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83화 (83/178)

< 비상하다 (5) >

촬영을 마친 이도원은 유태일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 배우들과 인사를 나누고 현장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 김진우의 어두운 표정을 기억했다.

‘뭔가를 느끼긴 했겠지.’

결론을 내린 이도원이 운전석의 오준식에게 물었다.

“오늘 스케줄 좀 말해줘.”

오준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김흥수 기자와의 인터뷰가 있어. 그 다음은 휴식.”

“오랜만에 여유롭네.”

이도원이 씩 웃으며 물었다.

“인터뷰 장소는?”

*

이도원이 탄 밴은 일전 김흥수를 만났던 장소인 집 근처의 <카페 360>으로 갔다.

오준식은 먼저 들어가기로 했고, 이도원은 혼자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어서 오세요!”인사를 하려다 자기 입을 막았다. 예전에는 미처 모르고 지나쳤지만 지금은 이도원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대박 드라마 <시간아! 돌아와> 주연을 했고 여섯 개가 넘는 광고를 찍었기 때문이다.

한편 김흥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가운 낯으로 말을 걸었다.

“오랜만입니다. 그간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셨더군요. 어찌나 바쁜지 얼굴 보기가 힘들었어요.”

“제가 요새 <악마의 재능> 촬영 때문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도원이 머쓱하게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김흥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음료는 뭐로 하시겠습니까? 아직도 달달한 자몽이나 모카십니까?”

“워낙 아이 입맛이라서. 오늘은 제가 한 잔 대접하죠.”

이도원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김흥수 기자는 이도원이 기획사가 없던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첫 만남처럼 편안한 환경에서의 인터뷰를 원했다. 따라서 사적인 느낌이 강했고, 김흥수도 사양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염치불구하고 더치커피로 마시겠습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이도원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한 뒤 주문을 하러 갔다.

여대생쯤으로 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은 얼굴이 온통 빨갛게 물들어서 주문을 받았다.

‘완전 멋있어!’

속마음이 표정에 그대로 나타났다.

그녀는 이도원이 메뉴를 주문하는 동안 싸인을 받을까 수차례 고민했지만 결국 용기를 내지 못하고 펜과 종이 대신 진동벨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부드럽게 웃은 이도원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김흥수는 이미 카메라와 노트북을 모두 장치한 뒤였다.

“오늘은 인터뷰를 먼저 따고 사진을 찍을게요.”

“네. 편한 대로 하시죠.”

이도원이 대답했고, 고개를 끄덕인 김흥수가 말했다.

“편하게 오랜 친구를 만나는 기분으로 응해주시면 됩니다. 저도 그런 분위기가 좋고요.”

그는 첫 질문을 던졌다.

“얼마 전 <시간아! 돌아와>가 종영됐는데요. 케이블 드라마지만 폭발적인 대중성까지 가진 작품이었습니다. 그 전과 비교해 사람들이 달라진 반응을 느끼고 있나요?”

이도원은 잠깐 생각하다 미묘하게 웃었다.

“지금도 한창 촬영 중이기 때문에 인지도를 감지할 기회가 잘 없어요. 인터넷으로 확인을 하면서도 긴가민가했습니다. 여기 종업원이 절 알아보는 걸 보고 처음으로 느끼네요. 어쨌든, <시간아! 돌아와>의 ‘최정우’가 제게 이름을 알릴 기회를 준 것만은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김흥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질문을 했다.

“유태일 감독님과는 <우리의 심장>에서부터 인연이 깊었는데요. 유태일 감독님의 이번 차기작 <악마의 재능> 섭외에는 어떤 과정이 있었나요?”

이도원이 생각을 정리한 후 대답했다.

“제가 전역했다는 소식을 듣고 감독님께서 연락을 주셨죠. <우리의 심장>도 제게는 워낙 뜻 깊은 작품이기 때문에, 엄청난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시나리오를 본 후 확신했죠.”

고개를 끄덕인 김흥수 기자가 물었다.

“이도원 씨는 계속 신인들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데 대단한 내공을 가진 선배들과 작업하고 싶은 욕심이 들지는 않나요?”

