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79화 (79/178)

< 비상하다 (1) >

하루 휴식을 가지고 김진우와의 촬영 날 아침이 밝았다.

이도원은 복수심을 누그러트리고 마음을 비웠다.

‘김진우가 연기를 잘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리딩 때 이도원과 비교돼 낮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 역시 신인이라기에는 믿기지 않을 연기력을 소유한 배우였다.

이도원의 목표는 김진우가 이 바닥을 떠나게 하는 것이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훌륭한 작품을 뽑아내는 일이었다.

단 하나의 목적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많이 달라진 이도원의 생각이었다.

“엄마, 누나. 나 다녀올게요.”

이도원은 모처럼 피로가 풀린 안색으로 말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상쾌하게 스트레칭과 화술훈련을 마친 상태였다.

모처럼 쉬는 휴식기조차 반납하는 이도원을 본 어머니와 누나는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그를 존중했다.

어머니가 인사를 건넸다.

“아들! 어디서든 굴하지 말고. 알지?”

이다원도 손을 흔들며 한 마디 거들었다.

“영화 개봉 날 엄마랑 갈 거니까 창피하지 않게 잘 해!”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집을 나섰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오준식이 운전하는 밴이 주차돼 있었다.

“잘 쉬었나? 이 배우?”

오준식 역시 지난번과 사뭇 다른 태도로 물었다.

한동안 지치고 민감했던 두 사람이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를 대했다.

이도원이 대답했다.

“예이, 잘 쉬었습니다. 오 매니저님.”

그는 밴에 올라타서 문을 닫았다. 그리고 평소처럼 대본을 읽는 대신 오준식에게 말을 붙였다.

“오늘부터 또 강행군입니까?”

“천리행군을 방불케 하는 강행군이 될 걸세!”

오준식이 시동을 걸고 운전을 시작하며 대답했다.

이도원은 경례하는 시늉을 했다.

“아예, 오준식 행보관 님.”

행보관은 행정보급관의 줄임말로 군대에서 대부분 사병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직책이었다. 두 사람 모두 군필자였기에 소위 여자들이 싫어하는 ‘군대 개그’를 하고 앉았다.

대충 자리를 정리한 이도원은 오늘 촬영할 대본을 보는 대신 펜을 꺼내 왼손에 들고 종이에 무어라 끄적댔다.

백미러로 그를 본 오준식이 물었다.

“뭐하는 거야?”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콜록, 콜록!”

이도원이 사례가 들린 듯 기침을 하자 오준식은 미리 약속돼있던 사람처럼 보온병을 건넸다.

이도원이 능청스럽게 감탄했다.

“역시 오 매니저. 센스 있어.”

이도원은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무언가를 끄적대기 시작했다.

그동안 밴은 이번 촬영지인 경찰서에 도착해 있었다.

이도원이 살인범이라는 심증을 갖고 있는 김진우가 이도원을 몰아붙이는 장면이었다.

“이거 찍고 하나 더 있네.”

이도원은 스케줄 표를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이것도 30시간 촬영의 냄새가 난다.”

다음 장면은 이도원이 범인으로 누명을 씌울 용의자를 쫓고, 그런 이도원을 김진우가 다시 쫓는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소화해야 했다.

이도원은 고생길이 안 봐도 빤했다.

“오늘 거의 마라톤 할 거리를 전력질주하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역시 이 배우의 예감은 노스트라다무스 급이야? 어떻게 알았지?”

오준식의 장난에 이도원이 피식 웃었다.

“아무튼 활기차게 시작해봅시다.”

경찰서 앞에는 촬영 팀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장비를 옮기는 등 촬영준비로 한창 분주했다.

이도원은 차에서 내려 스태프들과 유태일 감독에게 인사를 건네고 다시 밴으로 돌아와 대본을 봤다.

오준식이 창밖을 보며 물었다.

“김진우는 아직이야?”

“응. 오겠지 뭐.”

이도원은 신경쓰지 않고 연습에 몰두했다.

촬영예정시간인 오후 두 시가 다 되어 김진우가 도착했다.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김진우의 밴을 확인한 이도원이 오준식에게 말했다.

“배우도 왔으니까 들어가자.”

두 사람이 내렸다.

옆에 주차된 밴에 있던 김진우도 매니저와 함께 내렸다.

