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명세, 양날의 칼 (2) >
“경대 출신 신입이요?
이도원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그가 연기하는 ‘윤도강’은 정체를 숨긴 채 청부를 받고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살인을 저질러온 사이코패스였다. 한편 낮에는 살인범들을 여럿 검거한 실력파 형사로 활동했다. 그의 정체를 전혀 모르는 ‘오 반장’ 역할의 사십대 조연 유승구가 마주 대사를 쳤다.
“그래. 너무 기죽이지 말고. 알지?”
“하하. 제가 왜 기를 죽여요?”
되물은 이도원은 대본을 멀리 떨어트려 읽었다.
“얘에요? 국립경찰대학교 28기. 2012년 수석 졸업. 엘리트네요?”
“그래. 우리 팀에 자원해서 들어왔다.”
“내근 직을 마다하고 현장으로 온 이유가 뭐랍니까?”
“놈을 잡는 게 목표란다. 지난 십 년 간 꼬리도 붙잡지 못했잖아? 심지어 우리 서 최고의 실력파인 너조차도 놓쳤었고.”
‘오 반장’ 역의 유승구가 말하는 놈이란, 이도원이 연기하는 ‘윤도강’이었다. 그럼에도 이도원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잖아요? 공을 세우고 싶다는 의욕만으로 될 일이 아니란 걸.”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을지 누가 알아?”
그 말에 이도원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일순 얼굴에 냉기가 돌며 소름끼치는 표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이도원은 유승구를 설득했다.
“제 옆에 붙이시려고요? 놈에 대한 건 제가 잘 알아요. 저는 지금껏 놈에게 모든 파트너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먹물 출신 풋내기가 놈을 잡겠다고 설치다가 일을 망치는 꼴을 보란 말입니까?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곧 놈을 잡을 거란 말입니다. 제 단독 수사로 돌려주신다고 약속했지 않습니까?”
이도원은 한 점 흐트러지지 않고 대사를 했다. 막바지로 갈수록 점차 호흡이 떨리며 언성이 올라갔다.
잘 정제된 대사를 들은 상대 배우 유승구는 내심 감탄하며 대답했다.
“그럼 나보고 어떡하라고? 상부의 지시인데.”
“알겠습니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순순히 받아들이는 태도는 아니었다.
“그놈, 죽어도 제 책임 아닙니다. 파트너를 잃은 제 마음도 헤아려주셔야죠. 저한테 이러면 안 되는 겁니다. 제가 왜 놈을 잡으려고 혈안인데요?”
유승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다혈질답게 언성을 높이며 이도원을 나무랐다.
“왜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 처먹어? 수사에 사적인 감정이 개입될까봐 다른 동네 보내려던 걸 막아준 게 누구야? 도를 넘는 행동을 참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내가 너한테 허락 맡아가며 일할 짬밥이야, 새끼야?”
이도원은 다음 대사를 봤다.
(오반장, 종이컵을 구겨서 버리며 등 돌려 걸어간다)는 움직임설명이 있고, 그 밑에 좀처럼 소화하기 어려운 주문이 있었다.
(살인예고를 하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이게 뭐야 싶은 설명문이었다.
이도원은 살얼음판 같이 차갑고 위협적인 얼굴 표정을 드러내며 유승구를 쏘아봤다. 그 눈길을 받은 유승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표정과 눈빛. 모두 좋군.’
불현 듯 시익 웃은 이도원이 중얼거렸다.
“개새끼.”
무미건조하고 나직한 목소리.
밤길에 들었다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이다.
유태일 감독은 미묘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상태나 최정우랑 완전히 상극의 배역이라 걱정했는데… 확실히 늘었군. 빈틈이 없어.’
해당 씬이 끝나자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다음 씬으로 넘어갑니다.”
*
김진우는 이도원의 연기를 보며 적잖이 놀랐다. 지금까진 적수가 될 만한 또래 배우를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자신보다 경력이 풍부한 배우더라도 쉽게 인정하지 않아왔다.
