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명세, 양날의 칼 (9) >
유태일 감독은 촬영을 재개했다.
이곳에서의 분량을 끝낸 이도원은 단역배우가 경찰 역할의 보조 출연자들에게 구출되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유태일 감독이 불쑥 말했다.
“연기 자체는 완벽해서 오케이 사인을 보냈지만, 네 감정에는 문제가 있다.”
뜻밖의 일침에 이도원은 고개를 돌렸다.
유태일 감독이 말을 이었다.
“살인범을 연기하는 배우가 진짜 살인범이 되어버리면 전혀 영화적이지가 않아. 정형화된 살인마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지. 사실적인 연기는 좋지만 그 배우만의 스타일이 없다는 건 큰 단점이다.”
그는 부연설명이 필요하다고 여겼는지 덧붙여 말했다.
“배우는 관객의 상상력 보다 앞서야 한다. 넌 관객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인간의 폭력성을 표현해야하는데, 현재까진 누구나 상상하는 모습을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도원 머릿속에 천둥이 쳤다.
유태일 감독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다른 사람인 유태일 감독의 조언을 통해 신용운이 내린 가르침의 진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신용운 선생님의 말씀은 캐릭터가 되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사이코패스를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라는 뜻이었어. 내가 너무 큰 부담과 욕심을 가졌다.’
이도원은 눈을 지그시 감고 마음을 달랬다.
어디서부터 변해야할지 생각을 정리했다.
그때 유태일 감독이 말을 이었다.
“난 장황하게 말로 설명하는 재주가 없다. 일단 촬영 본을 봐. 그래, 이 장면.”
화면이 멈췄다.
화면 안에는 한눈에 봐도 건조한 캐릭터가 있었다.
직접 연기를 할 땐 못 느꼈는데 캐릭터는 빤한 화술과 움직임을 보였다.
즉 연기센스가 분위기를 못 따라간다.
모니터로 빨려 들어갈 듯 집중하는 이도원에게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네가 이걸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오늘 촬영은 여기서 스탑이다. 봐. 보고 또 봐.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어.”
유태일은 정색을 하고 이도원을 몰아세웠다.
졸업 작품부터 함께 했고, 앞으로도 같이 갈 배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더욱 단호했다.
‘언제 어디서든 성장하는군.’
내심 생각한 유태일 감독은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이도원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고 못 들은 척 현장을 바라보았다.
고민하던 이도원은 유태일 감독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대로 갔다간 다음 주 쯤에는 현장이 아닌 구치소에 있게 됐을지도 몰라요.”
*
다음 장면은 인근 아파트에서 시작됐다.
이도원이 단역배우의 가족들에게 찾아가는 장면이었다.
이도원은 겉옷 속에 무언가를 숨긴 채 조금 빨리 걸었다. 불안한 심리를 표현하듯 걸음걸이를 조절했다. 이 움직임은 '윤도강'이란 캐릭터가 거침없이 범행을 자행한다는 데서 착안했다. 두려움이란 감정이 없는 사이코패스의 모습을 드러내고자함이었다.
이도원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여학생 역할의 보조 출연자가 고양이를 안고 곁에 와서 섰다.
이도원은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시킨 채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이도원이 ‘윤도강’을 연기할 때 눈알만 굴리지 않고 얼굴 전체를 돌려 시선을 움직이는 것은 섬뜩한 느낌을 자아내기 위한 연출이었다. 또한 그는 좀처럼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고양이 예쁘네.”
빤히 보던 이도원이 말했다.
여학생이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띵-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두 사람이 타면서 사인이 떨어졌다.
“오케이, 컷.”
다음은 엘리베이터 씬이었다.
여학생이 4층을, 이도원이 18층을 눌렀다.
여학생은 무언가 짜증이 나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내가 죽여줄까?”
이도원이 불쑥 한 마디를 뱉었다.
여학생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를 보았다.
입 꼬리를 비틀며 피식 웃은 이도원이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장난이야, 장난.”
그의 악마적인 웃음을 본 여학생은 엘리베이터가 4층에 도착하자마자 도망치 듯 내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컷.
다음으로 남겨진 이도원이 18층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촬영했다. 그 뒤 1802호 앞에서 혹시 모를 감시카메라나 목격자의 유무를 확인하며 서있는 모습을 담았다.
