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명세, 양날의 칼 (10) >
“액션!”
촬영은 12테이크를 넘어가고 있었다.
같은 장면을 열두 번이나 촬영한 것이다.
배우들은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 누구도 앓는 소리를 할 수 없었다.
가장 많이 맞고 굴러다닌 이도원이 활활 불타는 눈빛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도원과 치열한 난투극을 벌이는 형사 역할로 섭외된 백구십 센티미터의 장신 배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뭔 놈의 체력과 정신력이…….’
액션스쿨 졸업생이며 부업으로 헬스트레이너를 하는 그였다.
운동은 그의 삶과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지치고 온 몸의 기운이 다 빠지는데 이도원은 쌩쌩했다.
한편, 모니터 속으로 뛰어 들어갈 듯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도원을 본 유태일 감독은 남모르게 미소 지었다.
‘조금의 불만도 없는 표정이야.’
불평을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배우는 드물지만 그들도 사람인 이상 피곤하면 표정에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로 봤을 때 이도원은 피곤을 잊은 얼굴이었다 유태일 감독은 예의상 장난스럽게 물었다.
“다들 어떡하시겠습니까? 오늘 들어갔다 내일 다시 촬영하시겠습니까?”
유태일 감독이 외치며 시계를 보았다.
새벽 네 시. 모두가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고 있을 시간이었다.
단역배우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도원에게로 향했다. 모든 결정을 맡긴다는 뜻이 담겨있었다.
가만히 모니터를 보고 있던 이도원이 고개를 저었다.
“특수 분장 지우고 또 하고… 피 닦고 또 피 칠하고… 끔찍해요. 이대로 가시죠.”
유태일은 고개를 끄덕이고 지시했다.
“자- 촬영 재개합니다!”
이도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현관문 앞에 섰다.
딸 역할의 아역배우와 형사 역의 남자배우는 방 안으로 도로 들어갔다.
아내 역할의 여배우는 거실에 넘어진 시늉을 했다.
주연과 단역들이 제각기 위치로 돌아가자 촬영 팀과 눈빛을 주고 받은 유태일 감독이 신호를 보냈다.
“레디. 액션!”
힘찬 목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무표정한 이도원이 칼을 빼들었다.
아내가 쓰러진 채 비명을 질렀다.
“꺄악!”
그 목소리를 듣고, 방 안에 있던 형사가 나타났다.
“무슨 일 입니까?”
이도원의 표정이 당황스럽게 변했지만 찰나였다.
형사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을 땐 이미 식칼이 목을 찌르고 있었다.
“큭!”
형사는 몸을 비틀며 팔로 눌러 칼날의 궤도를 바꾸었다.
대신 칼은 형사의 폐를 뚫었다.
경동맥과 기도를 한 번에 뚫었다면 즉사시킬 수 있었겠지만 옆구리를 찌른 정도로는 단번에 죽일 수 없었다.
반격할 힘이 남은 형사가 손바닥을 휘둘렀다.
백구십 센티의 거구에서 나오는 위력은 대단했다.
퍼억!
이도원은 칼을 떨어트리며 나가떨어졌다.
형사가 코뿔소처럼 달려와 그의 위로 올라탔다.
‘크으.’
이도원은 고통을 고스란히 느꼈지만 프로페셔널 한 킬러답게 침착한 대응을 했다.
형사가 올라타는 순간 다리를 들며 머리 위로 넘겨버린 것이다.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온 이도원은 칼을 잡는 대신 시계 줄을 늘어트렸다.
폐가 손상됐지만 기흉이 생기진 않은 형사가 일어나며 이를 갈았다.
“이 새끼… 전문가구나?”
이도원은 거친 호흡을 정리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형사가 벽장에 놓여있는 동색 트로피를 손에 들고 단단히 벼렸다.
“사람 잘못 건드렸어.”
그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도원은 형사가 휘두르는 트로피를 어깨로 막았다.
퍼억!
그가 비명을 토했다.
“큭!”
원래는 피하는 장면이었다.
무술감독의 말로는 보다 현실성이 있으려면 맞아야 한다고 했지만 피하기로 정했었다.
그럼에도 기꺼이 얻어맞은 이도원은 형사의 목에 시계 줄을 걸며 왼쪽으로 돌아갔다. 무술감독과 수백 번 연습했던 동작이었다.
휘리릭-.
시계 줄이 순식간에 형사의 목을 감으며 졸랐다.
형사가 몸부림치는 힘이 대단했기에 이도원은 뛰어올라 등에 매달렸다. 양 다리로 옆구리를 조이자 옆구리를 찔렸던 형사가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악!”