‘저 새낀 뭐야?’
김진우는 이도원의 연기 실력에 감탄했다. 그럼에도 순수하게 인정하기 보단 조금 비뚤게 받아들였다. 자신 보다 두 살이나 어린 이도원이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연기력이 뒷받침 된다지만, 그의 시선에서 이도원은 쉽게 유명세를 얻은 케이스였다.
한편 이도원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나올 씬은 마침내 이도원과 김진우가 조우하는 장면이었다. 조연 분량이 지나가고 곧 두 사람 차례가 오자 유태일 감독이 주문했다.
“두 주인공이 만나는 장면. 자,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주세요.”
김진우의 대사가 먼저였다.
“이 자료를 보시면 놈에게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피해자들 간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놈과 아무 접점이 없다는 것과 같은 수법으로 살해당했다는 것. 개인으로 움직이지만 목적을 갖고 움직인다고 봐야할 겁니다.”
김진우는 확신이 깃든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했다.
그때 말을 자르며 이도원이 끼어들었다.
“뭡니까 이건? 언제부터 신입이 사건브리핑을 하죠?”
‘오반장’역의 유승구가 대신 대답했다.
“내가 시켰다. 이 사건에 대해 오래 연구해왔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에 얼마나 야무진 놈인지 한 번 보려고.”
“하하.”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린 이도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는 김진우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그럼 하나만 묻지. 신입, 네 말처럼 놈이 표적살인을 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왜 놈은 자신의 범행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같은 수법으로 살해를 자행했지? 또 어째서 표적이 아닌 경찰들을 살해한 걸까?”
김진우의 의견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말투.
긴 대사였음에도 이도원은 자연스럽게 소화했다. 대사가 입에 완전히 붙어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떨이지지 않았다.
극적인 효과를 위한 연기인지 이도원에게 느끼는 경쟁심인지, 구분이 애매하게 표정이 굳은 김진우가 대답했다.
“즐기는 겁니다. 우리를 따돌리는 데 재미를 붙인 거죠.”
그 말에 이도원은 조소를 띠고 물었다.
“그래? 그러니까 놈이 내 파트너를 재미삼아 죽였고, 우린 놈의 장난에 놀아났다고? 표적살인을 하는 놈이 재미로 경찰을 죽인다? 표적살인의 뜻이나 알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군.”
그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대사를 쳤다.
거칠지만 노련한 영리한 베테랑 형사의 모습이 그대로 묻어났다. 이도원은 오늘을 위해 국내외의 형사 관련 매체를 섭렵한 상태였다. 동시에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말을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 걸음걸이조차도 형사처럼 바꾸었다.
그 노력이 빛을 발했다.
“이봐, 신입. 표적살인은 대부분 배후가 있다. 아니면 거래라도 오가기 마련이지. 관계가 없는 누군가를 살해 표적으로 정했다는 건 연결다리가 있다는 뜻 아닌가? 제 삼자가 개입된 상태로 조사가 시작되면 정체가 드러나는 것도 시간문제일 텐데 똑같은 수법으로 표적들을 살해한다고? 왜?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 자신을 비롯해 표적 연결책까지 위험에 빠트린다?”
이도원을 보는 조연들의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연기가 미숙하면 대사를 읽는다. 반면 완숙한 연기력을 가진 배우는 대사를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도원은 대사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말하고 있었다.
주변의 반응을 보며 경쟁심이 오른 김진우는 한층 더 진지해진 표정이었다. 그는 감정을 더 끌어올렸다. 돌처럼 굳어진 표정과 딱딱한 말투에서 불쾌감과 모멸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렇습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놈을 정상적인 범주에서 바라보면 안 되죠. 그러면 비상식적인 놈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게 됩니다. 놈 보다 한 발 앞서려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 대사와 비교했을 때 그 사이 호소력이 달라졌다.
