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명세, 양날의 칼 (3) >
“내부자 소행이라고?”
이도원은 눈을 짧게 빛내며 차갑게 웃었다.
“경찰이 범인이라. 왜 그렇게 생각하지?”
김진우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완벽해도 너무 완벽합니다. 노스트라다무스도 아니고, 우리의 동선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어요.”
“여러 번 잡힐 뻔 했던 적이 있는데?”
“그래서 더 이상한 겁니다. 결론적으로 완벽히 빠져나갔어요. 뒤쫓던 선배님 파트너를 살해하고 선배님은 부상만 입힌 채 사라졌죠. 마치 ‘나 잡아봐라’하는 것처럼. 내부자 소행이란 걸 숨기기 위해 일부러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간 겁니다.”
“뭐든 확신은 금물이다.”
감정변화 없이 충고한 이도원이 화제를 돌렸다.
“다시 말하지만 난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렇다고 널 놈의 제물로 삼고 싶진 않다.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도록 해.”
“선배님도 형사고, 저도 형삽니다. 범인을 잡다가 위험해지는 건 우리의 숙명이라고요.”
“말을 안 듣는군.”
이도원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가 새까만 눈동자로 김진우를 마주봤다. 창백한 얼굴과 맞물리는 표정 없는 얼굴이 보는 이의 기분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경고하지. 놈은 내 파트너를 둘이나 죽였어. 너 뿐만 아니라, 네 가족들까지 해칠 거야. 그런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을까?”
눈빛을 받고 심장이 두근거린 김진우가 속으로 생각했다.
‘저 새끼. 진짜 사람 죽여본 적 있는 것 아니야?’
그에게서 시선을 뗀 이도원이 덧붙였다.
“놈은 내가 잡는다. 그러니까 나서지마. 만약 네가 나선다면 놈은 너뿐 아니라 네 가족들까지 노릴 거다. 난 그걸 막아줄 수 없어.”
김진우가 물었다.
“선배님은요?”
이도원은 한결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난 가족이 없다. 놈이나, 나나 철저한 고아지.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어. 오직 나만이 놈을 이해할 수 있다.”
가만히 지켜보던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도원 씨는 좋았고. 진우 씨는 좀 더 표면적인 연기를 부탁합니다. 역할이 뒤바뀐 느낌이 들 정도로 냉랭해요. 극중 앨리트 형사 ‘홍상민’은 정의감이 넘치는 불같은 성격입니다.”
지적을 들은 김진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존심이 구겨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살짝 숙여 표정을 숨기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십 분만 쉬었다 하죠.”
유태일 감독은 눈치가 빨랐다. 그는 김진우의 반응을 읽고 휴식을 주었다.
이미 서로 안면이 있는 조연들은 왁자지껄 리딩장을 빠져나갔다. 진지한 표정으로 리딩을 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유태일 감독 역시 자리를 비우자 장내에는 이도원과 김진우, 박아현만 남아있었다.
이도원은 연기할 대본을 보고 있었다.
그때 김진우가 말을 걸었다.
“잘 하던데. 혹시 우리 구면입니까?”
“구면이죠. 클럽 안에서 봤었습니다. 그때…….”
이도원이 시익 웃으며 물었다.
“KAS 방송국 국장 따님과 함께 계시던데요.”
김진우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옆에서 보고 있던 박아현이 눈치 없이 물었다.
“와. 두 분 사귀는 사이세요?”
그녀는 KAS 방송국 국장 자녀의 나이를 몰랐다. 더구나 이도원이 초면부터 불미스러운 관계를 캐물을 거라고는 짐작조차 못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이곳에서 기분이 상한 사람은 김진우 뿐이었다. 그는 박아현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도원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했다.
그때 이도원이 선수를 쳤다.
“보기 좋았습니다. 요새는 연상연하 커플이 대세더라고요.”
“친굽니다.”
김진우가 칼같이 대답하자 이도원이 눈 꼬리를 휘며 웃었다.
“그렇군요.”
그는 당시 박서진에게 김진우가 KAS 방송국 딸과 키스를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제보를 받았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진 않고, 이쯤에서 자극하는 걸 멈췄다.
“제가 오지랖을 부렸다면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진우 씨를 보고 굉장히 놀랍고 반가웠습니다. 고 일 때 두림예고 공연을 봤었거든요. 진우 씨가 주연이었죠. 그 당시 여기 있는 아현 씨가 초청했고요. 그러고 보니 두 분이 동창이시군요.”