사실적인 연기와 함께 형사가 뒷걸음질 쳐서 이도원을 벽장에 처박았다.
벽장 위에 들어있던 물건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난장판이 된 그때, 아내 역할의 단역 여배우가 살금살금 다가왔다.
형사가 몸을 돌리는 순간 여배우의 골프채가 이도원의 등짝을 후려쳤다.
한 번, 두 번…….
퍽!
이도원이 참던 비명을 뱉었다.
“큭!”
그는 더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시계 줄을 풀며 떨어져나갔다.
곤두박질치자마자 벌떡 일어나 골프채를 피했다.
탁!
막 휘두르는 소품 골프채가 거실의 가구들을 때렸다.
이 부분은 차후 실제 골프채로 따로 촬영할 예정이었다.
간신히 공격을 피한 이도원은 욕지거리를 뱉었다.
“씨발.”
가족들은 죽이면 안 되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도원은 골프채를 피하다가 부엌 의자에 걸려 넘어졌다.
이것 역시 콘티에는 없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도원은 당황하지 않고 의자를 잡아 골프채를 막으며 기어서 달아났다.
“죽어! 죽어!”
단역 여배우가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며 쫓아왔다.
이도원은 틈을 노려 골프채를 잡아채고, 그녀를 밀며 함께 넘어졌다. 단역 여배우의 배 위로 올라탄 이도원은 주먹으로 얼굴을 후려치는 시늉을 하며 바닥을 때렸다. 그러자 단역 여배우가 고개를 돌리며 기절한 척을 했다.
그때 방에서 나온 딸 역할의 아역이 화분으로 이도원의 머리를 내려쳤다.
퍼억!
소품이 부서졌다.
이도원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손을 뻗어 아역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번들거렸다.
짤막하고 나직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씨발……. 개 같은 년들.”
이내 이도원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두리번거렸다.
형사는 책장 아래 쓰러져있고, 단역 여배우는 자신에게 깔려있었으며, 목을 잡힌 아역은 끅끅대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세 명의 배우들은 일련의 과정이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본능적으로 연기를 소화해 낸 것이다. 반복된 열 두 번의 테이크 동안 동선이 몸에 익은 덕분이었다.
마침내 유태일 감독이 외쳤다.
“컷. 오케이!”
스태프들이 박수를 보냈다.
이런 고난도 롱테이크 액션 씬에서 13테이크 째 오케이를 받은 건 믿기지 않을 만큼 훌륭한 성과였다.
유태일 감독 자체가 완벽주의였기에 모두들 30시간 이상 촬영할 것을 예상하고 있던 참이었다.
배우들이 서로를 일으키고 다독이며 상황을 수습했다.
오케이 사인을 보낸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이제 산 하나 넘었을 뿐이지만 가장 가파른 산은 넘은 셈입니다. 이제 서로 마운트(카메라를 몸에 고정시키는 장비)를 착용하고 클로즈업 촬영에 들어가겠습니다. 같은 액션 다시 한 번 준비해주세요. 그리고 소품 팀은 따로 찍을 가구 파손 장면 준비해주세요.”
지금까진 카메라 두 대가 따라붙으며 롱 테이크로 촬영했다.
여기서 다른 촬영기법의 장면들을 추가해 일괄적으로 편집하는 작업이 진행될 터였다.
스태프들은 30시간 이상의 롱 타임을 예상했지만 배우들의 호연으로 17시간 만에 촬영이 마무리 됐다.
해산 전 유태일 감독이 이도원을 따로 불러 직접 전달했다.
“오늘 수고했다. 도원아.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엮이는 장면들이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내일 뵐게요.”
그는 나머지 스태프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밴에 올랐다.
이도원을 기다리고 있던 오준식이 물었다.
“어땠어?”
이도원은 곰곰이 생각하다 오늘 촬영에 대한 평을 한 마디로 정리해 던졌다.
“후련했어.”
*
이도원은 실로 오랜만에 어머니와 누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매일 새벽 늦게 들어가서 일찍 나가는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 문자를 주고받거나 잠깐잠깐 인사를 나눌 뿐 가족과 대화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숨 가쁜 드라마 촬영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영화 크랭크 인에 돌입하면서 숨 돌릴 틈도 없었던 것이다.
밤샘 촬영을 하고 집에 들어갔을 땐 아침 열 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다행히 주말이라 어머니와 누나가 모두 집에 있었다.
“피곤하지? 얼른 좀 자둬라.”
어머니가 걱정이 한가득인 얼굴로 말했다.
이다원 역시 이도원을 배려했다.
