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72화 (72/178)

< 유명세, 양날의 칼 (4) >

이도원은 밤을 새워 연습을 했다. 원래는 조금 자두려 했는데 연습을 하다보니 시간이 휙 가버렸다.

다음날, 이동시간 동안 밴 안에서 눈을 붙인 이도원은 현장에 도착했다.

“오, 도원이!”

정용주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사이 많이 친해진 배우나 스태프들은 서로 말을 놓기도 한 상태였다. 무거운 주제를 토대로 하는 <악마의 재능> 보다 <시간아! 돌아와>의 촬영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밝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정용주 PD의 자유분방한 스타일도 한몫 했다.

이도원은 정용주와 스태프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다들 친근하게 반겨주었다.

숲속을 헤집듯 이도원이 다가가자 정용주가 말했다.

“오늘 새로운 배우가 투입된다.”

“그래요?”

이도원이 겉옷을 벗으며 물었다. 그는 익숙해진 태도로 난롯가에서 스타일링을 받았다.

“도원이 안녕?”

밴에서 내린 김수려가 하품을 하며 인사했다. 그녀는 전날 새벽 라디오 프로에 출연해 잠이 부족한 상태였다.

“네. 새로운 배우가 들어왔다던데?”

“아! 아이돌이야. 윤상욱이라고, 요즘 뜨는 그룹 보컬.”

“윤상욱?”

이도원은 되물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밴 하나가 도착했다. 밴에서는 예쁘장하게 생긴 이십대 초반의 남자가 내렸다. 이도원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이도원은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

윤상욱은 김진우를 본 날 클럽에서 함께 있던 아이돌이었다.

윤상욱이 그들에게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함께 촬영하게 된 윤상욱!입니다.”

윤상욱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는 이도원을 발견하더니 손으로 가리켰다.

“아하. 이 분이 <악마의 재능>에서 진우 형이랑 같이 촬영하신다는 그 분?”

말투가 교묘하게 무례했다.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제가 그 분이고요. 이도원입니다.”

그는 악수를 청했다.

윤상욱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손을 맞잡았다.

‘진우 형이 꽤 신경을 쓰던데… 좋은 감정은 아닌 것 같고. 사람 괜찮아보이는데,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심 떠올린 윤상욱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들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스태프들이 모든 장비세팅을 끝냈다.

이를 확인한 정용주가 말했다.

“자, 다들 위치해주시고. 촬영들어갑니다.”

“촬영 들어갑니다! 배우들 위치해주세요.”

민영기가 따라 외쳤다.

금일 촬영할 장면은 이도원이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장면이었다. 지난 삶을 버리고 가족에게 충실해지는 시점이기도 했다. 그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아내와 저녁을 먹으며 십오 년 간 묻어뒀던 감정을 고백한다.

이중 윤상욱이 나오는 부분은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때다. 그는 오전시간 아이들을 맡아두는 어린이집의 교사다. 촬영 순서는 거꾸로, 아내와 저녁을 먹는 장면부터였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정용주가 말했다.

“레디.”

이도원과 김수려가 식탁에 마주앉았다.

이도원은 반지가 들어있는 케이스를 마이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정장을 곱게 차려입은 이도원을 본 김수려는 아주 잠깐, 심장이 두근거렸다.

‘진짜 멋있네.’

원래도 잘생긴 동생이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매일 편한 복장만 보다가 처음 정장을 입은 모습을 보게 되자 느낌이 새로웠다.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없는 이도원은 아무렇지 않게 카메라를 보고 윙크를 날리며 장난을 쳤다.

정용주가 피식 웃으며 신호를 보냈다.

“액션!”

이도원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돌변했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식탁을 비추는 촛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눈동자의 초점을 김수려에게 맞췄다.

침묵 속에 고조되는 감정.

보고 있던 윤상욱은 팔에 우수수 소름이 돋았다.

‘저 집중력은 뭐야? 바로 사람이 바뀌네?’

윤상욱은 이도원이 촬영 전 장난을 치는 모습을 보고 비웃으며, 거만한 태도로 그의 연기를 평가할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초장부터 충격을 받았다.

그때 이도원이 첫 대사를 읊조렸다.

“난 그동안 현실을 회피했어.”

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마주 앉은 김수려의 마음이 ‘진짜’ 흔들릴 만큼. 당연히 몰입하기도 쉬워졌다. 그녀는 눈을 들어 이도원을 마주봤다.

