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84화 (84/178)

< 비상하다 (6) >

마침내 마지막인 이도원의 차례가 왔다.

민영기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지각한 벌칙으로 우리 드라마의 주역인 이도원 씨의 노래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이 웃으며 환호성을 날리고 박수를 보냈다.

이도원은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바로 서서 휴대폰 액정을 보았다.

그곳에는 유명한 뮤지컬 <렌트>의 'Season of love‘ 가사가 떠있었다.

결국 선택한 곡이 입시 때 후보로 놓고 고르던 여러 작품 중 하나였다. 일단 밝은 분위기를 가진 발랄한 느낌의 곡이었기에 종방연 분위기와도 잘 맞았다.

이도원은 앞으로 나가서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

드라마 <시간아! 돌아와>의 음악감독을 맡았던 작곡가 조용현은 현장에서 음향 관련 장비를 총괄하는 음향감독과 달리 드라마 방영 기간 동안 일을 맡아 OST나 BGM을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우연히 스케줄이 맞아 평소 참여하지 않던 종방연에 오게 된 길이었다.

스태프들이나 배우들과 안면이 없어 지루하게 앉아있던 조용현은 주연배우가 노래를 부른다는 말에 흥미가 생겼다.

‘노래 좀 하는 배우들이 많지.’

은근한 기대감이 들었다.

휴대폰에서 반주가 사십 초 쯤 흘러나왔을 때.

호흡을 고르던 이도원이 입을 열었다.

“오십이만 오천육 백분의 귀한 시간-들. 우리들 눈앞에 놓인 수많은 날-.”

톡톡 튀는 반주와 이도원의 목소리가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힘을 빼고 부르는 아름다운 소리가 청중의 귀를 쫑긋 세웠다.

“오십이만 오천육 백분의 귀한 시간-들. 어떻게 재요, 일 년의 시간-.”

경쾌하고 맑은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날짜로, 계절로, 매일 밤 마신- 커피로. 만남과, 이별에 시간들로-. 그 오십이만 오천육 백분의 귀한 시간-들. 어떻게 말해요, 산다는 것을-.“

이도원은 가사를 이어갔다.

“그것은, 사-랑. 그것은, 사-랑. 그것은, 사-랑. 사랑으로-. 느껴 봐요-. 소중하고-. 아름다-워-.”

다음은 클라이맥스였다. 원곡이라면 합창에서 여성 솔로로 들어가는 부분.

이도원은 가사를 전부 편곡해 전보다 한 음 높여서 불렀다.

“오십이만 오천육 백분의 귀한 시간-들. 우리들의 눈앞에 놓인 수많은 날들. 오십이만 오천육 백분의 귀한 시간-. 어떻게 설명해요 행복하다는 것을.”

자리의 모든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뇌리로 현장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고생스럽기도, 즐겁기도 했던 만큼 다들 가슴이 달아오르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도원은 감성을 자극하는 목소리로 노래를 이어나갔다.

“깨달은 진실로, 웃었던 그 순간들로, 스쳐 간 인연들로, 지금 기억으로--. ”

장내를 꽉 채운 목소리가 천장을 뚫을 듯 솟아올랐다.

“다 함께, 시작해. 우리 같은 맘으로-. 자 우리들이 함께한 세 달을 기억해. 기억해요, 사-랑. 기억해요, 사-랑. 기억해요, 사-랑. 영원토록- 기억해요.”

이도원은 도돌이표를 생략하고 짧게 부른 노래를 끝마쳤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들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잠시 울컥했던 민영기가 목소리를 고르며 말했다.

“아- 음. 벌칙이라기에는 너무 훌륭한 노래였습니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들을 떠올리게 해주신 데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를 보던 음악감독 조용현은 닭살이 돋은 팔을 감싸고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잠깐 부른 곡의 호소력이 무슨…….’

<렌트>의 ‘Season of love‘은 너무나 잘 알려진 곡이었다. 원래는 합창이며 중간 남녀 파트가 각각 솔로가 들어가는 곡이다. 반면 이도원은 자신의 음역 대를 정확히 알고 처음부터 끝까지 솔로로 훌륭히 소화했을 뿐더러 이 곡이 가진 매력을 제대로 발산했다.

조용현은 이도원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저절로 상상됐다.

‘김칫국일지도 모르지만, 재능과 실력 모두 이대로 썩히기는 아깝다.’

그의 솔직한 판단이었다. 발성법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요즘 가수들 중에도 이도원 만큼 울림이 있는 발성이 뒷받침되는 이들은 드물었다. 뮤지컬 배우를 기준으로 삼아도 비교할 만한 상대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절로 아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지금 프로듀싱을 안 한다는 건데…….’

조용현은 머릿속으로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는 지인들을 찾아봤지만 당장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그는 일단 연락처라도 받아둘 생각으로 자세를 낮추고 배우들이 앉은 테이블로 가서 물었다.

