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80화 (80/178)

< 비상하다 (2) >

“이성적인 표현은 문제가 아니죠. 살인마의 모습일 때 튀어나오는 본능적인 감정표출이 중요한데... 그동안 눈길이 가는 대로 쳐다보고, 배 고프면 먹고, 웃기면 웃으면서 주변의 자극에 산만하게 반응해봤어요. 또 틈 날 때마다 익숙지 않은 왼손으로 아무 생각 없이 낙서를 했죠. 그랬더니 그때 그때 본능에 충실한 말들을 끄적이게 되더라고요. 뭐 그런 방법로 내면에 잠재된 본능이나 욕구들을 끄집어냈습니다.”

그 말에 유태일 감독과 김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원이 영리한 배우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유태일 감독은 딱히 놀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배우는 연기를 못할 수가 없지.’

반면 김진우의 반응은 좀 달랐다.

김진우는 자신 보다 나이도 두 살이나 어린 이도원의 세심한 면을 보며 느끼는 바가 컸다.

이쯤 차이가 나면 시기와 질투 보단 감탄과 경외감이 드는 법이다.

김진우는 비슷한 또래에 적수가 없다고 여기며 오만한 착각으로 매번 같은 연기를 고집하던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도.’

김진우는 이제 그만 인정하기로 했다.

이도원의 무기는 수려한 외모와 사람을 녹이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타고난 장악력과 재능도 아니었다.

끊임없는 고민과 연구, 한계를 넘는 발상.

이것이야말로 이도원이 가진 진짜 무기였다.

한편 정작 이도원은 두 사람의 표정을 관찰할 여유가 없었다. 모니터 안에 가장 객관적인 자신이 있고, 연기적인 모든 해답이 그 안에 있었다.

이도원은 속으로 생각했다.

‘살인마는 빤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야.’

영화역사상 셀 수 없는 살인마 배역이 있어왔다.

그런 빤한 캐릭터를 빤하지 않게 하려면 배우가 입체적인 연기를 해야만 한다. 지금껏 관객이 봐왔던 살인마면서도, 남 이야기가 아닌 우리가 걷는 도시에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야기를 해야 한다.

‘입체적으로 표현해야 돼. 배우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 내가 가진 폭력성을 극대화시켜야 한다.’

그것이 작품 시나리오가 지향하는 방향성과도 맞았다.

조명 팀은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는 조명을 이용해 분위기를 연출했다.

촬영 팀은 어두운 분위기를 강조하면서 기괴한 느낌을 조성했다.

미술 팀은 우리가 늘 드나드는 눈에 익었던 공간들을 이용해 다른 느낌을 주려고 노력했다.

의상 팀은 아예 평범한 의상을 이용해 분위기를 살렸다.

분장 팀은 표면적인 부분 보다 아이라이너 같은 디테일한 분장에 더 심열을 기울였다.

이 모든 조화가 영화가 관객들에게 말하고 싶은 주제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이도원은 영화가 전달하려는 느낌에 어우러지는 연기를 완성하는 데 주력했다. 그래야만 시나리오 상으로 봤을 때의 ‘윤도강’이 현장에서도 녹아들 수 있는 것이다.

이도원의 강점을 은근히 느껴왔던 유태일 감독은 속으로나마 이도원과 김진우 두 사람을 비교해 보았다.

‘연기적인 재능은 김진우가 앞선다. 하지만 김진우는 나무를 보고 이도원은 숲을 본다. 이 사고의 폭이 두 배우의 성장도를 하늘과 땅 차이로 갈라놓고 있어.’

즉 끌어줄 사람은 이도원이었다.

판단을 내린 유태일 감독은 이도원을 따로 불렀다.

“내가 권한을 줄 테니 네가 진우를 코칭해라. 감독이 전반적인 주문을 던질 순 있지만 연기적인 호흡은 배우들이 끌어내야 돼.”

이도원의 입장에선 불편한 요구였다.

김진우의 얼굴을 볼 때마다 고개를 드는 감정을 죽이고 영화에 집중하는 것만도 보통 일이 아닌데 손을 잡고 끌어주라니.

