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계일학 (10) >
2019년 12월 31일 수요일 TBT방송국.
12월 말부터 촬영 스케줄이 빠듯하게 이어졌다.
전날 철야촬영이 있었기에 오늘은 밤 촬영만 예정돼 있었다.
따라서 정용주와 민영기는 회의실에 마주앉았다.
“시청률 상승세가 나쁘지 않아.”
<시간아! 돌아와>는 수목드라마 편성이었다.
정용주는 시청률 표를 책상 위에 올려뒀다.
시청률 표를 본 민영기가 중얼거렸다.
“25일 첫방 평균 시청률 2.2%. 26일 3.0%. 일 프로 가까이 올랐네요.”
“이대로 가면 회 마다 일 프로 씩 꾸준히 상승할 거라고 예상한다.”
“꽤 확신하시네요?”
민영기의 질문에 정용주가 작년도 편성 데이터를 던져주었다.
“흥행작들 데이터다. 대부분 1회에 비해 2회가 낮지. 연속으로 방송이 나갔기 때문이야. 빠질 사람들이 빠진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3회부터 드라마가 유명세를 타면서 다시 궤도에 올랐어. 일주일 사이 소문이 퍼진 거다.”
“날카로우시네요.”
민영기는 머쓱하게 웃었다. 자신이 제공해야할 데이터였다.
정용주는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성탄절 특집 방송도 많았는데 평균 2.2%가 나왔다는 건 대박조짐이야. 미흡한 홍보로 이룬 것 치고는 엄청난 성과지. 문제는 새해 때도 그러리라고 보장 못 한다는 점. 그나마 성탄절 땐 방콕하는 시청자들이 있지만 새해에는 다들 귀향하니까.”
“내일이랑 모래 시청률이 무너져도 다음 주에 다시 오를 겁니다.”
“한 회 안 보면 안 보게 돼. 알잖아?”
정용주가 심각한 얼굴로 말을 꺼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때서야 민영기도 표정을 굳히며 대답했다.
“난감하게 됐네요. 배우들 기획사에서 전단지 뿌려주는 걸 기대할 수도 없고.”
대부분 신인이거나 조연이기 때문에 그런 방식의 홍보효과는 기대하기 힘들다.
고개를 끄덕인 정용주가 입을 열었다.
“결방이 낫다. 새해 편성에서 빼달라고 건의해보겠지만 크게 기대하진 말고. 괜히 운대 잘못 맞춰서 시청률 무너지는 일 없도록 한 번 노력해 보자.”
회의실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민영기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이번 세트촬영. 스케줄이 겹칩니다.”
지난 번 남양주 주택 내부전경을 고스란히 따서 방송국 내부에 세트장을 만들었다.
문제는 세트장을 선점한 드라마가 있다는 것이다. 비록 다른 세트를 이용한다고 해도 동시간대 한 세트장에서 작업할 수는 없었다.
정용주가 한숨을 감추며 물었다.
“산 너머 산이로군. 저번에도 우리가 빼줬는데 또 남양주로 가야한단 말이야? 우리 거 급하다고 빼달라고 해봐. 당장 내일모래 방송 나가야 된다고.”
“아시잖아요. 그쪽에서 짬밥으로 밀면 끝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뺐긴 거고요.”
“그럼 스케줄이 전부 틀어지는 건가?”
스케줄이 틀어졌다고 이제와 일정을 바꿀 수는 없었다.
정용주가 자문자답 했다.
“배우들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군. 곧 죽어도 오늘 촬영해야 하니까.”
“예.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민영기의 말에 정용주는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들한테 양해 잘 구해놔.”
*
12월 31일, 한해의 마지막 날.
이도원과 오준식은 밴을 타고 TBT방송국 내부의 드라마세트장으로 이동했다.
오준식이 백미러로 이도원을 보며 물었다.
“컨디션은 괜찮아? 감기 걸린 건.”
“좋아.”
대답한 이도원이 기지개를 켰다.
“집에 못 들어가서 어째?”
“동생들이랑 매일 통화하니까 괜찮아.”