“전 이번 드라마의 음악을 맡았던 작곡가 조용현이라고 합니다. 혹시 이도원 씨 매니저 분 계십니까?”

오준식이 손을 들며 물었다.

“접니다.”

“반갑습니다. 이건 제 명함이고…….”

조용현은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오준식이 얼결에 받자, 그가 말을 이었다.

“이도원 씨의 노래, 신선했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한 번 뵙고 논의하도록 하죠.”

“아, 예…….”

오준식은 얼떨떨하게 대답하며 자신도 얼른 명함을 주었다.

명함을 받은 조용현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조용현은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오준식이 그제까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있는데, 자리로 돌아온 이도원이 물었다.

“누구야?”

“아. 작곡가 조용현이라고 하던데.”

오준식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노래가 신선하다고 명함 받아갔어.”

이도원은 고개를 갸웃하며 피식 웃었다.

“그래?”

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오히려 함께 있던 김수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대중들에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꽤 유명한 분이야. 여러 OST 편곡은 물론 각종 CF, 예능, 드라마, 연주회에 삽입되는 음악들도 직접 작곡하셨고.”

“그래요?”

이도원이 의외란 듯 물었다. 그는 영화나 드라마 제작과정의 이면에서 활동하는 음악감독이 하는 일에 대해서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신기한 눈치였다.

어려서 아역배우부터 활동을 해왔던 김수려는 이도원 보단 아는 것이 많았기에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이번에는 딱히 노래하는 장면도 없고 해서 음악감독님과 직접 뵐 일이 없었지만, 지금 순위에 있는 우리 드라마 OST도 모두 그 분이 선택하고 편집하신 거야.”

“그렇군요.”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여전히 궁금증은 남아있었다.

“차라리 가요계 기획사 관계자라면 이해가 갈 텐데 작곡가가 왜 제 번호를 받아간 걸까요?”

“네 재능이 아까웠겠지. 그쪽 계통 사람들 끼리는 또 서로 통하니까.”

김수려는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원래 종방연에 잘 안 오실 텐데 운이 좋았네.”

노래를 잘 부른다고 명함까지 받아갔으니 이도원은 기분이 좋았다. 그는 뿌듯하게 웃으며 관심을 거뒀다.

종방연 1차는 뷔페에서 간단한 식사를 했다.

식사자리가 끝나자 성인인 스태프나 배우들이 원하는 2차 술자리로 이동했다.

장소는 인근의 고기 집이었다.

오준식이 차 안에서 말했다.

“아오, 배불러. 조금만 먹었어야 했는데 배고프다고 막 집어먹었더니 장이 가득 찼다. 고기는 또 어떻게 먹냐? 참, 그리고 네 스타일리스트 배정 됐어.”

지금까진 현장에서 스타일링을 받았기 때문에 따로 배정된 스타일리스트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으니 스타일리스트가 필요한 것이다.

엄연히 말하면 사실 이것도 좀 늦은 감이 있었다.

이도원이 씩 웃으며 물었다.

“기대해야하는 거 맞지? 실력 있는 스태프들로 뽑는다고 배우관리 팀에서 동분서주 했다던데.”

“헬스나 연기 트레이너도 최고로 배정된 거더라고. 그렇잖아도 우리 회사가 배우들의 환경조성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보니 아무래도 스태프들 대우가 좋은 편이야. 스태프들 실력은 당연한 거고. 우리보다 연상인데도 엄청 귀염상이라더라.”

오준식은 실실 웃었다.

이도원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네 생각이 훤히 보인다.”

오준식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보다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지. 너 촬영할 때도 나랑 함께 대기할 테고. 동변상련이라고, 뭔가 찐하게 통하지 않겠냐?”

“찐하긴 개뿔이.”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지만 마음 한편으로 좋은 소식이 있길 기대했다.

두 사람은 괜한 설레발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고기 집에 도착했다.

고기 집에 들어가자 자리가 모두 세팅돼 있었다.

배우들은 안내를 받아 룸 형식의 예약 석으로 갔다.

이도원과 김수려가 나란히 앉고 그 맞은편에 조연배우들이 나란히 앉았다.

처음에는 감정적으로 줄타기를 했지만 <시간아! 돌아와>를 촬영하며 많이 가까워진 ‘기태’역의 주조연 유석연이 먼저 말을 붙였다.

“정말 촬영하면서 많이 놀랐다. 나보다 훨씬 어린 후배 배우 중에 이렇게 눈에 띄는 인재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수려 팬으로서 수려랑 키스신 찍을 때 마음이 쓰리긴 했지만.”

유석연이 김수려를 보며 짐짓 울상을 지었다.

이도원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연기는 연기일 뿐이죠.”

“너 말 참 서운하게 한다?”

김수려가 이도원의 팔을 툭 밀었다.

다른 배우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단역으로 연결 씬에서 여러 번 등장했던 윤상욱이 열심히 물을 채우며 말했다.

