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상하다 (3) >
이도원의 무릎에 응급처치를 마친 뒤 촬영이 재개됐다.
다음은 김진우가 이도원을 뒤늦게 추격하는 씬이었다.
이도원은 잠시 앉아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확실히 혼자 연기할 때가 더 자연스럽다.’
이도원은 김진우의 연기를 보며 그렇게 느꼈다.
김진우는 이도원을 추격하는 중에도 다양한 표정과 독백을 보여줬다. 그것만으로도 조급한 느낌이 전달될 만큼 훌륭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었다.
곁에서 유태일 감독이 작게 속삭였다.
“내 말 뜻 알겠지? 너랑 만 서면 잘하려고 애를 써.”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생존이 걸린 곳에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는 법이다.
특히 연예계에서 적과의 동침은 빈번한 일이었다.
어제까지 눈에 불을 켜던 상대조차 오늘 같은 작품을 작업하려면 친해져야만 한다.
프로는 이런 점에 관대하고, 신인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이도원은 예사 신인과 달랐다.
‘내키지는 않지만… 감독님의 지시니까. 멸사봉공(滅私奉公)?이라고 했다. 앞으로를 위해서 복수심을 버릴 땐 버려야 돼. 부딪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야. 어차피 감정 싸움으로는 김진우를 무너트릴 수 없다.’
그는 가슴 속에 비수를 감추고 김진우에게 손을 뻗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는 헉헉거리는 있는 김진우에게 다가가 음료를 건넸다.
김진우는 이도원을 슥 보더니 별 말없이 받아 마셨다.
이도원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까 상처 났을 때. 감사했습니다.”
김진우는 그를 빤히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김진우는 고집이 센 성격이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실력으로 인정받고 부드럽게 다가가야 한다.
‘김진우는 심적인 부담을 느끼고 있을 뿐 실력 자체는 나무랄 데가 없다. 내게서 친근감을 갖게 되면 심리적인 안정은 저절로 따라올 거야.’
이도원은 해답을 알고 있었다.
이도원에게는 타임 슬립 전 고난의 세월을 이겨낸 경험이 있다.
비록 타임 슬립을 거치면서 지금의 삶이 익숙해졌지만, 이런 중요한 순간이 오면 지난 경험과 연륜이 고개를 들었다.
이도원은 김진우의 표정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영락없이 자기 자신도 감당이 안 되는 이십대 초반의 모습이로군.’
지금껏 날을 세우긴 했어도 김진우를 들여다 본 적은 없었다.
한편 김진우는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이 새끼 왜 이래?’
상대가 까칠하던 전과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이자 의심이 먼저 갔다.
그때 이도원이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을 해주었다.
“이제부터 같이 들어가는 씬인데 잘 부탁드려요.”
김진우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원의 부탁에 대한 수긍이 아니었다.
‘앞으로 나랑 치고 받는 액션 씬이라 겁을 먹었나보네.’
김진우는 단순한 해석을 하고 피식 웃었다.
알게 모르게 부담을 느끼던 이도원의 분위기가 변하자 김진우 역시 마음이 조금쯤 풀렸다. 그러고 보니, 이도원도 연기 좀 잘하는 신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잘 부탁한다.”
지금까지 김진우는 이도원에게 존대와 반말을 섞어서 사용했는데 이번에 제대로 말을 놓아버렸다. 동문이 아닌 이상 대부분 현장에선 나이로 호칭을 정하는 데다, 데뷔 시기가 불분명한 신인 끼리 기선을 잡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도원이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네. 제가 초면에는 좀 까칠한 성격이라서. 이해해주세요.”
“그래.”
김진우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때 유태일 감독이 두 사람을 불렀다.
“도원이랑 진우, 이쪽으로 잠깐 와 봐.”
그는 콘티를 보고 있다가 물었다.
“어떻게 찍을래?”
두 배우의 의사를 존중하겠다는 의미가 내포된 질문이었다.
김진우는 대답 없이 이도원을 쳐다봤다. ‘네가 말해 봐라’하는 의미였다.
분명 애드리브나 연기적인 센스 부분에선 이도원이 더 디테일한 모습을 보였다.
곰곰이 생각하던 이도원이 김진우에게 말했다.
“제가 문수 선배한테 총을 쏘는 동시에 절 덮치시는 장면에서, 잠깐 호흡을 끌면 어떨까요? 제가 ‘오정태’라면 덮치기 전에 자신이 총을 두고 왔다는 걸 기억하진 못할 것 같은데요. 멀리서 그 광경을 발견한 순간 먼저 총을 찾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유태일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군. 진우 생각은 어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진우가 선선히 대답하자 유태일 감독이 지시했다.