“아주 얼굴이 반쪽이 됐네, 우리 동생.”
이도원은 지친 미소를 지었지만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식탁에 앉았다.
“배 고파요. 엄마.”
“그래? 뭐 좀 먹을래?”
어머니는 번개처럼 일어나 냉장고를 뒤졌다.
이도원을 주기 위해 사두었던 소고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밥은 잘 먹고 다니니?”
어머니는 고기를 구우며 물었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웃었다.
“그럼요. 요즘 너무 바쁘고, 너무 행복해요.”
이다원은 과제를 저 멀리 치워버리고 이도원의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고 말했다.
“아이고. 연예인들 보면 항상 부럽고 매일 놀면서 돈 버는 것 같았는데. 실제로 내 동생이 연예인이니까 알겠네. 얼마나 힘든 직업인지.”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힘들다고 할 수 없지.”
이도원은 선선히 대답하며 덧붙여 물었다.
“누난 학교 잘 다니지?”
“그럼~. 매일 네 안부를 묻는 친구들 때문에 여간 귀찮은 게 아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뿌듯하더라고. 내 동생이 연예인이라서가 아니라, 열심히 하는 보람이 있는 것 같아서.”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넌? 학교는 어떡할 거야?”
“일단 회사에서 촬영 공문을 보내주기로 했어. 시험은 봐야겠지만.”
“학교까지 다니게? 그렇게 바쁜데?”
“가끔은 나가서 머리 식히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학점 안 나오면 엄청 창피하겠지만… 일상과 경계를 긋고 멀어지고 싶진 않아. 내 일이 연기고 내 직업이 배우일 뿐이지, 별나라 달나라 연예인으로 남고 싶진 않으니까.”
어머니가 고기를 한 접시 내오며 말했다.
”엄마는 찬성!”
“역시.”
이다원이 시익 웃으며 말했다.
“엄마는? 요새 연예인들 대학 포기 엄청 해요. 아마 도원이 학교 나가면 난리가 날 걸? 연기과면 더더욱 널 동경하고 너랑 친해지려고 햘 텐데.”
“그렇겠지.”
중얼거린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동경 어린 시선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 모든 것들이 노력에 대한 보상이다.
물론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타임 슬립이라는 신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누리지 못했을 것들이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유들이야말로 이도원이 겸손해야할 이유였다.
“영화 나오면 시사회 초대할게.”
이다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참, 나 드라마 봤어. 엄마는 아직도 못 보는 듯.”
“얘는? 그래도 요새 케이블TV 신청하고 나선 조금 씩 본다.”
엄마의 말에 남매가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기를 유지한 채 이도원이 말했다.
“그래서 어땠어?”
“좀 달라 보이더라?.”
대답한 이다원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연기 하나는 기똥차더라고.”
어머니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직 이 회까지 밖에 안 봤는데 울었다.”
“그때까진 전혀 안 슬프거든요? 그건 도원이가 나왔으니까 운거고. 엄만 아마 너 나오는 장면은 얼굴 가리고 손가락 틈으로 보실걸?”
“이 계집애가, 넌 꼭 엄마가 무슨 말 하려고 하면 태클을 걸더라?”
“알겠어요, 알겠어. 에휴… 우리 김 여사님 또 삐지셨네.”
두 모녀의 격 없는 대화를 바라보던 이도원은 마음속에서 행복감이 차올랐다.
그때 어머니가 말했다.
“참, 내 정신 좀 봐.”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가 통장을 가져와서 내역을 보여주었다.
이도원이 부탁한대로 수익의 70%는 주식을 매수하고 있었다. 다른 점은 나머지 30% 역시 생활비로 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도원은 울컥 했다.
‘모두 날 위해 쓰셨구나.’
일부는 연금으로, 일부는 적금으로 빼서 목돈을 만들고 있었다.
심지어 이도원의 수익은 누나인 이다원에게조차 한 푼도 분배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막 다 지어진 밥을 가득 퍼주었다.
이도원이 말했다.
“엄마. 엄마랑 누나도 좀 써요.”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네 짐이 되겠니? 나도 경제활동을 하고, 네 누나도 학교 잘 다니고 있다.”
“나도 너 못지않게 많이 벌 거야.”
이다원도 대수롭지 않게 거들었다.
이도원은 울먹이며 수저를 들었다.
‘이번 만큼은.’
지난 생처럼 보잘 것 없는 아들이 되지 않을 것이다.
간혹 어려울 때마다 누나가 보내주는 생계비를 마지못해 받지 않을 것이다.
이도원은 조용하게 다짐했다.
< 유명세, 양날의 칼 (10)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