어두운 공간, 촛불의 불빛을 받은 이도원의 얼굴은 보는 이의 심장을 저격했다.

‘왜 심장 테러라고 하는지 알겠어.’

김수려는 그녀가 며칠 전 보았던 인터넷 뉴스를 떠올리며 내심 고개를 저었다. 가슴을 진정하려 애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저절로 표정이 얼굴 위로 떠올랐다. 달콤한 사랑을 받는 여자의 행복한 얼굴. 그녀가 배역의 감정을 이입시키자 눈물이 다 맺혔다.

이도원이 품속에서 반지케이스를 꺼내 뚜껑을 열고, 다이아반지를 빼들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살며시 감싸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대본에는 없는 장면이었다.

모니터를 통해 보던 정용주가 시익 웃었다.

‘저놈 봐라? 원래부터 걱정은 쥐뿔도 안됐지만, 볼 때마다 사람을 놀라게 하네.’

이도원이 말했다.

“내가 만약 십오 년 전 그날, 당신과 뱃속의 아이를 등지고 떠났다면 난 끔찍한 후회를 간직하고 살아갔을 거야.”

그는 원래 했던 자신의 선택을, 그동안 자의식 깊이 묻어뒀던 후회를 말하고 있었다. 이제는 깨달았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흔들림 없이 차분하고 애잔했다.

“내게 가장 소중한 건 당신과 아이들이었어. 난 그 사실을 외면해 왔지만…….”

말끝을 흐리며 감정을 조절한 이도원이 덧붙였다.

“이제는 내 삶에 충실할 거야. 당신이나 아이들과 함께할 미래. 앞으로의 시간들을 뜻 깊게 보내겠어.”

이도원이 반지를 끼워주는 동안 김수려는 고개를 떨궜다. 눈물이 뚝뚝 식탁보를 적셨다.

이도원은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들었다.

“날 봐. 여보.”

그는 시익 웃으며 말했다.

“사랑해.”

정용주가 외쳤다.

“컷. 오케이! 우으으으!”

그는 양주먹을 쥐며 앓는 소리를 했다.

“완벽해! 이도원, 요 예쁜 새끼.”

“제가 알아봤었다니까요?”

민영기가 옆에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빠 운대요!”

다섯 살 배기 아역 이수현이 깔깔거리며 외쳤다.

그 말대로 윤상욱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 이 드라마 보는데 졸라 슬퍼…….”

스태프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도원은 나직이 한숨을 뱉었다.

‘다행이야.’

그는 전날 <악마의 재능> 리딩 때문에 자칫 지장을 받을까 걱정하던 참이었다. 연습할 땐 불안감을 잊고 몰입했지만 막상 현장에 도착하자 절로 긴장이 됐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오히려 더 좋은 연기를 선보이게 된 것이다.

곁에 다가온 오준식이 고개를 내저으며 속삭였다.

“진짜 못 말린다. 연습벌레.”

*

촬영을 무사히 마친 이도원은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인사를 하고 현장을 떠날 채비를 했다.

한편 윤상욱은 그의 연기에 매료돼 밴까지 마중을 나왔다. 처음의 가벼운 적대감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뒤였다.

“들어가십시오, 형님!”

윤상욱이 구십 도로 인사를 했다.

이도원은 민망한 표정으로 밴에 올라탔다.

시동을 건 오준식이 물었다.

“쟤 왜 저렇게 오버하냐?”

이도원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저런 성격이니까 김진우랑 친하게 지내지.”

오준식은 김진우의 성격을 몰랐기에 그러려니 하며 운전을 했다.

“그나저나 네 첫사랑 얼굴이 궁금하다. 네가 사랑을 다 해봤다니… 우리 도원이, 다 컸네.”

“너 자꾸 그렇게 까불다 한 대 맞는다.”

이도원이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오준식이 깨갱했다.

“잘못했습니다, 이 배우님. 그나저나 저도 같이 가서 얼굴만 보면 안 됩니까? 아니면 둘이 함께 셀카를 한방 찍어주셔도 됩니다만.”

“됐거든?”

피식 웃으며 말한 이도원은 가슴이 가볍게 뛰고 있었다. 차수희를 보는 건 그야말로 오랜만이었다.

거리를 생각했을 때 병원이 마치기 한 시간 전 쯤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럼 상담을 마치고, 그녀가 약속이 없다면 저녁이라도 한 끼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먹어야 뭘 해?’

이미 마음을 접었던 이도원이다. 그래도 은근히 기대감이 드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제는 그 역시 차수희와 같은 성인인 것이다.

