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상하다 (7) >
쫑파티는 3차 호프집까지 계속됐다.
이도원은 세 달 만에 김수려를 누나라고 부르게 됐고, 다른 배우들과도 서로 휴대폰 번호를 교환했다.
스태프들을 통해 연예계의 이런저런 속사정도 들을 수 있었다. 그중에는 함께 작업하기 편했던 배우와 무서웠던 배우에 대한 일화들도 있었다.
아예 끔찍했던 배우들에 대한 말은 아꼈다. 연예계는 좁았기에 괜히 누구 뒷담을 했다가 소문이 돌고 돌아 당사자 귀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되면 서로 좋은 꼴을 보게 되진 않을 것이다.
어찌됐든 이도원은 이번 기회에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가리지 않고 어울리며 여러 새로운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었다.
‘항상 소문을 조심해야겠어.’
배우들이 현장에서까지 괜히 이미지 관리를 하는 게 아니었다.
연예계는 후문이 많은 곳이었다.
이도원은 새삼 느끼며 마지막까지 남아 인사를 나눴다.
모두가 떠나고 나서야 긴장이 풀린 듯 살짝 비틀대는 그를 오준식이 부축했다.
“어이쿠, 많이도 마셨네.”
“정신은 멀쩡해.”
이도원은 정수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들며 대답했다.
한편 끝까지 술을 자제한 오준식은 새벽 세 시 쯤 이도원을 집 앞에 내려주고 돌아갔다.
이도원은 막바로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 앞 아파트단지를 산책했다.
그때 단지 내의 24시 편의점이 눈에 띄었다.
‘아이스크림이나 먹어야지.’
이도원은 편의점에 들어갔다.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학생이 휴대폰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그는 드라마를 보는 중이었다. 이미 종영됐음에도 끊임없이 화제가 되고 있는 <시간아! 돌아와>였다.
무심코를 고개를 들었을 때, 이도원이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있었다.
‘닮은 사람인가?’
옆모습 밖에 보이지 않았기에 아르바이트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일터에 손님으로 온 사람이 ‘배우 이도원’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곳은 연예인이 많이 산다는 몇몇 동네의 아파트도 아니었다.
‘에이, 설마.’
그때 이도원이 메론 맛 아이스크림을 하나 골라 들고 카운터 앞에 섰다.
딱 정면으로 마주친 아르바이트생은 이도원의 얼굴과 가로로 세워놓은 휴대폰 화면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이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어… 이도원 씨?”
이도원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이… 이 아파트 사세요? 저도 여기 사는데…….”
“그렇군요. 그나저나 계산 좀…….”
이도원은 카운터에 올려둔 아이스크림을 눈짓 했다.
아차 싶은 아르바이트생이 바코드를 찍으며 눈을 끔뻑 댔다.
그는 슬로비디오처럼 천천히 움직이며 이도원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마음속으로는 끊임없이 고민을 하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그가 말했다.
“저, 죄송한데 싸인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물론 되죠.”
이도원은 아이스크림 비닐을 까며 서있었다.
아르바이트생이 급히 펜과 종이를 꺼내주었다.
이도원은 싸인을 하고, ‘2020년 행복하세요.’라고 적었다.
“감사합니다!”
아르바이트생의 인사를 들은 이도원은 빙긋 웃으며 화답했다.
“고마워요. 그럼.”
딸랑-.
이도원은 편의점을 나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걸었다.
아직 다소 쌀쌀한 날씨였지만 술도 깨고 기분도 좋았다.
독백대회를 준비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지나가다 들른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알아볼 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로군.’
이도원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금이야 승승장구를 하고 있더라도 사람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르는 법이다.
특히 배우에게 인기란 놈은 들불처럼 일었다가 한순간에 수그러들기도 한다.
이도원은 지금 자신이 험난한 여정의 초입에 서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꿈꾸던 배우가 될 수 있는 초석을 다졌다.”
이도원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간단히 평했다.
초석을 다진 지금을 발판으로, 어떤 배우가 될지는 모두 앞으로의 행보에 달려있었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악마의 재능>을 무사히 마치고 차기작으로 선정한 <투사>를 무사히 흥행가도로 올려놓는 것.’