이도원과 김진우는 서로를 보았고 잠깐 눈에서 불꽃이 튀나 싶었다.

이내 이도원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붙였다.

“오늘 잘해보죠. 진우 씨가 실력이 좋아서 기대하고 있습니다.”

뜻밖에도 김진우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합니다.”

그들은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유태일 감독이 두 사람을 반겼다.

“두 사람과 함께 만나는 건 오랜만이군. 진우 따로, 도원이 따로 촬영이 진행됐으니까. 오늘부터가 진짜 촬영이라고 보면 돼.”

“알겠습니다.”

김진우가 먼저 대답하고 이도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독님.”

유태일이 두 사람에게 콘티를 주며 원하는 콘셉트를 설명했다.

“정태가 의도적으로 도강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도강은 모처럼 감정적인 표출을 한다. 지금껏 이성적으로 굴었던 도강이니까 잘 표현해줘야 관객들이 괴리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어.”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원 역시 지금을 위해 준비한 것이 있었다.

그 사이 촬영 팀의 장비 점검이 끝나자 유태일 감독이 촬영시작을 알렸다.

“배우들 위치하고, 장비 한 번 확인합시다.”

그 말에 따라 이도원과 김진우가 자리로 가서 앉았다.

경찰서 동료들로 등장하는 단역들도 자리로 갔다.

스태프들이 두 배우를 화면 안에 담았다.

이 모든 과정을 모니터로 확인한 유태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배우들 레디- 액션.”

책상의 칸막이 너머로 이도원을 뚫어져라 보던 김진우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도원의 자리로 가서 어깨를 툭 치고 귓가에 속삭였다.

“선배. 저 좀 보시죠.”

“점점 막나가네. 선배를 쳐?”

이도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컷. 오케이.”

유태일 감독은 가볍게 끊었다.

두 배우에게는 간단한 장면이었다.

유태일은 바로 다음 씬으로 넘어갔다.

“레디, 액션!”

김진우가 이도원의 대답을 듣지 않고 복도로 나가서 빈 방으로 꺾었다.

못마땅한 표정의 이도원 역시 김진우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갔다.

카메라가 따라붙어 장면을 담았다.

“컷. 오케이. 다음!”

유태일 감독은 물 흐르듯 다음 장면을 주문했다.

장비가 방 안으로 들어가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유태일 감독이 지시했다.

“레디, 액션.”

음성이 나직하고 무겁게 떨어진다. 마치 진짜 촬영은 여기서 부터라는 걸 알리는 신호 같았다.

김진우가 문을 잠그고 주위를 둘러봤다.

“여긴 선배랑 저 둘 뿐입니다. 듣는 귀도, 보는 눈도 없죠.”

이도원이 대답 없이 김진우를 바라봤다.

김진우가 말을 이었다.

“선배죠? 증거는 없지만 제 심증이 선배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선배가 범인이라고요.”

이도원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자수하시죠.”

“어쩔 수 없네”

그는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좀 털자. 긍정적으로 고려해볼 테니까.”

김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수색을 허락했다.

이도원은 김진우가 숨겨둔 장치가 없는 걸 확인한 뒤 대답했다.

“내가 죽였다고? 왜?”

그는 어린아이처럼 물었다.

김진우가 대답했다.

“지금까지 이뤄졌던 선배의 수사방식 자체가 교묘하게 범인을 ‘놓쳐주고’ 있으니까요. 그것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그래서 선배에게 사람을 붙였습니다.”

그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정확히 사흘 만에 실종됐더군요.”

고개를 숙이고 끄덕이던 이도원이 얼굴을 들었다.

그의 눈빛이 돌변해 있었다.

“내가 죽였어. 근데 뭐?”

이도원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죽였다고. 왜 자꾸 짜증나게 물어봐.”

“뭐?”

동요한 김진우가 입술을 떨었다.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재차 물었다.

“근데 뭐 어쩌라고?”

김진우는 완전히 변한 이도원의 태도에 얼굴을 굳혔다.

순순히 인정할 줄 몰랐지만 어느 정도 확신하고 불러냈던 참이었다.

김진우는 이도원의 돌발 행동을 무시하며 그를 자극했다.

