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상하다 (4) >
‘상대와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
이도원은 고민하다가 유태일 감독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요청할 게 있습니다.”
“뭐지?”
“소품으로 쓰던 야구배트… 아까 보니까 소품 차에 실제 나무배트가 있던데 그걸로 쓰시죠.”
“너무 위험한데. 소품도 맞으면 아픈데, 나무배트는 죽을수도 있어.”
“그걸 대비해서 무술 감독님한테 코칭 받았잖아요.”
이도원은 전에 없이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래야 좀 더 연기가 살 것 같습니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알겠다. 대신 조심해야 돼.”
“물론이죠.”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을 보고 있던 김진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친 거 아니야?’
나무배트가 위험해서 만이 아니었다.
만약 겁을 먹어야하는 상황을 연기하는 거라면 이도원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런데 극중 이도원은 프로페셔널 한 킬러고, 고통이나 두려움에 무감각한 사이코패스다.
즉 나무배트를 눈앞에서 휘두르는 걸 보고도 표정과 동작이 경직되면 안 된다는 의미였다.
나무배트로 촬영했을 때 장점이라면 물건이 부서지는 장면이나 소음을 편집 없이 자연스럽게 가져갈 수 있다는 것 정도.
‘고작 그것 때문에 몸을 던진다고?’
이건 와이어 액션과는 달랐다.
나무배트에 맞을 확률은 그야말로 복불복이었다.
둘 중 한 사람이 조금만 실수해도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고, 골절이라도 되면 촬영을 중단해야할 지도 모른다.
‘이도원이나 유태일 감독이나, 미친놈들이야.’
김진우는 진절머리를 쳤다.
촬영이 중단되면 편집으로 때워야 한다.
그럼 클라이맥스의 완성도가 떨어질 것이다.
지금 상황은 작은 디테일을 살리겠다고 큰 위험을 감수하는 셈이었다.
“감독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습니까?”
김진우의 질문에 유태일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면 하나 하나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완성도 높은 영화가 나올 수 없다. 도원이에게 위험을 강요할 수 없기 때문에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원한 것도 이런 디테일이야. 우리는 삼 일 씩이나 이 장면을 촬영했어. 긴장하지만 않는다면 도원이도, 너도 실수하지 않을 거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는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김진우 역시 끝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 선택을 수긍했다.
유태일 감독은 촬영준비가 끝나자 나란히 기대서서 콘티를 상의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신호를 보냈다.
“배우들 위치합시다.”
촬영장소는 극중 김진우의 아파트.
영화 막바지, 드디어 증거를 손에 넣은 김진우가 이도원을 수배 때린다. 마침 해외로 도피하려던 이도원은 출국금지 상태가 되고, 계획을 방해한 김진우를 제거하러 그의 아파트로 찾아간다.
유태일 감독이 입을 열었다.
“카메라 롤-.”
카메라가 돌아가며 복도에 서있는 이도원을 담았다.
김진우는 집 안에 들어가 있었다.
유태일 감독이 외쳤다.
“레디, 액션!”
연기를 시작한 이도원이 문고리를 비틀었다.
철컥.
문이 열려있었다.
“하-. 날 기다렸다 이거지?”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문을 열어젖혔다.
“컷.”
유태일 감독이 사인을 보내고 바로 촬영이 이어졌다.
마침내 이도원과 김진우가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었다.
무술 감독이 콘티를 들고 두 사람에게 다시 한 번 설명을 해주었다. 소품이 아닌 실제 나무배트로 연기를 해야 했기 때문에 수십 번 주의를 줘도 모자랐다.
설명이 끝나고 촬영 장비들이 모두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유태일 감독이 입을 열었다.
“카메라 롤.”
실내에서 카메라 두 대가 돌아갔다.
모니터를 확인한 유태일 감독이 촬영 팀에게 자세한 지시를 내린 뒤 카메라 점검 때부터 이미 위치에 가있던 두 배우에게 말했다.
“이번에야 말로 끝내보자! 배우들 레디.”
이미 이틀에 걸쳐 실패한 장면이었다.
오늘이 삼 일차, 몇 번째 테이크인지도 기억이 나질 않을 정도로 많은 횟수의 엔지를 냈다.
현장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자 두 배우가 나직이 숨을 고르며 심신을 이완시켰다.