<투사>의 실패요인은 명확했다.
어떤 문제로 인한 여주인공의 침몰. 그로인해 관객들은 몰입에 지속적인 방해를 받았고 작품 자체도 평가 절하됐다. 왜 중간에 배우교체를 하지 않았는지, 다시 찍지 않고 그대로 작품을 내보냈는지 지금까진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이후로 시대의 명장이었던 정윤욱 감독은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다. 반면 여주인공을 제외한 다른 배우들은 오히려 각광을 받았었지. 대체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작품을 할지 말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던 이도원이었지만, 과감한 결정을 내린 데에는 한 가지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배우에게 가장 큰 행복은 좋은 작품과 캐릭터를 연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투사>는 배우로서 충분히 탐나는 시나리오를 가진 작품이다.
캐릭터 역시 보기 힘들 정도로 완성도 높고 매력적이었다.
이도원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번만큼은 반드시 작품을 살리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성공한다면 다른 작품을 수 십 편 하는 것보다 더 큰 보람과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거야. 이 영화가 잘 나온다면 끊임없이 사랑받을 명작이 탄생할 수 있어.’
흔히 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듯이 배우 하나가 침몰하는 영화를 되살릴 수는 없다는 게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럼에도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있듯이 배우 하나가 침몰하는 작품을 회생시킬 동력을 만드는 일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도원은 어쩌면 지금이 혼자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넘어서, 동시에 영화 자체의 윤활유 역할을 해줄 수 있는 배우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실패를 각오하지 않고는 성장할 수 없다.’
이도원은 잠시 멈췄던 걸음을 뗐다.
*
촬영 스케줄이 빡빡할수록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제작비 35억에 총 85회 차.
악조건 속에서도 <악마의 재능> 촬영은 강행됐다.
여건이 안 되는 상황에서 매 순간 스태프들이 고생했지만, 유태일 드림 팀은 ‘여건이 안 되니까 안 되는 영화를 만들자’라는 합리화 따위는 하지 않았다. 여건이 안 된다고 해서 영화의 그레이드를 낮추지 않은 것이다.
유태일 감독은 클라이맥스 부분을 초반에 먼저 촬영하고, 나머지 부분은 팀을 나누어 빠르게 찍었다.
촬영 팀을 A팀과 B팀으로 나누어 각각 이도원 파트와 김진우 파트를 촬영한 것이다.
겹치는 분량을 초반에 찍고 촬영 팀마저 둘로 나뉘자 이도원과 김진우가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마침내 2020년 6월, 초여름.
<악마의 재능> 촬영이 종료되고 여러 곳에 배포될 포스터 및 홍보사진을 찍었다. 각자 스케줄에 따라 개별적인 사진촬영이 끝나고 홍보영상제작에 들어갈 때 즈음, 이도원은 김진우와 다시 만날 일이 생겼다.
영상제작 스튜디오로 가는 길.
반팔 티셔츠에 발목까지 떨이지는 청바지를 입고 단화로 마무리한 이도원은 오준식과 스타일리스트 유성연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방해하며 물었다.
“준식아. 내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
그 말에 오준식이 대답했다.
“당연히 처리했지. 회사에서 한 마디만 흘리면 네 인터뷰하겠다고 나서는 기자들이 일렬종대로 연병장 두 바퀴다. 그 뿐이냐? 하루가 멀다 하고 들어오는 광고 섭외까지. 나도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은 광고들이 있는지 새삼 깨닫는다니까? 아무리 대세라지만 신인인 네가 이 정도인데, 톱스타들은 오죽 할까. 아주 돈을 쓸어 담는 거지.”
이도원은 과장된 말투에 피식 웃었다.
그 말대로 <악마의 재능> 영화 촬영이 끝나면서 들쑥날쑥하던 스케줄이 완만해지고 광고 섭외나 인터뷰요청도 쏟아지고 있었다.
이도원은 오준식의 말을 인정했다.