“너 같은 새끼들에 대해 좀 알지. 학교에서 배웠거든.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 기생충처럼 남에게 빌붙어 살고,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고, 매사에 충동적이고 무책임해. 양심의 가책 따위는 없고 성불구자들도 많지.”

“하-.”

이도원은 웃어넘겼지만 김진우의 모욕은 계속됐다.

“그러고 보니 철저히 혼자라고 했지? 여자도 없고. 성욕을 남을 죽이면서 푸는 것 아니야? 옆에서 조금만 봐왔는데도 알겠더군. 분명 성불구일 거야. 그렇지?”

“…그만해.”

이도원의 두 눈이 희번득 거렸다.

김진우는 멈추지 않았다.

곧이어 이도원이 김진우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만 하라고 했지?”

“커, 컥!”

김진우가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이도원은 거칠게 호흡을 몰아쉬며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자제력이 떨어지는 이도원은 김진우를 놓아주고 난 뒤 서성이며 말했다.

“자꾸 귀찮게 구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뚝 멈춘 이도원이 입 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말했잖아. 씨발, 귀찮게 하면 다치는 건 너라고. 네가 붙인 그 아저씨 어디 있을 것 같아?”

“그게 무슨…….”

“너 사람 잘못 봤어.”

이도원이 말을 이었다.

“내가 경고했지? 날 건드리지 말라고! 내 경고를 무시한 대가로… 내가 널 죽이지 않아도 스스로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게 해줄게. 반드시. 이 개새끼야. 씨발놈아.”

이도원의 두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다시 물어본다. 네가 나한테 붙인 새끼 지금 어디 있을 것 같아?”

“설마…….”

중얼거리던 김진우가 이도원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처박았다.

“이 새끼가!”

이도원은 두 손을 들고 조롱했다.

“기억력이 안 좋네? 네가 나한테 보낸 새끼가 어디 있을 것 같냐고! 이 병신아.”

김진우는 이를 빠드득 갈더니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이도원은 옷을 털며 피식 웃었다.

“병신 새끼. 지랄을 해요. 씨발놈.”

그는 연신 욕설을 씹어뱉었다.

유태일 감독이 씬을 잘랐다.

“컷. 다음 씬 이어서 가봅시다.”

김진우는 뛰쳐나가는 동시에 집으로 전화를 한다. 별 탈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가족들에게 외출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 한다.

이도원의 농간에 놀아났다고 생각한 김진우가 다시 돌아오며 이어지는 장면이었다.

이도원은 그대로 기다리고 있는 상황.

유태일 감독이 촬영지시를 내렸다.

“레디- 액션!”

문을 쾅 소리 나게 열고 들어온 김진우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이윽고 김진우는 이도원을 향해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도원이 몸을 웅크리며 얻어맞았다.

한참을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던 김진우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너 이 개새끼. 무슨 수작이야?”

“하하하하… 흐흐흐.”

웃음을 터트린 이도원이 나직이 말했다.

“좆같지? 네가 할 수 있는 건 주먹질 밖에 없어. 병신같이 허우적거리는 것 밖에 없지. 씨발-. 퉤!”

이도원은 침을 뱉으며 김진우를 올려다보았다.

“넌 날 못 잡아.”

그때 유태일 감독이 끊었다.

“컷. 일단 킵하자. 이리 와서 모니터링 해봐.”

이도원과 김진우가 모니터링을 했다.

중반부 쯤 되자 화면을 멈춘 유태일 감독이 평했다.

“이성적이었다가 본능적이었다가. 내가 원하는 그 경계를 자연스럽게 오가고 있군.”

화면을 보던 김진우가 이도원에게 물었다.

“어린애처럼 돌변해서 물을 때 모습. 어떻게 만든 거지?”

배우로서 김진우가 궁금한 부분은 그것이었다.

이도원은 이성적이다가도 한순간 감정적으로 돌변하는 감정점을 순조롭게 넘겼다.

모든 움직임과 화술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연쇄살인마인 ‘윤도강’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나올 수 없는 연기였다.

이런 사실을 어렴풋이 느낀 김진우는 이도원이 연쇄살인범의 인격을 받아들일 수 있던 비결이 궁금해진 것이다.

유태일 감독 역시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여우처럼 웃은 이도원이 대답했다.

< 비상하다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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