“지금도 잘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도원이 묻자 유태일 감독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태로 가다간 연기가 무너질 거다. 진우는 괴물 같은 재능과 폭발력을 가진 배우야. 하지만 감각적으로 풍부한 연기가 가능한 만큼 감정에 휘둘리기 쉽다.”

“계속 리액팅(reacting; 반응하는) 연기를 하면서 감정을 조절해주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대답한 유태일 감독이 말을 이었다.

“네가 진우와 불편한 관계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너만이 진우를 컨트롤 할 수 있어.”

이도원은 곰곰이 생각했다.

고민은 짧고 결단은 빨랐다.

“…알겠습니다. 제가 일 대 일로 마킹하죠.”

김진우가 유태일 감독이 자신을 부탁했다는 사실을 알면 자존심이 상해서 발악을 할 터였다.

이도원은 유태일 감독이 말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비밀 유지도 하고요.”

“눈치가 백단이군.”

유태일 감독은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주목받는 신성 김진우가 골칫거리가 될 줄을.

*

여섯 시간이 넘도록 촬영이 계속됐다. 촬영 팀은 여러 구도를 찍으며 편집할 소스를 풍부하게 꾸려갔다.

그들이 촬영을 마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도중에도 김진우의 얼굴은 잿빛처럼 어두웠다.

지금껏 김진우의 이름 앞에는 천재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 현장을 가든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일반인들 틈에 섞여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적어도 이 현장에서만큼은 김진우가 범재 수준이었다. 그가 쫓기에는 이도원과 유태일 감독의 사고와 시야가 너무 깊고 넓었다.

‘제기랄.’

김진우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그가 깊은 수렁에 빠진 것 마냥 찝찝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는 사이, 밴은 촬영 팀을 뒤쫓아 현장에 도착했다.

손발이 척척 맞는 유태일 드림팀의 장비 세팅이 일사천리로 끝나고 또 한 명의 천재 유태일 감독이 촬영지시를 내렸다.

“배우들 위치해주세요.”

굽이굽이 골목이 가득한 동네 성북구 장위동.

배우들이 촬영해야 될 장면은 숨 막히는 추격 씬.

정해진 곳까지 전력질주하고, 또 그만큼 전력질주하고.

영화상 목적지까지 이를 반복해야한다.

그 와중에 엔지가 나면 계속 같은 구간을 달려야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이도원은 상황과 증거를 조작해 유력한 용의자를 범인으로 만든다. 실수를 빙자해 용의자를 살해하고 자신이 저질렀던 범행을 묻으려 한다. 반면 김진우는 이도원이 범인이라는 확실한 심증을 갖고 이도원이 용의자를 살해하는 일을 막고자 이도원을 뒤쫓는다.

이내 촬영 팀이 준비를 마치자 유태일 감독은 일정 간격을 두고 서있는 세 배우에게 말했다.

“배우들 레디.”

배우들이 고개를 끄덕여 준비됐음을 알리기 무섭게 유태일 감독의 신호가 떨어졌다.

“액션!”

가장 먼저 용의자 역할의 박문수가 출발했다.

이도원이 그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전력질주였다.

“컷. 엔지!”

유태일 감독이 엔지를 외쳤다.

두 배우의 간격이 너무 벌어졌기 때문이다.

추격 씬의 묘미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데 있다.

배우 간의 호흡이 굉장히 중요한 장면이었다. 그렇다고 앞 사람이 뒤를 돌아보며 거리를 맞출 순 없다.

카메라를 속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유태일 감독이 두 사람을 불러들였다.

“발소리로 거리를 감지하면서 뛰세요.”

용의자 역할의 박문수는 내심 투덜댔다.

‘말이 쉽지.’

유태일 감독은 이번에는 이도원을 보며 말했다.

“앞사람이 속도를 맞추긴 어렵다. 네가 거리를 유지해야 돼.”

이도원 역시 박문수와 같은 생각을 했다.

‘말이 쉽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거리를 맞추기 위해 조금만 망설여도 카메라가 움직임을 잡아낼 것이다. 그렇지만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도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뒤로 열 번의 촬영이 이어졌다.