머지않아 이도원이 뒤돌아섰다. 눈앞에 ‘1802’라는 호수가 보이고 바로 옆에 창문이 달려 있었다. 창문 안에서 모녀간의 대화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시나리오와는 달리 이도원이 문 앞에 잠깐 멈춰서있었다. 그는 창문 안을 삼 초 정도 들여다보았다.
“컷! 도원이 잠깐 와봐.”
유태일 감독의 말에 이도원이 다가갔다.
방금 찍은 장면을 모니터링 하던 유태일 감독이 물었다.
“왜 멈춘 거야?”
그 질문에 이도원이 답했다.
“제가 아파트에 등장한 순간부터 관객들은 점점 긴장감이 고조될 거예요. 이미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상황이니까 연기의 패턴을 더더욱 줄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한 장의 사진 같은 느낌을 주면 임팩트가 더 강해지는 것 같지 않아요?”
“아니, 이번에는 나무라려는 게 아니고.”
유태일 감독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좋아서. 칭찬하려고 불렀다.
“감사합니다.”
이도원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유태일 감독은 빙그레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도원이는 감정적이기 보단 디테일한 연기가 잘 어울려.’
그가 말했다.
“다시 한 번 가자.”
“알겠습니다.”
이도원은 자리로 돌아가 연기를 했다. 테이크 수가 늘어갈 때마다 이도원의 연기는 정밀하고 자연스러워졌다.
유태일 감독은 점점 이도원이란 배우를 어떻게 써먹을지에 대해 눈 뜨고 있었다.
‘원 테이크 만에 오케이를 내는 것 보다, 잘했어도 여러 번 찍는 게 낫겠어. 이도원은 실시간 성장형 배우다. 테이크 마다 끊임없이 성장하는 초대형 신인이야.’
그 말대로 점점 좋은 장면이 나왔다.
한편 이도원은 나름대로 지난 한 달 간 컨테이너 박스를 들락거리며 생긴 생각과 버릇을 버리려는 중이었다. 어차피 버린다고 모두 버려지진 않는다.
다만 어느 정도 버리고 남은 공백을 여러 가지 기발한 아이디어로 채워나갔다. 그 표현방법은 호흡이나 화술일 수도, 크고 작은 움직임일 수도 있다.
‘이제야 몸에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다.’
이도원은 생각했다.
처음 배역을 맡고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윤도강’이란 연쇄살인범이 되려했다. 연기를 할 때마다 끔찍한 기분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런데 마음을 비우고 강박관념 대신 새로운 아이디어로 머릿속을 채우자 체득한 분위기는 그대로 풍기되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실적인 연기와 영화적 표현,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게 된 셈이었다.
이도원은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를 치운 느낌이 들었다.
그때 다시 한 번 유태일 감독의 사인이 들려왔다.
“레디- 액션!”
이도원은 문을 두드렸다.
쾅 쾅 쾅.
문이 열리지 않자 다시 한 번 두드렸다.
쾅 쾅 쾅.
긴장감이 고조됐다.
안으로부터 여자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전 형사입니다-. 얼마 전 실종된 남편 분 사건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안이 잠깐 잠잠하더니 문이 조금 열렸다.
체인을 풀지 않은 상태로 아내 역할의 단역 여배우가 물었다.
“잠깐만요. 혹시 신분증을 보여줄 수 있으세요? 세상이 워낙 험해서-.”
“그럼요. 당연히 그래야죠.”
이도원은 흔쾌히 대답하며 뒷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눈을 크게 뜨고 작은 문틈 사이로 집 안쪽을 넘보는 모습이 수상해보였는지 단역 여배우가 말했다.
“죄송한데요, 형사님. 지금 날도 너무 늦었고 애도 자고… 낮에 한 번 와주시겠어요?”
“아… 애가 자는구나.”
이도원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그녀를 똑바로 봤다.
“싫은데?”
그는 순간 등 뒤에서 두꺼운 펜치를 꺼내 사슬을 잘랐다. 사슬이 잘려나가자 이도원은 단역 여배우를 거칠게 밀치며 문 안쪽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아악!”
여배우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지고 이도원이 문을 잠갔다.
“컷!”
유태일이 흡족한 표정으로 컷 사인을 보냈다.
