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74화 (74/178)

< 유명세, 양날의 칼 (6) >

이도원은 차 자매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이상백을 오준식과 함께 먼저 보내고 장례식장에 남았다. 밤새 끝까지 자리를 지킨 뒤 새벽녘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촬영현장으로 출발하기까지 두 시간 남짓 남은 시간.

‘어차피 내가 가진 무기는 연기뿐이야.’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이도원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더 고민한다고 해서 답이 나올 문제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도원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

이도원은 퀭한 얼굴로 밴에 올랐다.

오준식이 태평하게 물었다.

“어제 대표님 술 좀 되셨던데. 무슨 일 있었어? 넌 또 얼굴이 왜 그래?”

이도원이 장례식장에서 늦게 귀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가 에너지음료를 건넸다.

이도원은 캔을 따지 않고 볼에 대고 굴리며 답했다.

“무슨 일은 무슨 일.”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목 베개를 하고 대본을 꺼냈다.

고개를 저은 오준식이 차를 출발시켰다.

이도원의 집에서 출발한 밴은 내부순환도로와 강변북로를 거쳐 이십 분 만에 상암동 TBT방송국에 도착했다.

오늘은 <시간아! 돌아와> 드라마 세트촬영이 있는 날.

이도원과 오준식은 밴에서 내려 세트장으로 갔다.

두 사람을 본 스태프들이 손을 흔들었다.

그때 민영기가 물었다.

“상태가 왜 그래? 괜찮겠어?”

“어제 장례식에 다녀와서요.”

오준식이 대신 대답했다.

앉아서 대본을 확인하던 정용주가 말했다.

“차에 가서 쉬고 있어. 촬영 시작하기 전에 FD 통해서 알려줄 테니까. 틈날 때마다 눈 좀 붙이라고.”

그는 이도원은 전폭적으로 배려하며 덧붙였다.

“오늘 클라이맥스야. 알지?”

“예. 그럼요.”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아! 돌아와> 촬영 팀은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스케줄을 소화해나가고 있었다.

특히 이도원은 영화 스케줄과 겹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엔지 없이 호연을 펼쳤다. 매 순간 최대한 집중했고, 그 지속적인 노력이 지금의 성과를 내주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두 회 분량을 앞서다니.’

정용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덕분에 김미정 작가만 대본 마감이 빨라졌다. 촬영스케줄이 앞당겨진다고 작가가 속도를 맞춰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그녀는 현재까지 잘 협조해주고 있었다.

이래저래 여유가 생긴 마당이다.

정용주는 클라이맥스에서 이도원의 연기력을 적극 활용할 생각이었다. 여러 컷을 찍어놓고 최고의 명장면을 뽑자는 욕심이 생겼다.

“반드시 시청자들을 울려주겠어.”

중얼거린 그는 민영기에게 물었다.

“어제 시청률 몇 프로 나왔다고 했지?”

“평균 12.4%입니다. 인터넷 보시는 게 빠를 걸요? 우리 드라마에 대한 기사로 도배가 돼있을 테니까요.”

“마의 장벽 5% 넘겼을 때부터 무섭게 붙는구먼.”

“군중심리는 무시 못 하죠.”

민영기의 말에 정용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원이 완전 스타 됐겠는데?”

“인터넷 안 보세요? 난리 났잖아요. 이미 신드롬인데요, 뭘.”

정용주가 흐뭇하게 웃었다.

“스타 하나 배출했군.”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바닥이긴 하지만, 특별한 문제만 없다면 쟤는 이제 탄탄대로에요.”

민영기는 분장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이도원을 눈짓했다.

그가 자신의 일인 것 마냥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우리의 심장>도 뒤늦게 재조명 되고 있고요. 십 대 때 이십 대 연기를 훌륭히 해내서 영화제에서 주목받았었는데, 우리 <시간아! 돌아와>에선 또 사십 대 가장 역할을 소화하고 있죠. 엄청난 신인 아닙니까? 신인인데도 불구하고 유태일 감독의 차기작 <악마의 재능>에서 티켓파워를 보여줄 거라고 기대합니다.”

“우리는 스타를 헐값에 쓰고 있는 셈이군.”