이도원이 잠시 사이를 두고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들죠. 그래도 조연으로 참여하신 선배님들을 보면서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그때 진동 벨이 울렸다.

김흥수는 주문한 음료를 가져와 앞에 두고 곧장 인터뷰의 흐름을 되찾았다.

“<악마의 재능>에선 영화계에 ‘떠오르는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두 분이 투톱체제로 방향키를 잡았죠. 이도원 씨와 김진우 씨. 두 분이 함께 연기 호흡을 맞췄을 텐데, 아무래도 함께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또래 배우들이다보니 남다른 긴장감도 있었을것 같습니다.”

“음.”

이도원은 김진우를 떠올리며 살짝 웃었다.

“네, 맞아요. 그런 건 있었지만, 전 그렇게 잘하려는 생각은 안했어요. 서로 감독님의 디렉션에 더 집중했던 것 같고요. 감독님이 조율을 잘해주셔서 그런지 서로 눈치를 보거나 잘 해야겠다는 부담을 가지기보다는 항상 기분 좋은 설렘이나 긴장감이 들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김흥수가 화제를 돌렸다.

“이번 <악마의 재능>에서 살인범 역할을 했다고 들었는데, <악마의 재능>을 촬영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뭐였나요?”

이도원은 약간 찡그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첫째는 연쇄살인범 역할을 하면서 지금까지의 이미지가 아닌, 조금 더 입체적이고 자연스러운 인물을 만들려고 노력을 했어요. 그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해졌던 것 같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함께 작업한 모두가 많은 고생을 했던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스태프들이 고생을 했습니다. 그중 숨 가쁜 추격 씬이 있는데, 여기선 카메라 감독님과 스태프들이 미리 수차례 뛰면서 호흡을 맞추고 배우가 투입됐죠. 배우가 뛰면 스태프들 열 명이 함께 뛰는 거예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지만 영화를 보셔야하니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영화라는 정도만 생각하고 봐주셨으면 합니다.”

“무릎 부상도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가벼운 찰과상이었습니다. 살짝 긁힌 정도죠.”

고개를 끄덕인 김흥수가 이도원에게 물었다.

“이제 당분간은 쉬셔야죠?”

“일단 영화 홍보 일정을 끝내야겠죠. 그 다음 일정은 차후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로 차기작에 들어가실 예정인가요?

김흥수는 조금 놀랐다.

대부분 강행군을 한 뒤에는 휴식기를 가지기 마련이다.

작품 하나를 끝내면 허탈한 기분과 함께 무기력증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배우에게 어떤 캐릭터를 받아들이는 과정 보다 힘든 것은 그 캐릭터를 완전히 내보내는 일이었다. 그 점을 떠올린 김흥수가 덧붙여 물었다.

“지금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스케줄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원래 스스로를 좀 몰아붙이는 스타일인가요?”

“글쎄요.”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는 느낌이죠. 기회가 왔을 때 누려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던 적이 있거든요.”

김흥수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저게 이십 대 초반이 할 소린가? 젊은 스타들은 대부분 빠르게 쌓아올린 부와 유명세를 즐기기 마련인데.’

김흥수는 많은 스타들과 인터뷰를 해본 경험이 있었다.

이도원이 기존에 인터뷰를 했던 신예들과 다른 점은 지금 유명세를 막 실감한 상태임에도 침착하고 한결 같은 태도를 유지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도원은 어린 나이에도 영리한 모습을 가진 배우였다. 그의 행보를 조사하다 보면 작품이나 인생의 방향성에 있어서도 탁월한 선택을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운이 좋은 건 지, 아니면 지혜로운 건 지 애매했지만 그 성과는 폭발적인 반응으로 돌아왔다.

김흥수가 말했다.

“광고 촬영도 아니고 영화를 연달아 찍는 건 심신에 많은 부담이 가지 않나요?”

이도원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계속 해야죠. 뭐든 안 쓰면 녹이 스는 법이니까요.”

