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연기의 신-67화 (67/178)

< 군계일학 (9) >

12월 26일 한정식집 <죽림정>.

이도원은 제대 후 유태일 감독과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이도원이 도착했을 땐 유태일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요새 자주 보는군.”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그러고 보면 이도원이 제대한 뒤로 불과 이 주 정도 지났을 뿐이었다. 그 안에 많은 일이 있었던 이도원으로서는 꽤 시간이 지난 느낌이었다.

“감독님이 저를 좋게 봐주신 덕분이죠.”

이도원은 능청을 떨며 기침을 했다.

마주 앉은 유태일이 따뜻한 차를 따라 건네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배우는 몸 관리가 생명이야. 영화 촬영에 지장을 주면 안 된다.”

그는 에둘러서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했다. 영화의 절반을 차지하는 주연배우의 건강 문제는 촬영일정이나 영화 완성도에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고개를 끄덕인 이도원이 답했다.

“물론입니다. 걱정 마세요.”

그때 종업원이 들어왔고 메뉴를 능숙하게 주문한 유태일이 이도원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리딩 때 만났을 텐데 따로 보자고 한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일 테지?”

“예.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부탁?”

유태일이 묻자 이도원은 뜸 들이지 않고 바로 용건을 꺼냈다.

“박아현이 감독님 차기작 오디션을 봤다고요.”

“그랬지. 연기력도, 마스크도 괜찮더구나.”

“저와도 잘 아는 사이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인연이 있었죠. 독백대회에서 만났고요.”

“호오. 성적은?”

“전 우승, 박아현은 준우승을 했었습니다.”

“그랬군.”

유태일은 고개를 끄덕일 뿐 가타부타 덧붙이지 않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이도원이 말했다.

“박아현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기회라.”

중얼거린 유태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상황을 알겠군. 박아현한테 부탁을 받았겠지.”

그는 말을 이었다.

“말뜻은 충분히 알겠지만 영화는 하나의 비즈니스다. 그렇다 보니 손익을 따질 수밖에 없어. 박아현이 오디션을 본 역할은 경대 출신 형사 ‘오정태’의 아내. 영화 내내 비중이 거의 없다. 구태여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를 섭외하기 위해 투자사에서 밀고 있는 배우를 차버릴 필요는 없지.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는 순간 꽤나 불편한 관계가 될 거야.”

“짐작은 했습니다.”

대답한 이도원이 덧붙였다.

“하지만 길게 보면 박아현은 친분을 쌓아두면 언젠가 도움이 될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박아현에게는 감독님과의 인연이 도움이 되겠죠. 감독님 영화에 투자할 투자자들은 많지만 만족스러운 작품을 완성해 줄 여배우는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박아현은 연기의 스펙트럼이 넓은 페이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아직 연기력이 따라줄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건방진 부탁이란 건 알고 있나?”

유태일이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 외에 다른 변명을 하진 않았다. 누가 봐도 신인배우 이도원이 나서기에 주제넘은 범위였다. 그럼에도 박아현의 제안을 수락하고 유태일에게 부탁을 하는 이유는, 박아현을 잡을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미 섭외가 끝난 마당에 이런 사소한 부탁을 빌미 삼아 배우를 갈아아치울 유태일이 아니란 걸 믿기 때문이기도 했다.

유태일은 이도원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합리적인 의견이긴 하다만, 만약 네가 원래부터 박아현과 날 이어주려고 했다면 오디션 전부터 추천했겠지. 그러니 아무 대가도 없이 박아현을 도우려는 마음만으로 내게 와서 이런 무리수를 두는 건 아닐 테고… 둘 사이에 어떤 커넥션이 오갔지?”

역시 날카로웠다.

잔꾀가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따라서 이도원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박아현에게는, 계약기간이 끝나는 대로 백 프로덕션과 계약을 맺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 약속이 내 신임을 잃을 경우를 각오할 만큼 중요한가?”