“전 알고 있었죠. 고등학교 때 완전 스타셨거든요.”
박아현이 민망한 듯 대답했다.
“괜히 실례될까봐 말 안했어요. 나중에 친해지면 말 하려고.”
김진우는 이 자리가 영 불편했다. 마음 같아선 한바탕 엎고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까칠하게 말할 뿐이었다.
“나한테 감정 있나?”
그는 이도원을 노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진우가 나가자 박아현이 물었다.
“왜 그래?”
“뭐가?”
이도원이 되묻자 박아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평소보다 말이 많은 것도 그렇고, 엄청 공격적이던데? 저 사람은 널 모르는 것 같은데 말이야.”
“내가 원래 물불 안 가리는 성격을 안 좋아하거든. 연기력도 출중하면서 스폰서를 두겠다.”
“누가?”
박아현의 질문에 이도원이 문 쪽을 눈짓했다.
그녀가 물었다.
“김진우가?”
“KAS 방송국 국장 따님.”
박아현은 그제야 상황파악이 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의 의견은 이도원과는 달랐다.
“굳이 티를 낼 필요 없잖아? 양아치도 아니고.”
“굳이 티를 낼 필요가 없다…….”
이도원은 따라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박아현의 말이 옳았다. 그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도원의 입장에선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을 죽였던 김진우를 본 것이다. 볼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혀끝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맺혔다.
“네 말이 맞다. 앞으로 자중할게.”
이도원은 구구절절 변명하지 않고 깔끔하게 인정했다.
머지않아 김진우가 안으로 들어와 담배 냄새를 물씬 풍겼다.
그를 보며 박아현이 사과했다.
“아깐 죄송해요.”
“아니.”
고개를 저은 김진우가 이도원을 보았다.
“대립관계라 다행이야.”
“영화 잘 나오겠군요.”
이도원이 지지 않고 대답했다.
그때 유태일 감독 이하 조연들이 돌아왔다.
그들이 모두 착석하자 유태일 감독이 재개신호를 보내려다 미간을 찌푸렸다. 이도원과 김진우 사이 감도는 냉랭한 기운을 감지한 것이다.
‘일단 한 번 시켜보고 판단한다.’
연기를 보기 전까진 호재일지 악재일지 알 수 없었다. 드물게 배역과 비슷한 관계의 배우들을 일부러 캐스팅하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그런 경우, 남몰래 교제하는 사이의 남녀 주인공을 서로의 추천으로 쓴다던지 하는 경우였지만.
조금 더 두고 보기로 한 유태일 감독이 입을 열었다.
“다시 리딩 시작하겠습니다.”
많은 분량이 지나가고, 이도원에게 박아현이 살해당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도원은 대사가 없었고 박아현은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연기했다. 배역에 대한 표정과 눈빛, 호흡이 신랄했다. 신들린 것처럼 연기를 소화하는 모습에 이도원이 나직이 감탄했다.
‘역시 훌륭한 재능이야.’
그 다음 아내를 잃은 김진우가 반쯤 미쳐서 심증을 갖고 있는 이도원에게 덤비는 씬을 연기할 차례가 왔다. 이도원은 김진우를 암살하려다 그의 아내 박아현을 죽이는 실수를 범한다. 자신이 범인을 총으로 쏴 죽인 것으로 위장하고 시체에 누명을 씌운다. 깔끔하게 사건을 처리한 뒤, 이제 쉬고 싶다며 사표를 내고 해외로 도주하려 한다.
김진우가 대사를 시작했다.
“네가 죽였지?”
그가 중얼거렸다.
“이대로 널 영웅으로 떠나보낼 것 같아?”
조용히 말하던 김진우는 총을 꺼내는 장면을 생략하고 바득바득 외쳤다.
“이 개새끼!”
얼굴은 붉어졌고 입술이 덜덜 떨렸다.
“내 손으로 죽인다.”
이도원은 주위를 한 번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 친구도 마음이 아플만하죠. 저 같아도 제정신이 아닐 겁니다. 둘이 해결하죠.”
그는 다가가서 김진우를 포옹하는 과정을 생략하고 섬뜩하게 속삭였다.
“내가 그래서 그만하라고 했지? 씨발, 원래 여자는 안 죽였었는데… 네가 설치는 바람에 원칙을 깼잖아.”