“여러 형님들, 누님들이랑 촬영을 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특히 도원이 형님은 죽여줬죠. 매번 연기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걸 보고 있노라면 정말, 크…….”

연습생 시절을 제외하면 이 자리에서 윤상욱이 나이나 경력으로 봤을 때 가장 막내였다.

그는 호들갑을 떨며 다른 선배들 띄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기쁜 날이었기에 결과적으로 분위기를 업 시키는 데 한 몫 했다.

그때 정용주 PD와 민영기 조연출이 줄지어 들어섰다.

“아아, 다들 일어나지마세요. 작가님은 오늘 일이 있다고 먼저 가셨습니다.”

정용주가 일어나려는 배우들을 도로 앉히며 김미정 작가의 부재를 알렸다.

뒤따르던 민영기가 이도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음 작품 나오면 연락할 테니 함께하자고 너한테 전해달라더라.”

그 말을 엿들은 김수려가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방송계나 영화계나 블루칩이 됐네? 보는 사람마다 러브콜을 보내니…….”

이도원은 머쓱해졌다.

그 역시 갑작스럽게 쏟아진 관심과 칭찬이 아직 적응되지 않은 상태였다.

“좀 당황스럽네요. 부담도 되고요.”

김수려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처럼 보여도 모두 네가 쌓아올린 공든 탑이잖아? 넌 실력도 되고, 원래 겸손한 성격 같으니까, 무너질까봐 미리 염려하는 것 보다 적당히 즐기길 바라.”

“고마워요, 선배.”

이도원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김수려는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말했다.

“이제는 말 좀 놔도 되지 않나? 처음부터 끝까지 거리를 두네 아주!”

“하하, 알겠어요.”

이도원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이어 센스 있게 주류를 가장 먼저 오픈했다. '

그리고 정용주, 민영기, 각 분야 감독들, 배우들 나이순으로 잔을 채웠다.

배우들이 일제히 시선을 집중하며 정용주에게 말했다.

“감독님. 한 말씀 하시죠.”

중구난방으로 건배제의 요청이 쏟아졌다.

정용주는 잔을 들더니 짧게 말했다.

“이번 작품은 제 인생작 중 하나가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여기 있는 여러분들과 또 보게 될 테니 긴 말은 않겠습니다. 모두들 수고하셨고, 앞으로 승승장구하길 바랍니다. 건배는 사랑합니다로 하죠.”

“사랑합니다!”

모두들 잔을 부딪쳤다.

한 사람 씩 돌아가며 잔을 채우고 건배제의를 했다.

한 차례 순번이 돌자 다들 이미 취기가 올랐다.

이도원은 잠시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갔다.

눈치를 보던 윤상욱이 얼른 담배를 챙겨 뒤따라 나왔다.

“형님!”

윤상욱이 밝게 외치며 담배를 권했다.

이도원은 손을 내저었다.

“나 담배 안 펴.”

“연기도 잘하고 겁나게 잘 생긴 분이 비 흡연자라니! 반칙이네요. 여자들이 좋아하는 요건을 다 갖추셨습니다.”

칭찬이 입에 벤 윤상욱은 잔뜩 취기가 오른 표정과 말투로 떠들었다.

“그나저나 <악마의 재능> 촬영도 많이 진행됐다고요? 유태일 감독님 스타일이 빡센 부분부터 찍는다고 하시던데… 얼마 전에 진우 형이랑 술 한 잔 했거든요. 형님 파트너로 출연한 김진우요.”

“그래?”

이도원이 추임새를 넣자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진우 형도, 형님이 연기를 너무 잘하니까 신경이 많이 쓰이나 보더라고요. 형님 얘기만 주구장창 하는 것도 그렇고…….”

“그렇군.”

이도원 입장에선 별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아니면 우연인지 윤상욱이 부탁조로 말했다.

“진우 형도 알고 보면 사정이 안 좋아요. 자존심이 세고 좀 까칠해서 그렇지 나쁜 사람도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셨으면 해요. 자세한 사정이야 말 못하지만, 잘 풀리려고 할 때마다 자꾸 막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 비주얼이랑 연기력으로 아직 변변한 작품을 못 한 것도 그런 이유고요. 그래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할 수밖에 없는 거고…….”

그 말을 들은 이도원은 장례식장이 떠올랐다.

김진우의 아버지란 사람이 서자인 김진우의 앞길을 막으려고 안달이 나있었다.

그러나 이도원은 이 모든 것들을 신경 쓸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김진우는 전생에 원한도 없는 이도원을 살해했다.

그 어떤 변명을 듣던지 간에 김진우에 대한 분노는 수그러들 수 없었다.

어떻게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이도원은 몸을 돌렸다.

“다 피고 들어와. 먼저 들어간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윤상욱은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비수가 심장을 파고드는 느낌을 줄만큼 서늘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아직 쌀쌀한 날씨가 더욱 차갑게 다가왔다.

윤상욱은 담배를 끄며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그는 영영 풀리지 않을 의문을 품었다.

< 비상하다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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