10테이크까지 갔을 때 배우들은 체력이 바닥이었다.

쌀쌀한 날씨에도 땀을 비 오듯 쏟아졌고 입에선 단내가 났다.

두 배우는 스태프가 사온 이온음료를 마시며 유태일 감독의 지시를 들었다.

“몇 차례 아깝게 엔지가 났습니다. 이 장면은 반드시 롱 테이크로 가야하기 때문에 사소한 엔지만 나도 처음부터 찍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몰라요?

이도원과 박문수 모두 묻고 싶었다.

그들의 반응을 아랑곳 않고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그럼 다시 시작합시다. 이러다 밤새겠습니다. 알다시피 해가 뜨면 촬영을 내일로 미뤄야합니다.”

그건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이 고생을 하루 더 해야 한다니.’

고개를 저은 이도원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문수 형과 제 속도를 측정해 볼게요.”

박문수가 굳 아이디어라는 듯 엄지를 치켜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독님.”

두 사람은 한쪽에서 초재기를 하고 어느 정도 질주했을 때 속도감이 유지되는지 삼십 미터 기준으로 몇 초가 나오는지 합을 맞춰본 뒤 체득했다. 발자국 숫자를 세는 템포까지 새어가며 거리를 만들었다.

연습을 끝낸 두 배우가 출발지점으로 돌아가 서자 유태일 감독이 확성기를 대고 힘껏 외쳤다.

“레디- 액션!”

박문수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속으로 발자국 템포를 세며 달렸다.

이도원이 그 뒤를 쫓았다.

이제 마지막이구나 생각하던 찰나.

이도원이 쭉 미끄러졌다.

‘아!’

모든 스태프들이 탄성을 삼켰다.

또 엔지인가 싶었다.

그때였다.

이도원이 벌떡 일어나 달렸다.

박문수의 바로 뒤까지 추격하며 닿을락 말락한 거리에서 오십 미터 지점이 지나갔다.

그 순간 유태일 감독의 입에서 폭발적인 사인이 떨어졌다.

“오케이- 컷!”

이도원과 박문수는 그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환호를 내질렀다.

스태프들도 박수를 쳤다.

한편 유태일 감독은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으로 모니터를 보며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거다!’

속에서 드는 생각이었다.

이도원이 넘어졌다 일어나 뛰는 부분.

그 한 순간의 판단이 추격 씬 전체를 살렸다.

현장감과 스릴을 배로 안겨주었다.

유태일 감독이 모두를 향해 외쳤다.

“이번 장면은 다 같이 모니터링 합시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모니터를 바라봤다. 이내 추격 씬이 나오고 모두 박수를 보냈다.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았군.’

아직 분량이 나오지 않은 김진우는 담요를 덮고 현장을 보고 있었다. 그는 이도원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이라면 그 상황에 일어나서 바로 뛸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 “씨발, 거기 안 서?”라는 대사와 동시에 그처럼 사실적인 표정연기를 할 수 있었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더불어 이도원은 속도 조절을 해가며 뜀박질을 하는 침착함까지 발휘했다.

더 놀라운 건 이도원의 청바지가 찢어져 무릎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데도 지금까지 본인 스스로 못 느끼고 있다는 점이었다.

스태프들도 어두운 환경과 오케이를 받아냈다는 흥분에 사로잡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김진우가 이도원에게로 다가갔다.

“피 납니다.”

이도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진우를 보았다.

김진우가 이도원의 무릎으로 시선을 보냈고, 그때서야 이도원도 피가 흐르는 걸 발견했다. 무릎이 얼얼해지면서 화끈한 통증이 닥쳐왔다.

“윽.”

스태프들도 하나 둘 이도원의 상처를 발견했다.

분장 팀 막내가 구급상자를 가져와 소독을 하고 밴드를 붙였다.

유태일 감독이 이도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많이 아프냐?”

그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했다.

“나도 아프다.”

저걸 개그라고.

스태프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도원 역시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다들 감독님이셔서 웃어주는 거예요.”

< 비상하다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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