똑같은 장면을 몇 차례 더 찍자 점점 좋은 장면이 나왔다.
체인을 계속 갈아 끼우며 촬영하는 동안 펜치에 체인이 잘리지 않아 엔지가 난 적은 있었지만 배우들의 연기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이도원은 정말 거칠게 밀쳤고 단역 여배우는 크게 나가떨어졌다. 물론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직접 일으켜주며 그때마다 사과를 했다.
“괜찮으세요? 많이 아팠을 텐데… 멍 안 들었어요?”
“아니에요! 연기는 연기죠! 진지하게 임하는 게 좋아요. 그나저나 도원 씨는 소문대로 연기력이 대단하네요.”
단역 여배우는 오히려 칭찬을 하며 웃는 얼굴로 받아주었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다음 샷을 찍을 집 안으로 이동했다.
콘티에 격렬한 격투 씬이 들어가 있었다.
집안에 들어가 보니 이미 형사 하나가 와있었다.
이도원은 형사를 공격하지만 상대가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내 역할과 딸 역할의 단역 여배우들도 가세해 이도원에 저항하는 장면이었다.
이도원이 콘티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빨래판 위에 누워있는 기분인데요? 맞는 씬이 많으니까 좀 불안하네요.”
분장 팀이 이도원에게 분장을 했다.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빨리 끝내자.”
“후- 알겠습니다.”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역 배우들은 한쪽에서 무술감독의 현장지시를 받고 있었다. 이어질 씬은 먼저 방문해 있던 형사가 이도원과 격렬한 몸싸움을 하는 장면.
여자는 형사를 도와 골프채를 휘두르고, 딸아이도 엄마를 구하기 위해 소품으로 이도원의 머리를 내리친다.
‘워낙 개싸움이라 엔지도 많이 나겠어.’
이도원은 콘티를 훑으며 생각했다.
그동안 분장 팀의 특수 분장이 모두 끝났다.
유태일 감독이 이도원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들어가자.”
이도원은 현장으로 들어갔다.
장면은 문을 닫고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던 이도원이 허리띠 뒤쪽에 숨겨두었던 칼을 빼들면서 시작된다. 다음 난투극이 벌어진다. 형사를 죽이고 두 여자를 사로잡아야 하는 이도원은 신경을 써가며 싸워야 한다.
많이 맞는 장면이기 때문에 설탕으로 만든 끈적끈적한 피를 얼굴에 범벅 해야 될 터였다. 이런 특수 분장은 시간도 오래 걸릴 뿐더러 답답한 느낌을 주고 오래하면 피부가 일어나기도 했다.
‘고생 좀 하겠군.’
이도원은 무술감독에게로 가 동선을 짰다.
무술감독이 말했다.
“도원 씨는 어설픈 것 같으면서도 팽팽한 느낌을 줘야합니다. 비록 여자지만 오히려 도원 씨보다 체격조건이 좋은 형사, 강한 흉기를 든 사람들과 삼 대 일 대치를 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쉽지 않다는 느낌을 줘야 합니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이번 콘티를 확인하며 계획한 생각이 있었다.
‘처음에는 강하게 나가지만 예상과 달리 건장한 체격의 형사가 있자 당황한다. 처음에는 형사한테 기습을 가하고 도망가려는 생각으로 공격했다가… 상대할 만 하다는 걸 알고 점점 자신감을 되찾는 거다.’
이도원은 틈 날 때 스크랩했던 기사들을 떠올렸다.
살인범들의 범행을 보다보면 때때로 육체적 조건이 비슷하거나 더 좋은 상대를 만났을 때 순간 덜컥 겁을 먹고 더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하는 경우가 있다. 이도원은 이런 점을 감안해 ‘윤도강’을 표현할 작정이었다.
무술감독의 지도가 끝나고 유태일 감독이 외쳤다.
“배우들 위치해주세요!”
필연적으로 엔지가 날 수 밖에 없고 일반적인 액션 장면보다도 어렵다는 일명 ‘막 싸움’ 씬. 합을 맞추지 않은 불규칙한 액션을 소화하기 때문에 부상도 잦게 발생한다. 배우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양해를 구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도원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을 때, 유태일 감독의 음성이 들려왔다.
< 유명세, 양날의 칼 (9)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