“나도 집에다 꼭꼭 전화 드려야지.”
이도원은 가족들에게 소흘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다. 그가 먼저 연락하는 일은 드물었다. 엄마나 누나에게 전화나 문자가 오면 꼬박꼬박 받았지만 촬영 중일 때는 받지 못했다. 그러고 골아 떨어져서 전화하는 걸 잊어먹고는 했다. 반면 오준식은 아무리 바빠도 매일 같이 할머니와 동생들에게 일일이 연락을 돌리며 통화를 마친 뒤 “일과 끝!”이라고 외치고는 했다.
이도원은 그를 보며 느끼는 바가 컸다.
‘간절함을 잊지 말아야지.’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타임 슬립 했을 당시의 애잔함이 어느 순간부터 퇴색된 느낌이었다.
따라서 이도원은 끊임 없이 리마인드를 했다.
생각에 잠긴 그를 본 오준식이 물었다.
“무슨 고민 있으십니까? 이 배우님.”
“없습니다. 오 매니저님.”
이도원이 장난스럽게 말투를 따라하며 하품을 했다.
12월의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차가 막혔다.
“늦진 않겠지?”
“걱정 마. 괜히 일찍 나온 게 아니니까.”
오준식은 염려 말라는 듯 대답했다.
시간은 충분했다.
*
그들이 TBT 방송국 실내 세트장에 도착했을 땐 월화드라마 <꿈의 비상> 촬영이 한창이었다.
<꿈의 비상>은 이제 2회를 남겨두고 있었으므로 막바지 촬영인 셈이었다.
FD 김춘식이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오늘 일정이 딜레이 될 것 같다고 합니다. 방송국 8층에 대기실을 마련했으니 그리로 가시죠.”
한편 이도원은 <꿈의 비상> 세트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김춘식에게 물었다.
“전 여기서 기다려도 될까요?”
“타 팀 촬영을 방해만 하지 않으신다면야…….”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전 여기 남아서 구경하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김춘식은 고개를 끄덕이고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며 엘리베이터로 갔다. 먼저 도착한 이도원을 제외한 다른 배우들에게 딜레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한편 오준식은 <꿈의 비상> 현장을 빤히 바라보는 이도원에게 물엇다.
“왜?”
“아는 사람이 있어서.”
이도원의 시선이 머문 곳에선 차지은이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를 본 오준식이 낮은 목소리로 반갑게 외쳤다.
“오! 차지은이다.”
“쉿.”
이도원은 검지를 입술에 댔다. 그는 세트장 근처로 가지 않고 멀찍이서 차지은이 연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단순한 장면에서 자꾸 엔지를 내네. 원래 저런 연기를 소화 못 할 정도로 어리바리한 녀석이 아닌데?’
이도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차지은이 계속 엔지를 내자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시간아! 돌아와> 촬영 팀에서 계속 압박이 들어오고 있으니 문제가 더 불거지는 느낌이었다.
더욱이 <꿈의 비상> 촬영 팀은 <시간아! 돌아와> 촬영 팀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엄숙하고 빡빡한 인상을 주었다.
“야! 똑바로 안 할래?”
결국 PD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차지은이 요즘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고 해도 경력 이십 년 차 베테랑 PD에게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에 질새라 다른 배우들도 은근히 짜증 섞인 얼굴로 차지은을 쏘아보거나 혀를 찼다.
이도원은 <우리의 심장> 촬영 내내 여동생 같이 여기며 가까워졌던 차지은이 안쓰러웠다. 그 마음은 욱하는 감정으로 돌변했다. 하지만 이도원은 일시적인 감정에 휘둘릴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괜히 내가 나서봐야 차지은만 곤경에 빠지겠지.’
옆에서 오준식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매니저 생활을 하기 전 여러 현장을 전전하며 사람대접을 못 받았던 적도 있기 때문에 그녀의 마음을 멀리서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때 이도원이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기특하네. 저런 분위기에서 용케 지금껏 촬영했어.”
가만히 지켜보던 그가 오준식에게 물었다.