이도원이 정반대로 표정을 바꾸더니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날 한국에서 추방했잖아. 그거면 잘 한 거다… 내가 말했잖아? 네 목표를 이뤄도, 다치는 건 너라고.”
김진우는 대답하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눈물이 주륵 주륵 흘렀다. 분노로 혼백이 나간 사람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훌륭한 연기를 선보인 두 사람을 본 유태일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넘어갑시다.”
*
리딩을 마친 이도원은 밴에 올랐다.
그러자 오준식이 물었다.
“둘이 싸웠어? 김진우 표정 똥 씹었던데.”
“싸우긴 무슨. 감독 앞에서 어떻게 싸워?”
“근데 네 표정은 또 왜그래?”
오준식은 걱정스러은 표정이었다.
이도원이 지금처럼 인상을 굳히고 있는 걸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도원은 그 이유를 숨기지 않았다.
“<시간아! 돌아와> 대본만 보다보니 감을 잃었어. 표면적인 연기 밖에 안 나와. <악마의 재능>에서 ‘윤도강’의 심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유태일 감독님이 그러셔?”
이도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생각.”
“넌 너무 완벽주의야. 감독이 오케이면 오케이인거지. 너무 욕심 부리다 네 페이스를 잃고 슬럼프를 겪는 수가 있다? 지금도 충분히 잘 하고 있잖아.”
“너무 찝찝해. 흉내내는 기분이랄까.”
이도원은 시계를 봤다.
새벽 한 시였다.
“연습실 키 받은 거 있지?”
그 질문에 오준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긴 있는데. 오늘은 들어가서 쉬어. 내일 또 드라마 촬영 있는데, 괜히 밤새도록 크랭크 인도 안 들어간 살인범 연기하다가 내일 ‘최정우’가 될 수 있겠어?”
“걱정 말고, 신용운 아카데미로 가자.”
이도원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오준식이 고개를 휘휘 저으며 시동을 걸었다. 더 이상 말려도 소용없음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밴 안에서 이도원은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지금 윤도강 배역을 해봐야 답이 안 나와. 괜히 내일 지장 받지 않도록 최정우 역할 연습을 한다.’
이도원은 늘 상 하던 최정우 역할을 연습함으로써 본연의 페이스와 자신감을 되찾으려는 심산이었다.
그는 시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세 시간 연습한다고 해도 네 시간은 잘 수 있어. 몸 관리가 돼야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다.’
판단을 내린 이도원은 <악마의 재능> 시나리오를 가방에 넣어두고 <시간아! 돌아와> 대본을 꺼냈다.
한 장, 한 장,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라디오를 끄는 오준식의 표정은 걱정이 한 가득이었다.
‘내가 도움이 될 방법이 없을까?’
오준식은 운전하는 내내 생각했다. 그가 되고자하는 매니저는 단순히 운전대를 잡고 배우들의 스케줄을 확인해주는 역할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 역시 지금도 연기를 하고 있는 입장으로서 도움이 되고 싶었다.
마침내 오준식이 말했다.
“내일 중요한 일정 없으니까 밤 촬영 빼고 전부 취소하자. 오랜만에 신용운 선생님 만나 뵙고, 트레이닝 받고, 쉴 시간을 가지는 게 어때?”
백미러로 오준식의 눈매를 본 이도원은 피식 웃었다.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이도원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한 곳, 더 들를 곳이 있다. 우리 동네 <미래정신과의원> 좀 가자.”
오준식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지나치게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며 물었다.
“무슨 문제 있어? 정말 어디가 아픈 거냐?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거나, 내가 모르는…….”
“아니야, 아니야.”
이도원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내 마누라냐? 남자끼리 징그럽게.”
그가 말을 이었다.
“그 병원 원장님이 내 첫사랑이야. 엄마 품이 가장 편하듯 오랜만에 얼굴 보며 추억이나 되새기려고. 겸사겸사 미친 살인범을 본격적으로 이해하려면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을 수 있으니까 예방 차원에서 가려는 거야. 대본을 읽고 ‘윤도강’이라는 캐릭터를 받아들이려고 할 때마다 스스로 방어기재가 생기는 것 같아서.”
이도원은 말을 마치고 생각에 잠겼다. 연기와 실제, 배우와 캐릭터 간의 경계를 둬야한다.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스스로는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완전한 몰입은 위험했다. 그러려면 마음을 안정시켜 줄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 유명세, 양날의 칼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