“수입만 생각하면 영화나 드라마는 왜 찍는지 모를 만큼 광고가 돈이 되긴 하지.”
“그래도 뭐, 광고 개런티는 영화나 드라마 활동을 기준으로 오르락내리락 하니까. 물론 웬만해서 잘 내리진 않지만.”
“그래도 난 영화나 드라마가 더 좋다.”
그 말을 들은 오준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지요. 우리 이 배우님이 연기에 미쳐있는 걸 내가 한두 번 본 게 아니지. 암, 그렇고말고!”
보조석에 앉은 스물일곱 살의 스타일리스트 유성연이 동그란 눈을 치켜뜨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옵션으로 영화 대박 나고 올해 연말에 남우주연상까지 받으면 딱이네! 드라마 쪽 신인상은 이미 따 논 당상인 것 같은데?”
이도원이 그녀를 흘기며 대답했다.
“누나, 상줄 놈은 생각도 안하는데 괜히 김칫국 마셨다간 부정 타서 들어오려던 상복도 달아난다.”
오준식이 맞장구를 쳤다.
“나도 도원이 말에 찬성! 그리고 기다려 봐. 곧 영화 쪽에서 일복이 터질 것 같으니까.”
오준식의 말대로 곧 시사회나 무대인사 일정이 나올 터였다.
8월~10월로 접어들며 상영관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좀처럼 개봉 일이 결정되지 않고 있었지만 그것도 초읽기였다.
“그렇겠네. <투사> 섭외는 어떻게 진행됐어?”
“아직 치열한 공방전 중. 우리 회사 측에선 당연히 계약서 싸인은 이번 영화 개봉한 뒤 하자. <투사> 쪽은 먼저 계약서 싸인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
“조용현 작곡가한테 연락 온 건?”
“뮤지컬 쪽으로 진출해 볼 생각이 없냐고 하더라. 마침 중영대학교 출신 연기자끼리 뭉쳐서 하는 뮤지컬이 있는데 준비가 끝나면 내년 중순 넘어서 연습에 들어갈 예정인가 봐. 좀 크게, 오페라 형식으로. 너도 중영대 소속이니까 적합하지 않겠냐고 하더라고.”
“전략기획팀은 뭐래?”
“<투사> 촬영이랑 계산해서 스케줄 맞으면 하는 것도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래. 뭐, 최종결정이야 네가 하는 거지만. 요즘은 뮤지컬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영화 개런티와 맞먹을 만큼 강세거든.”
“나도 중영대학교 출신인건가?”
이도원은 자조적으로 물었다.
그는 바쁜 스케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휴학을 신청한 상태였다.
입학만 하고 아직 변변히 등교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의중을 대강 파악한 오준식이 제안했다.
“현역 학생들도 경험 삼아 단역으로 출연한다니까 뮤지컬을 해보는 쪽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관객들에게 영화배우 이도원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고.”
“두근거리는 무대만의 흥분도 느낄 수 있겠지”
이도원은 덩달아 맞장구를 쳤다.
스타일리스트 유성연이 물었다.
“도원이 너도 무대에 서본 적이 있어?”
이도원은 묘한 미소를 그렸다.
타임 슬립 전 무성극을 했을 땐 거의 날마다 무대에 섰다.
반면 타임 슬립 한 뒤에는 독백대회나 입시 때만 무대 위에 서보았다.
그럼에도 그때의 흥분을 잊을 수는 없었다.
오준식이 대신 대답했다.
“도원이 예전에 독백대회에서도 우승하고 그랬다니까?”
“그래?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연기를 잘하는 줄 알았더니 무대연기도 잘하나 보네. 어쩐지 목소리 톤 자체에 포스가 있더라.”
유성연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물었다.
“배우 이도원에게 무대란 어떤 의미인가요?”
짐짓 인터뷰를 흉내내는 질문에 이도원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무대는 배우의 고향이야. 마치 엄마의 품처럼, 잠시 떠나도 항상 돌아가고 싶지. 관객들과 한 공간에서 호흡할 수 있는…….”
그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찾아서 뱉었다.
“존재의미.”
< 비상하다 (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