정용주는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광고 섭외가 줄을 잇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반면, 정작 이도원은 자신의 인기도를 전혀 실감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근래에 그는 하루 중 대부분을 차안이나 현장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따라서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는데, 이도원은 인터넷을 자주 보는 편도 아니었다. 그 시간에 차라리 인물분석이나 화술연습을 했다.

촬영준비가 끝나자 FD가 졸고 있는 이도원을 깨웠다.

오준식은 현장에 투입하기 전 기지개를 펴는 그에게 말했다.

“참 천하태평이야.”

“뭐?”

“아니야. 잘 하라고.”

“당연하지!”

흔쾌히 대답한 이도원은 세트로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카메라가 그를 담았다.

정용주가 세트 밖에서 모니터를 통해 확인했다.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스태프, 배우 레디-.”

모니터 안에서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메라 감독, 조명 감독, 오디오 감독 역시 정용주를 보며 눈으로 사인을 보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정영주의 입에서 신호가 떨어졌다.

“액션!”

이도원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잠들면 안 돼.”

그는 마침 전날 밤을 새웠기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그러자 눈꺼풀이 저절로, 자꾸만 감겼다.

이도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얼굴을 세게 꼬집었다.

불쑥 일어나더니 소파 앞을 맴돌며 볼을 때렸다.

볼이 빨개져서 중얼거렸다.

“잠들면 안 돼.”

그는 같은 말을 돼내었다.

한참을 홀로 발악하던 이도원이 힘을 잃고 소파에 기댔다.

“아니, 아니야. 잠들면 안 돼.”

그는 잠에서 깨려는 듯 일부러 소리 내어 말했다.

“잠들면 모두 끝이다. 수연이도, 아이들도. 모두 사라질 거야. 잠들면 모든 게 끝이다.”

이도원은 고개를 흔들며 카메라 화면 밖에 나갔다. 그는 스태프에게 에너지음료 캔이 든 비닐봉지를 받아 다시 화면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서 소파에 앉아 왼편 바닥에 비닐봉지를 내려놓고 에너지음료를 꺼냈다.

딸칵.

캔을 딴 이도원은 물처럼 들이켰다.

그러길 몇 캔.

이도원이 사래가 들린 사람처럼 기침을 뱉었다.

“콜록, 콜록! 헉… 헉…….”

한참 가쁜 호흡을 몰아쉰 그는 헛구역질을 했다.

“우웨엑!”

얼굴이 붉게 무르익었다.

고개를 든 이도원이 피식 웃었다.

“후! 잠이 다 달아나네.”

그는 소파에 등을 묻었다.

“잠이 확 깨…….”

중얼거리던 이도원이 잠에 들었다.

정용주가 외쳤다.

“컷! 오케이.”

그는 손을 내저으며 스태프들을 지휘했다.

“그대로 다음 씬 갑니다.”

정용주의 지시에 따라 스태프들은 장비를 만졌다.

이도원은 번쩍 눈을 뜨고 멀쩡한 얼굴로 돌아와 카메라를 똑바로 보고 앉았다.

연기할 때 카메라를 보면 관객들 역시 카메라를 의식한다. 따라서 ‘카메라를 보지마라’는 기본원칙을 깬 행동이었으나, 이는 마지막 화를 앞둔 19화가 끝나면서 따로 들어갈 장면이었기에 예외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가 전초전이었다면 이제부터 본게임이었다. 이도원이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할 포인트인 것이다.

정용주가 이도원을 향해 외쳤다.

“감정 잡으면 신호해! 바로 촬영 들어간다.”

스태프들은 준비를 마친 상태로 기다렸다.

정적이 흐르고, 이도원이 눈을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액션!”

정용주는 레디 없이 액션을 외쳤다.

이도원이 연기를 시작했다.

“저는 그날 제 가족이 모두 한밤의 꿈처럼 사라질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죠. 어느 날 자고 일어나 봤더니 제 앞에 나타났던 것처럼, 자고 일어나면 사라질 것 같았습니다.”

사이를 두고 기대감을 고조시킨 이도원은 말을 이었다.

“확신했냐고요? 내일 아침 모든 것이 사라질 거라는 확신 보다, 모든 것이 사라지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더 컸던 거죠.”

한편 현장 밖에서 팔짱을 끼고 바라보던 민영기는 속으로 감탄했다.