“동료배우들이 좀 노골적이지?”
오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지은이 아예 신인도 아니고, 보통 스태프들이 지랄 맞으면 배우들끼린 저렇게까지 티 안내는데.”
이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준식의 말대로 배우들은 노골적인 표정을 드러낸 채 차지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혼잣말로 한 마디 씩 하는 배우들까지 있었다. 그럴수록 차지은은 계속 엔지를 냈고 현장은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오 분 간 휴식!”
PD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차지은이 세트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울음이 터질 것 같은 표정으로 걸어왔다. 화장실이 있는 방향, 즉 이도원이 있는 방향이었다.
“자리 피하자.”
이도원이 말했다.
차지은은 어떤 것보다 자신이 욕먹는 장면을 들킨 것이 창피할 터였다. 이도원이 배려 차원에서 몸을 돌리려 할 때 차지은이 먼저 그를 발견했다.
“도원 오빠!”
이도원은 아무렇지 않게 놀라는 척을 했다.
“어? 너도 여기서 촬영 있었어?”
“모르는 척은. 다 봤잖아요.”
그녀가 반쯤 울먹이고 반쯤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도원은 민망한 얼굴로 되물었다.
“왜 봤으면서 못 본 척 했어?”
“오빠나 나나 똑같죠, 뭐.”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한 차지은이 덧붙였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봐. 그쵸?”
“남매 같은 소리하네. 내가 왜 네 남매야?”
피식 웃은 이도원이 물었다.
“한 마디 해도 될까?”
“무슨 말이요?”
“충격 먹을 텐데. 그게 싫으면 오지랖 그만 부리고.”
“장난해요? 이미 궁금하게 해놓고선.”
차지은은 한숨을 쉬며 마음을 단단히 먹는 시늉을 하더니 물었다.
“자, 준비 됐어요. 어디 해봐요.”
“너 무슨 일 있지?”
이도원의 물음에 차지은은 잠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이도원은 잠시 기다려주었다.
이내 차지은이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네 표정이 말하고 있으니까. 독하디 독한 네가 치사한 텃새에 휘둘릴 리는 없고. 그럼 무슨 일이 있는 거지.”
“제기 독하다고요?”
차지은은 피식 웃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버지가 위독하시거든요.”
무슨 위로가 필요할까.
슬픔과 아픔은 오로지 본인이 감당해야 할 것들이다.
일순 말문을 닫아두었던 이도원이 그녀를 위로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너 자신을 잊고 배역에 몰두해봐. 아버님이 편찮으신 상황을 받아들이기 싫지? 잠깐만 그렇게 해. 그럼 연기하는 동안만은 마음이 좀 편해질 테니까.”
차지은이 불현 듯 고개를 돌렸다.
울음이 터진 것을 숨기는 것이다.
그녀는 떨리는 호흡을 간신히 붙잡고 물었다.
“어떻게 그래요?”
“그래도 돼. 생판 남한테 욕 먹는 것 보다 불효는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 이도원이 옆으로 비켜서며 물었다.
“화장실 가려던 것 아니었어?”
“…진짜 못됐어.”
차지은은 한 마디를 남기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눈물은 닦아야 연기로 다 죽이지.’
이도원은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차지은은 잘 해낼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괜히 이곳에 더 머물러봐야 그녀의 몰입을 방해하게 될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이도원이 오준식에게 말했다.
“이제 가자. 방해하지 말고.”
오준식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꼬신 거 맞지?”
그 말에 이도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꼬시긴 개뿔.”
“느끼해서 토할 뻔 했거든? 그런 말 하면서도 전혀 오그라들지 않는 걸 보면 꼬신 거 맞네.”
“아니라고.”
“차지은도 너 좋아하나보다. 손가락이 멀쩡한 걸 보면.”
“죽는다.”
이도원이 으르렁대자 오준식은 엘리베이터 앞으로 달아났다. 그는 능청스럽게 매니저 본연의 자세로 돌아와 말했다.
“가시죠, 이 배우님.”
< 군계일학 (10)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