유태일의 강수에 이도원은 순간 멈칫했다.

이에 이도원은 깊게 묻어놓은 진심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제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건 유 감독님 덕분이지만, 제가 유 감독님과 만날 수 있었던 건 모두 이상백 대표님 덕분입니다. 그분은 제 연기 스승이자 인생 스승님이시죠. 부모님처럼 모시고 따라야할 분입니다.”

다소 감상적인 이도원의 말을 들은 유태일은 그를 빤히 보았다. 나이가 어려서 감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객기가 넘친다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치기 속에는 각박한 사회에서 보기 힘든 울림이 있었다.

유태일이 물었다.

“뭐 좋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게 왜 스승과의 의리를 지키는 게 되지? 마치 백 프로덕션이 네가 힘쓰지 않으면 주저앉을 것처럼 구는구나.”

이 부분은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이도원은 적절한 핑계를 댔다.

“자세한 내용은 알릴 수 없지만 백 프로덕션은 모든 배우들에게 공정한 계약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공정한 계약조건’이 기성배우들에게 얼마나 불리한지는 감독님도 아시겠죠? 때문에 제 방식으로 보탬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내가 이상백 대표고,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척이나 화를 낼 것 같은데.”

“각오하고 있습니다.”

이미 각오하고 있다는데 더 할 말은 없었다.

유태일은 이도원이 그저 영리한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이도원은 어린 나이였지만 어리지 않았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박아현 섭외까지인 것 같군. 알아서 잘하겠지만 섣부른 판단으로 네 미래를 그르치지 말길 바란다. 넌 감독으로서도 탐나는 배우야. 모쪼록 오래 활동했으면 좋겠구나.”

딱 그 정도였다.

유태일 감독은 신인감독임에도 이 바닥의 생리에 대해 정확히 숙지하고 있었다. 만일 이도원이 자칫 섭외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미련을 두지 않을 것이다. 이도원도 이도원이지만, 이십 대 후반에 불과한 그 역시 나이에 비해 굉장히 성숙했다.

‘역시 세상은 보다 성숙한 사람에게 관대하군.’

이도원은 타임 슬립 전 유태일이 최고의 영화감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음식과 소주가 나왔다. 상이 차려지는 걸 가만히 보고 있던 이도원이 술을 한 잔 따라올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

두 시간 동안 영화 이야기가 오갔다. 공통 관심사를 가진 두 사람이 만나니 대화가 술술 통하고 시간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유태일은 탁월한 연출력으로 영화계에서 질풍노도 같은 성장세를 보이는 신인감독이고, 이도원은 뛰어난 재능과 연기력으로 주목받는 신인배우였다. 비슷한 입장의 두 사람은 취기를 벗 삼아 화창한 미래를 그려볼 수 있었고 그 그림을 현실로 만들 가능성에 대해 논의할 수 있었다. 즐겁지 아니할 리가 없는 대화였다.

“이제 슬슬 올 시간이군.”

유태일은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손목시계를 보았다.

이도원 역시 취기가 오른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 부탁을 받아주신 걸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다. 여기저기 투자자들한테 치이느라 보통 열받는 게 아니야. 갑 질을 어찌나 해대는지. 후우- 나도 큰 결정을 내린 거다. 실망시키면 안 돼.”

취기가 올라서 그런지 천하의 유태일도 말수가 늘고 허심탄회한 면이 드러났다.

이도원 역시 시익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나저나 배역은 확정된 건가요?”

“배역…….”

따라 중얼거린 유태일 감독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면 원하는 것도 오지게 많군. 투자자들 보다 네가 더 무섭다. 다음번에는 뭘 요구할지 짐작도 못하겠어. 미리 못 박아두지만 배역과 박아현, 그 이상은 안 된다. 교만과 방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야. 내가 다 들어준다고 해서 네 버릇이 고약해질까 봐 심히 걱정돼서 하는 말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것이 제 신조입니다.”