이윽고 타이밍을 재던 유태일 감독이 우렁차게 지시를 내렸다.
“액션!”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됐다.
문가에 있던 이도원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집에 있었네. 혼자야?”
김진우는 탁자에 기대놓은 나무배트를 집어 들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혼자다.”
“그래? 잘 됐네.”
이도원이 현관문을 잠갔다.
그 모습을 그저 보고있던 김진우가 말했다.
“제대로 한판 붙자. 네가 죽였던 사람들이 느꼈을 고통, 그대로 느끼게 해줄게.”
이도원이 피식 웃었다.
“한 번 해봐.”
그는 비꼬며 입술을 비틀었다.
입가로 섬뜩한 미소가 맺혔다 사라졌다.
이내 이도원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김진우가 그를 노리고 나무배트를 휘둘렀다.
부웅-!
이도원은 상체를 사선으로 기울이며 일격을 피해냈다.
무술 감독에 의해 미리 합을 맞춘 동작이었다. 소품이 아닌 실제 나무배트였기에 자칫 얻어맞았다간 뼈가 부러질 위험이 있었다.
“죽어!”
김진우가 외치며 연속해 나무배트를 휘둘렀다.
이도원이 두 번이나 연달아 피해냈다.
쾅, 와장창!
힘껏 휘두른 나무배트가 책장을 넘어트리고 부엌의 접시들을 깨부쉈다. 한 대만 맞아도 골절은 우습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도원은 긴장감이 치솟고 심장이 뛰었다. 그 와중에도 피하는 동작은 여유롭고 표정은 자연스러워야 했다.
‘좋아.’
유태일 감독도, 스태프들도 손에 땀을 쥐고 보았다.
한 편의 액션영화가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연속적으로 휘두르는 나무배트를 모조리 피해낸 이도원이 등 뒤의 싱크대를 잡고 김진우의 복부를 발로 걷어찼다.
“큭!”
김진우가 옆구리를 감싸며 주춤하는 사이 이도원이 앞으로 쏘아졌다. 그는 시계 줄을 쭉 빼서 김진우의 목을 휘리릭 감으며 등 뒤로 돌아갔다. 그야말로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컥!”
김진우가 나무배트를 떨어트리며 목에 감은 줄을 양손으로 잡았다.
날카로운 줄이 살갗을 파고들며 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면은 특수 분장을 하고 따로 촬영할 예정이었다.
“끄으으…!”
김진우는 양쪽 무릎을 꿇으며 억눌린 신음을 뱉었다.
고통스러운 표정이 고스란히 얼굴 위로 떠올랐다.
반면 이도원은 김진우의 척추를 한쪽 무릎으로 누르며 줄을 세게 잡아당겼다.
“끅… 으으으! 으아아아!”
그때 불현 듯 김진우가 초인적인 힘을 내며 상체를 뒤로 확 젖혔다.
뜻밖의 반격에 이도원은 순간적으로 줄을 놓쳤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김진우가 팔로 다리를 걸며 이도원을 쓰러트렸다.
“컥, 크흐흑, 큭…….”
김진우는 목을 부여잡고 막혔던 숨을 토해냈다.
이도원이 황급히 일어나며 바닥에 떨어져있던 나무배트를 주워들었다. 콘티가 끝나는 지점,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이제 내 차례네?”
칼자루가 이도원에게로 넘어갔다.
이도원은 망설이지 않고 나무배트를 붕 휘둘렀다.
따로 합을 맞추지 않았던 장면이었다. 따라서 김진우는 대경실색하며 몸을 웅크렸다.
콰앙!
이도원은 김진우 주위의 가구나 집기들을 때려 부수며 몰아갔다.
‘이 새끼, 뭐하는 거야?’
김진우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도원은 악마적인 미소를 매달고 애드리브를 쳤다.
“내가 너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쉽게 죽이겠냐?”
유태일 감독은 손뼉을 치며 외쳤다.
“컷! 오케이! 도원이 애드리브 좋았어.”
한편 김진우는 자존심이 상했다. 이도원이 상의도 없이 애드리브를 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겁을 집어먹었던 것이다.
‘잘못해서 한 대만 맞았어도 머리통이 박살났을 거야. 그리고 저 표정…….’
이도원의 얼굴은 미묘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이도원은 씩 웃으며 김진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몰입하다보니.”
김진우는 그 손을 밀어내고 자력으로 일어났다.