김진우를 빤히 쳐다보던 이도원이 비웃는 태도로 일관했다. 마치 일부러 자극하듯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연기인지 현실인지 선뜻 구분하기 힘들 만큼 자연스럽고 교묘한 연기였다.
“그래, 설록 홈즈. 네 마음대로 해봐. 내가 살다 살다 신입한테 교육을 다 받아보네.”
그가 유승구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전 이런 꼴통새끼랑은 같이 일 못합니다. 그러니까 알아서 하십쇼.”
이도원이 다시 김진우를 바라봤다.
“너 경대 27기라고? 나 24기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
김진우가 반박하려 했으나 이도원은 단칼에 잘랐다.
“내가 칠 년 동안 놈을 쫓아다녀서 알아낸 사실은, 놈이 경찰에 반하는 심리를 가진 사이코패스라는 거다. 그 증거로 놈은 내 파트너 둘을 죽였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하지만 두 눈에는 지독한 한이, 원한이 담겨 있었다. 그는 정말 살인범 하나를 오래 쫓아왔던 형사처럼 그동안 알아낸 사실들을 줄줄이 읊었다.
“놈이 관계가 없는 먼 거리의 불특정다수를 상대로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서다. 그 결과 오늘 첫 출근인 네가 놈의 수작에 걸려든 거고. 이는 결국 의도된 계획살인은 맞지만 표적살인은 아니라는 결론이 된다, 놈은 그저 철두철미한 면모가 있는, 완전히 맛이 간 사이코패스라는 거야.”
첨예한 신경전이었다. 움직임 없이 대사만을 주고받는 리딩이었기에 폭발적인 긴장감을 조성하진 못했지만 이만하면 꽤나 팽팽한 분위기를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유태일 감독은 만족하지 못했다.
“처음 봐서 그런가? 두 사람이 서로 불편한 것 같은데? 둘 모두 오디션 때의 실력이 안 나오는 것 같아.”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형사의 ‘윤도강’만을 연기했다. 연쇄살인범으로서의 ‘윤도강’은 일절 드러내지 않았다. 형사가 되어 자기 자신을 쫓으며 증거를 인멸하는 살인범 치고는 너무나 평이한 연기인 것이다.
‘조연들 연기를 보고 너무 자연스럽게 인물을 표현하려 했어. 현실이라면 윤도강은 감정까지 완벽하게 형사로 위장하겠지만 영화일 땐 관객들에게 심리를 드러내야 한다. 새로운 방해요소인 김진우를 거슬려하고, 제거하는 것도 불사할 정도의 섬뜩함을 보여줘야 해.’
이도원이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유태일 감독은 시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바쁘니까 넘어가겠습니다. 뒷부분에선 제가 말했던 점을 보완한 연기를 보여주십시오.”
이도원과 김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진우는 다른 배우들이 연기하는 동안 자신의 분량을 읽어보며 집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 전까지 지루한 표정으로 타인의 연기를 봤던 것과는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는 지금껏 마땅한 적수를 만나지 못했고 연기력도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런데 이제야 자신을 자극하는 상대를 만난 것이다.
‘재밌어지겠어.’
이도원은 묘한 흥분감이 들었다. 기대감이나 승부욕이라고 불러도 좋을 감정이었다. 그는 김진우가 노력만 한다면 무서운 발전을 거듭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도원이 꾸준히 실력이 성장하는 배우라면, 김진우는 자극을 받으면 괴물 같은 재능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보여주는 배우였다.
‘김진우의 연기는 내게도 좋은 자극이 될 거야.’
이도원은 확신했다.
차례가 돌고, 유태일 감독이 씬 넘버를 말했다.
“42씬, 윤도강을 의심하게 되는 씬. 이번에는 뭔가를 보여주기 바랍니다.”
그 지시에 따라 대본을 보던 이도원이 고개를 들었다.
< 유명세, 양날의 칼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