“그럼 여기서 진우가 소리치면서 총을 뽑자. 그리고 도원이가 딱 뒤돌아보는 거야. 그리고?”
원래 콘티에 없는 장면을 추가하는 것이기에 유태일 감독은 기대되는 눈빛으로 이도원을 바라봤다.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던 이도원이 대답했다.
“씩 웃겠죠. 전 이미 용의자를 살해한 후니까요.”
“소름끼치겠군.”
유태일 감독이 맞장구를 치며 김진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어쩔래?”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닫고 좌절합니다. 분노하고 달려가서, 넘어트린 뒤, 공격합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유태일 감독이 엄지와 중지를 마주쳐 딱- 소리를 내며 물었다.
“수차례 주먹을 휘두르고 컷. 두 사람 이해했지?”
“예.”
“네. 감독님.”
두 사람이 대답하자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배우 위치로.”
지켜보던 박문수가 합류했다.
세 사람이 각자의 위치에 서자 이미 세팅을 마친 스태프들이 촬영 각을 잡았다.
유태일 감독이 말문을 열었다.
“카메라 롤.”
이윽고 카메라가 돌았다.
“레디.”
그는 이어 배우들에게 사인을 내렸다.
“액션!”
이도원과 박문수가 가까이 붙어 섰다.
이도원은 프롭 건(prop gun; 촬영용 총기)으로 박문수의 복부 옆을 겨눴다. 탄두가 제거된 공포탄이지만 격발 시 머즐 플래시(muzzle flash; 총구에서 뿜어지는 화염효과)가 강하기 때문에 화상을 입을 위험이 있었다.
현실감을 살리기 위한 소품 팀의 선택이었다.
“조심해서 쏴.”
박문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도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 마세요.”
두 사람은 거의 안다시피 했고, 이도원은 박문수의 팔과 옆구리 사이로 총구를 집어넣은 상태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두 사람의 음영(陰影) 속에서 머즐 플래시가 터지며 큰 총소리가 났다.
삼 초 정도 흐른 뒤 이도원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불빛에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섬뜩하게 씩 웃었다.
“컷. 오케이.”
유태일 감독이 자른 뒤 손을 내저었다.
카메라가 이동해 언덕 위에 서있는 김진우의 얼굴을 클로즈업 했다.
이도원이 그 전 자리에서 하늘에 총을 쏘며 격발 소리를 내주었고, 그걸 신호로 김진우가 연기를 시작했다.
총 소리와 함께 심장이 덜컥 주저앉은 김진우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이 개새끼가…!”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도원이 위치해 있는 쪽을 주시했다.
손으로는 허리를 더듬으며 총을 찾다가, 집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용히 욕지거리를 뱉었다.
“…아오, 씨발. 하필이면.”
이내 김진우는 음영 속에서 고개를 돌린 이도원의 얼굴을 확인했다.
“같이 죽자! 이 찢어 죽일 새끼아.”
그는 소리를 지르며 카메라 밖으로 달려나갔다.
“컷. 오케이.”
유태일 감독이 신호를 보냈다.
김진우를 풀 샷으로 한 번 따고 장비가 이동했다.
마침내 김진우가 이도원을 덮치는 장면을 촬영할 차례였다.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열연 기대합니다. 자, 카메라 롤-.”
카메라에 불이 들어온 걸 확인한 그는 이어 신호했다.
“레디- 액션!”
김진우가 카메라 밖으로부터 달려와서 이도원을 덮쳤다.
이도원은 피하지 않고 함께 쓰러져 뒹굴었다.
유태일은 굳이 컷을 외치지 않고 지켜봤다.
컷 신호가 없자 뒤섞인 두 사람도 서로 프롭 건을 잡으려고 엎치락뒤치락 했다.
“미친 새끼…!”
김진우가 헉헉대며 외쳤다.
한바탕 몸싸움을 한 결과 프롭 건을 손에 쥔 이도원이 자신의 허리 위에 올라탄 그의 복부를 겨눈 것이다.
이도원은 프롭 건을 옆으로 움직이며 말했다.
“나오지? 뒤지기 싫으면.”
“네가 날 쏠 수 있을까? 살인마 새끼가 경찰을…….”
김진우가 흥분해 외치려는 찰나.
이도원은 김진우의 허벅지 옆을 겨냥해 프롭 건을 쐈다.
