고 자신까지 피를 뒤집어 쓰는 건 멍청한 짓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도원이 복도를 막 빠져나오려던 찰나 익숙한 얼굴과 맞닥트렸다.

딱딱한 표정의 차지은이었다.

‘여긴 웬 일이지?’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는 차림이 아니었다.

캐주얼한 블라우스에 청바지.

굳은 얼굴.

“여긴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경멸 어린 표정으로 이도원을 보며 물었다.

이도원은 어떤 해명을 하지도, 물음을 던지지도 않고 말했다.

“나가던 길이면 같이 나가지. 나도 나가던 길이었으니까.”

차지은은 이도원의 침착한 태도를 보고서야 오해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도원과 함께 <루시>를 벗어났다.

대로변에 나와서 이도원이 불쑥 말했다.

“아… 배고파. 뭐라도 좀 먹자.”

“…아무 것도 안 묻네요?”

“뭐 좋은 얘기라고.”

그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서로 알잖아? 그럴만한 위인이 못 되는 거.”

< 비상하다 (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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