‘설마 그새 결혼을 하진 않았겠지?’

가끔 들어가보는 차수희의 SNS에도 결혼을 했다는 소식은 없었다.

이도원은 밴을 타고 동네에 있는 <미래정신과의원>에 도착했다.

그에게 오준식이 물었다.

“대성했다는 걸 어필해봐. 일부러 밴을 보이는 곳에 둘게.”

“허세 부리라고?”

“그게 왜 허세야? 네 건데.”

오준식이 능청스럽게 대답하자 이도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디 안 보이는 곳에 차 두고 PC방 같은 데 가서 놀다와. 전화할 테니까.”

저녁 열 시, 신용운과 연기 트레이닝 약속이 잡혀있었기 때문에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기가 애매했다. 오준식 역시 수업을 참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끄덕인 오준식이 답했다.

“만약 저녁 스캐줄 취소해야 되면 연락주세요.”

신용운과 약속을 어기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능청을 떠는 오준식을 보며 웃어버린 이도원이 차에서 내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 층 <미래정신과의원>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이도원은 방금까지 품었던 기대감에 비례하는 실망감을 느껴야만 했다.

[원장님의 경조사로 인해 이번 주는 진료를 쉽니다.]

문에 위와 같은 알림판이 붙어있었다.

‘진작 전화라도 해볼 걸 그랬나?’

그보다 경조사라니, 걱정이 됐다.

‘장례식? 결혼식?’

경사스러운 일과 불행한 일 모두 이도원에게는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내려갔다. 그리고 오준식을 부르는 대신 병원 주변을 산책했다.

‘동네 돌아다녀본지도 꽤 됐네.’

고등학교 시절 연습하던, 공사가 중단된 부지의 컨테이너박스로 갔다.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공사가 재개되면 여기도 없어지겠지.”

이도원은 씁쓸하게 웃으며 컨테이너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도원이 갖다 두었던 전신거울이 있었다. 길가에 버려진 걸 주워다 연습용 거울로 삼았던 것이다.

“먼지봐라.”

이도원은 거울을 발로 톡톡 차고 입으로 불어서 먼지를 떼어낸 뒤 앞에 섰다. 그는 입을 열어 그 당시 연습했던 독백대사를 생각나는대로 뱉었다. 독백대회 우승을 검어쥐었던 <리처드 3세>의 ‘리처드 3세’ 독백이었다.

철저한 악인을 연기했던 당시가 떠올랐다.

‘<악마의 재능> ’윤도강‘도 비슷한 인물이잖아?’

외려 잔인하다면 ‘리처드 3세’가 더 잔인하다. 차이가 있다면 <리처드 3세>는 연극이고 <악마의 재능>은 영화라는 것. 비유적인 표현이 가득한 희곡과 적나라한 표현이 가득한 시나리오의 차이.

‘결국 인물을 이해하는 법은 다르지 않다.’

이도원은 뜻밖의 곳에서 ‘리처드 3세’를 연기하던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고 어느 정도 자신감을 찾았다. 그는 벌써 오래 전에 악마적인 인물을 연기해봤고 자아를 잃지 않았었던 것이다. 다만 <악마의 재능>에서 ‘윤도강’은 ‘리처드 3세’에 비해 적나라한 표현과 행위를 동반하기 때문에 지레 겁을 먹었던 것 뿐.

이도원은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사람, 장소, 추억조차 스승이군.”

이도원은 피식 웃으며 전화를 꺼냈다.

때마침 오준식에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이도원은 전화를 받았다.

“이제 간다.”

-오늘 일정 하나 더 추가됐다.

“뭔데?”

-백 프로덕션 설립 당시 최고투자자인 차광열 회장님의 장례가 있대.

“차광열 회장님?”

-얼마 전부터 대표님이 제집 드나들 듯 병문안을 가셨잖아. 그 분.

“아아.”

이제야 누군지 떠올린 이도원이 대답했다.

“장례식을 가야한다는 거지?”

-응. 지금 어디야?

“내가 갈게. 병원 앞으로 와.”

이도원은 전화를 끊고 걸음을 뗐다. 그때 느닷없이 그의 뇌리에서 하나의 퍼즐이 맞춰졌다.

이도원은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걸음을 멈췄다.

경조사로 일을 쉬는 차수희, 아버지가 위독하신 차지은, 그리고 차광열 회장의 장례식.

‘혹시…….’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고개를 저은 이도원은 걸음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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