‘시청자들에게 잔잔하게 말해주는데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아.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안으로 감추며 표현하기가 더 힘든 법인데…….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다. 잘 정제돼 있어.’

정용주 역시 만만찮게 흥분했다.

‘역시 소름끼치는 호소력이야. 아무리 목소리가 좋아도 그렇지, 대사를 할 때마다 심쿵해. 저건 타고난 재능이다.’

잔잔하게 말을 뱉던 이도원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호흡이 말려들어가며 울음을 참는 소리가 되는 순간 그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잠시 흐느끼던 이도원이 고개를 들었을 땐 작은 얼굴에 눈물자국이 가득했다. 그는 호흡을 유지하면서도 발음이 뭉그러지지 않도록 대사를 쳤다.

“저는 제게 과분한 행복을 누린거죠. 짧지만 꿈만 같고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왜 처음부터 그들을 따뜻하게 대하지 않았을까… 왜 조금 더 잘하지 못했을까…….”

이도원은 낮게 오열하며 말을 이었다.

“후회합니다. 더 이상 그들 없는 제 삶은 무의미해요.”

정용주가 모니터 화면을 돌려보며 감탄했다.

“컷! 기가 막히는군.”

심지어 오케이인지, 엔지인지도 말하지 않았다.

이도원이 다가와 그의 곁에서 모니터를 함께 봤다.

정용주가 이도원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가 봐도 기막히지?”

“하하.”

이도원은 머쓱하게 웃고 말았다.

그때 민영기가 거들었다.

“스태프들도 다 감탄했다. 이제 큰 씬은 대부분 끝났어. 앞으로는 즐거운 씬들만 남았다. 이를테면 수려 씨와 키스신이라든지.”

*

다음 촬영할 장면은 김수려와의 키스신이었다.

촬영 장소는 상암동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레스토랑.

이도원이 연기하는 최정우가 훌륭한 남편이자 가장이 되기로 작심한 뒤 결혼기념일, 정수연 역할의 김수려에게 매일 같이 이벤트를 해주는 장면이었다.

스태프들이 먼저 이동하고 이도원과 오준식은 밴을 타고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오준식이 백미러를 통해 이도원을 훔쳐보며 짓궂게 웃었다.

“키스신은 처음이지?”

“놀리지 마라. 그렇잖아도 긴장되니까.”

이도원의 반응에 오준식이 낄낄댔다.

반면 이도원은 조금 난처한 심정이었다.

‘전생에서야 경험이 있다지만…….’

그러고 보니 타임 슬립한 뒤에는 여자를 사귄 적이 없었다. 여자랑 키스를 나눈 것이 언제 적인지 이래저래 난감했다.

‘감을 완전히 잃은 거 아니야? 어색하게 굴면 곤란한데.’

이도원은 뭐든 잘하면 좋다는 주의였다. 그건 키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연기로 키스를 할 땐 괜히 어설프게 굴다 여러 번 엔지를 내면 서로 민망하고, 여배우에게도 실례가 될 수도 있다.

‘싫은 티야 안 내겠지만.’

이도원은 타임 슬립 전 키스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입을 쩝쩝거렸다.

그를 보던 오준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김수려가 아무리 예뻐도 그렇지 아주 벼르고 있구나, 벼르고 있어. 내가 그동안 친구를 잘못 봤다. 혀를 푸는 것도 아니고 쩝쩝대다니! 저런 야수성을 가졌을 줄이야… 입을 훔치는 정도가 아니라 강탈이라도 할 기센데?”

이도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째려봤다.

두 사람은 키스신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촬영 장소에 도착했다.

대화의 결론은 일단 부딪치라는 것이었다.

오준식이 장난을 이어가며 능청을 떨었다.

“자, 가시죠. 키스의 제왕.”

“그 입을 확 꿰매버려야 되는데.”

이도원이 대답하며 밴에서 내렸다.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장비 세팅으로 바쁜 스태프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에는 김수려가 미소 짓고 서있었다.

이도원이 먼저 다가가 남자답게 말을 붙였다.

“누나. 기분 어때요?”

“네 기분을 걱정해야할 것 같은데? 너 표정 굳었어.”

태연하게 대답한 김수려가 눈을 찡긋했다.

“걱정 마! 이 누님이 잘 리드해줄게.”

< 유명세, 양날의 칼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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