타앙!
김진우가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악!”
그는 옆으로 고꾸라지며 허벅지를 쥐고 뒹굴었다.
“끄으으… 씨발! 넌 끝났어!”
“글쎄. 이 총기가 내 거라고 확신해?”
이도원은 쓰러져 있는 박문수를 발로 툭툭 건드리고, 프롭 건을 손에 쥐어주었다.
“불법총기소지 및 거래를 하고 있더군. 그림 좋잖아? 형사와 몸싸움을 하다 스스로 몸에 총구멍을 낸 범인. 살신성인으로 범인을 쫓다가 총상을 입은 영웅 형사! 내가 그린 밑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헛소리를 해도…….”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널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거든.”
이도원은 턱 끝을 치켜들고 마치 어린아이가 자랑하는 듯 표정을 지어냈다.
비틀대며 벽에 기댄 김진우가 새하얀 입김을 뱉으며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이도원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 박문수와 김진우를 번갈아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어깨를 들썩이고 웃었다.
“쓸 데 없는 데 힘 빼지마. 안쓰러우니까.”
“컷!”
유태일 감독이 덧붙였다.
“한 번 더 갑시다.”
*
다음 촬영 장면은 이도원과 김진우의 대결 씬이었다.
<악마의 재능>의 클라이맥스가 되는 장면이니만큼 인상 깊은 연출이 필요했다.
두 배우는 특수 분장을 해가며 수십 차례 액션 씬을 촬영했다.
영화 내내 두 배우 간에는 세 번 물리적으로 부딪히는 씬이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팽팽하게 맞서지만 이도원이 원래 실력을 드러내는 세 번째에선 좀 달랐다. 김진우는 이도원의 수법을 훤히 꿰고 있었지만 실전에선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 따라서 김진 우는 초반 일방적으로 얻어맞는다 하지만 싸우는 장소가 김진우의 집이고, 결국 그는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이용해 이도원을 이긴다는 콘티였다.
두 배우는 신체부위에 공격을 당할 때마다 특수 분장을 고쳐야만 했다.
이런 액션의 디테일 한 부분들이 인상적인 연출을 도왔다.
이 장면을 촬영하며 이도원과 김진우는 두 번이나 촬영을 실패했다.
첫째 날은 두 배우의 연기 톤이 잘 맞지 않아 접었고, 두 번째 날은 김진우가 심한 몸살에 걸려 연기됐다.
그리고 셋째 날.
김진우는 극심한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느낌이 이게 아니야.’
그는 연기를 하면서도 헤맸다.
‘찍기 싫다.’
김진우의 심리를 파악한 유태일 감독은 두 배우를 불러들였다.
배우들은 그동안 고생스럽고 빡빡한 촬영스케줄을 이어왔다.
더구나 이번 씬에서는 특히 더 강한 액션과 특수 분장이 들어갔다.
몸의 피로감도 피로감이었지만 심적인 부담 역시 두 배우를 짓눌렀다.
특히 김진우는 촬영이 끝나기는 할까 싶을 정도로 막막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자신도 모르게 어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기만 바라고 있을 만큼 자신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유태일 감독과 두 배우는 이 문제에 대해 두 시간이나 대화를 나눴다.
연기에 대해 피드백을 주고받았지만 김진우에게는 이 모든 시간이 지루할 뿐이었다.
뚜렷한 해답이 나오지 않고, 두 배우는 십 분 간 휴식을 받아 현장에서 대기하게 됐다.
김진우가 힘없이 앉아있는데, 이도원이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만들어 와서 곁에 앉았다.
후루룩- 뜨거운 액체가 식도를 지나갔다.
이도원이 새하얀 입김을 뱉으며 불쑥 말했다.
“너무 피곤하네요.”
“그래.”
대답한 김진우가 텀을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이도원이 고개를 돌려 그를 빤히 봤다.
그 시선을 느낀 김진우가 눈을 맞췄다.
이도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오정태도, 윤도강도 분명 피곤할 거예요. ‘잘 싸워야지’하고 싸우진 않을 거란 뜻이죠.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싸울 겁니다. 마치 우리처럼.”
김진우는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느낌을 받았다.
‘굳이 정신을 일깨우려하지 말고 피곤한대로 놔두면, 그냥 자연스럽게 연기를 하면 된다?’
불에 덴 듯 놀란 표정이 고스란히 얼굴 위로 떠올랐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도원은 고개를 돌리며 후루룩- 커피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