두 배우 간에 살짝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자 무술 감독이 들어가서 다음 장면에서 어떻게 액션을 이어나갈 것인지 설명해주었다.
머지않아 그동안 조용히 기다린 유태일 감독이 촬영재개 신호를 보냈다.
“배우들 위치해주세요. 카메라 롤-.”
이도원과 김진우가 컷 되기 전 자세로 돌아갔다.
이를 확인한 유태일 감독이 외쳤다.
“레디- 액션!”
나무배트로 위협을 가하던 이도원이 머지않아 무기를 놓치고, 그 순간부터 두 배우가 뒤섞여 엎치락뒤치락 개싸움을 시작했다. 그 장면을 카메라 두 대가 따라붙으며 롱테이크로 촬영했다.
“컷. 오케이. 분장하고 계속 갑시다.”
유태일 감독의 한마디에 분장 팀이 투입됐다.
이도원과 김진우는 싸우던 그대로 멈춰서 특수 분장을 받았다. 주먹과 발길질이 오간 곳으로 흔적을 남기는 디테일한 분장이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피곤으로 찌든 얼굴과 어우러져 분위기가 부쩍 살아났다.
유태일 감독이 촬영을 재개했다.
“레디- 액션!”
이도원이 만신창이가 된 김진우의 다리를 짓밟았다.
마침 지난 번 싸움에서 허벅지를 총에 맞은 김진우가 비명을 질러댔다.
이도원은 시계 줄을 풀며 말했다.
“게임 셋이다, 이 지겨운 새끼야.”
김진우가 엉금엉금 기다시피 쓰러진 책장으로 향했다.
이도원은 서두르지 않고 그 반응을 즐기며 천천히 뒤쫓았다.
“참 지랄한다, 지랄해.”
그때였다.
쓰러져있는 책장 밑에서 무언가를 꺼낸 김진우가 몸을 뒤집으면서 이도원을 겨누었다.
권총이었다.
“이런 씨…….‘
이도원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그 순간.
타앙!
이도원은 멍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너 이 새끼…….”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김진우는 양손으로 권총을 다가가며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타앙!
두 발의 총성이 더 울려 퍼지며 총구가 불을 뿜었다.
이도원은 어깨를 젖히고, 한쪽 다리를 뒤로 꺾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실제 총을 맞은 듯 사실적인 액션을 보여준 이도원이 땅을 기며 간신히 말했다.
“자, 잠깐…….”
한편 김진우는 이미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죽어! 죽어!”
김진우가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지만 총알이 떨어진 상태로 철컥- 철컥- 소리만 났다.
김진우는 총을 버리고 이도원이 놓친 야구배트를 주워들며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내가 말했지?”
자조적으로 물은 그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많은 의미가 담긴 눈물을 흘리며 김진우가 말했다.
“넌 내가 잡는다고.”
이도원은 힘겹게 몸을 돌려 큰 대자로 누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하하하…! 컥……. 쿨럭, 쿨럭!”
그는 눈동자만 들어 김진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쿨럭! 하하, 넌 다 잃었잖아… 이 미친 새끼…….”
“죽어! 죽어, 이 씨발 놈아!”
김진우가 야구배트를 내리쳤다.
수십 차례 모션을 줬고 이쯤 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유태일 감독이 신호를 보냈다.
“컷. 오케이!”
김진우는 야구배트를 내려놓고 이도원에게 손을 뻗었다.
“고맙다. 아까 충고-.”
“아닙니다.”
이도원이 대답하며 직접 몸을 일으켰다.
그때 유태일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우들 모니터링 하세요.”
이도원과 김진우는 모니터로 가서 방금 촬영한 장면을 보았다.
이도원도, 김진우도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주며 장장 삼 일 간 촬영한 액션 씬을 훌륭히 소화해냈다.
드디어 완성품을 건진 느낌이었다.
“도원이랑 진우, 모두 잘했어.”
이도원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에 비해 김진우는 무언가 찜찜한 얼굴이었다.
이도원은 호흡, 화술, 움직임, 남다른 인물 분석과 그때 그때 적응하는 연기 센스까지 뭐 하나 빠지지 않았다. 그는 촬영 내내 김진우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만드는 존재가 됐다.
김진우는 패배감만 남은 상태에서 이대로 촬영이 끝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비상하다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