*

이도원은 아직 가시지 않은 <시간아! 돌아와> 인터넷 반응을 감상하며 오준식의 밴을 타고 이동 중이었다.

그들은 고급 뷔페 <스붑>에서 열리는 종방연에 참여하러 가고 있었다. 아역 배우들이 있었기에 1차는 뷔페에서 하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운전석에서 오준식이 말을 걸었다.

“진짜 드라마 하는 동안 바빠서 그런가, 시간 엄청 빠르네. 리딩 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종방하고 쫑파티라니.”

“그러게 말이다. 차가 왜 이렇게 막혀?”

이도원은 꽉 막힌 교통상황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오준식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아직 시간 넉넉해.”

이도원은 불쑥 신경질적으로 물어본 것이 미안해졌다.

일반인들은 많아봐야 일 년에 평균 2만 킬로를 달린다. 반면 연예인들은 일 년에 평균 6만 킬로 이상을 달리고, 운전은 모두 매니저가 한다. 매니저들은 사생활이 없다시피 일할뿐더러 담당 연예인의 기분까지 모두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예전 뉴스 기사에서 봤던 통계를 떠올린 이도원은 말을 돌렸다.

“내가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말이야. 조만간 너희 할머님이랑 동생들 모시고, 우리 어머니랑 누나도 함께 가족 파티라도 할까?”

“시간이 허락하는 한해서 좋지.”

오준식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두 사람은 어느새 종방연 장소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이미 대부분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이도원과 오준식은 김수려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잠입했다.

“왔어?”

김수려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물었다.

이도원이 민망한 듯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때 앞에 나가서 사회를 보던 민영기 조연출이 이도원을 발견하고 말했다.

“우리 주인공 ‘정우’가 오늘의 지각생이군요! 벌칙으로 노래 한 곡 부르시고… 먼저 우리 드라마 <시간아! 돌아와>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대본을 만들어주신 김미정 작가님, 그리고 연출하신 정용주 PD님을 모셔서 종방 소감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박수가 나왔고 김미정 작가가 앞으로 나가 마이크를 잡았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시간아! 돌아와>의 극본을 쓴 김미정 작가입니다.”

다시 박수가 쏟아졌고 김미정 작가가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먼저 좋은 배우들을 섭외하고 <시간아! 돌아와>를 성공적으로 연출해주신 정용주 프로듀서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시청률상승에 가장 큰 탄력을 준 ‘정우’ 역할의 이도원 씨…….”

웃음이 터졌다.

김미정 작가가 덧붙였다.

“…‘수연’역할의 김수려 씨,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준 조연배우들과 귀여운 아역들까지… 모두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있어 <시간아! 돌아와>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들어가자 정용주 프로듀서가 나와 비슷한 인사말을 했다. 식탁에 둘러앉은 주조연 배우들도 각자 한 마디 씩 돌아갔다.

가장 먼저 말해야할 이도원은 지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마지막 순번에 노래까지 하기로 정해진 상태.

김수려 차례에, 그녀가 말했다.

“먼저 좋은 작품을 써주신 김미정 작가님과 훌륭한 연출을 해주신 정 감독님께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제가 연예계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준 <시간아! 돌아와>라는 작품에 대한 애착이 각별하고, 앞으로도 많이 생각날 것 같아요.

무엇보다 제 파트너인 이도원 씨가 멋진 분이라서 많이 배울 수 있었고, 재밌고 보람차게 촬영을 했습니다.”

겉치레가 없을 순 없겠지만 이어진 배우들도 저마다 조금씩 속내를 드러내며 감동을 전했다.

한편 이도원은 타 배우들의 칭찬을 한 몸에 받는 와중에도 심호흡을 하며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노래라니?’

이도원은 무슨 노래를 불러야할 지도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이런 파티 분위기에서 입시 때나 불렀던 슬픈 뮤지컬 노래를 열창할 수도 없지 않은가. 어쩔 수 없이 이도원은 휴대폰을 들고 신나는 곡을 찾았다.

곁에서 오준식이 불 난 집에 부채질을 하였다.

“화이팅!”

< 비상하다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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