이도원은 빈 술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원수는 잊어도 은혜는 갚겠습니다.”

그 말에는 여러 의미가 내포돼 있었다. 이도원은 김진우에 대한 복수심으로 영화를 망치지 않겠다고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다. 복수 이전에 신뢰를 지키고 은혜를 갚는 일이 먼저인 것이다.

속 사정을 모르는 유태일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네가 이상백 대표와 의리를 지키려고 불철주야 뛰는 모습을 보면 대강 알 수 있지. 그 마음이 기특해서 마음이 기울었던 것도 있다. 다들 지금 둥지를 튼 회사가 어려워지면 은혜를 잊고 새 보금자리를 찾기 바쁘지. 침몰하는 배는 얼른 버리고 떠나는 게 요즘 추세다. 먹고산다는 핑계로 의리를 저버리지.”

유태일은 혼자 소주를 들이켰다. 크- 탄성을 지른 그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 개인 병원이 망하고 집이 어려워졌던 적이 있다. 어렸을 적 일이지. 그동안 날 끔찍이 여긴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모두 멀어지더군. 언제부터인가 더는 이 세상을 살아가며 달달한 맛 대신 쓰고 비린 맛들만 나더란 말이야. 우리처럼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그래선 안 돼. 우리마저 그렇게 된다면 세상은 정말 구슬퍼질 테니까.”

“예.”

이도원이 생각에 빠져 대답했다.

마주 고개를 끄덕인 유태일 감독이 말했다.

“넌 너 자신을 지켜라.”

이도원은 스스로 왜 그리 연기가 좋은가 자문했다.

이 사회가 잃어버린 울림을 줄 수 있어서 좋다. 마음이 대답했다.

두 사람이 말없이 술잔을 기울일 때 이도원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유태일이 손을 내저었고 양해를 구한 이도원은 고개를 돌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한정식집 앞이야. 예능 녹화 때문에 좀 늦었어. 바로 들어갈게!

이도원은 시계를 보았다. 일곱 시 오 분.

배우에게 약속은 칼이다. 유태일이 많이 취해서 망정이지, 오 분 때문에 자칫 모든 일을 그르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도원은 잔소리 없이 대답했다.

“알겠어. 얘기해 둘게.”

이도원이 전화를 끊자 유태일이 물었다.

“박아현?”

“예. 도착했다네요.”

“늦었군.”

놀랍게도 유태일은 통화하는 사이 시간을 확인한 상태였다. 하지만 특별히 불쾌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이내 박아현이 들어와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박아현입니다.”

“여기 옆에 앉아요.”

유태일이 이도원의 옆자리를 권했다.

박아현이 앉자 그가 말했다.

“도원 씨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앞으로 기대하죠.”

한 마디로 모든 걸 표현한 유태일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박아현이 그 손을 맞잡았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이도원이 박아현의 술잔을 주문했다. 그는 계약서를 보여주고는 그녀의 백에다 챙겨주었다.

“잘 읽어보고 사인해.”

박아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는 황급히 유태일이 눈치를 살폈지만 이미 대략적인 상황을 들은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도원 씨에게 모든 내용을 들었습니다.”

박아현이 이도원에게 입모양으로 ‘어떻게 된 거야?’라고 물었다.

이도원이 시익 웃으며 대답했다.

“감독님도 알고 계셔야 네가 이제 와서 약속을 어기면 그만한 벌을 받지. 약속을 저버리는 배우에게 이쪽 세계가 얼마나 냉혹한지 너도 알 테니까.”

유태일 감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주 날 제대로 이용해먹으려 드는군. 너도 벌은 받아야 할 거다.”

그는 눈을 빛내며 박아현에게 말했다.

“아마 촬영 내내 도원 씨가 고생하고 눈물 흘리는 걸 볼 수 있을 겁니다. 배역 자체가 입에서 단내나도록 뛰고, 구르고, 감정적으로도 혹사되는 캐릭터거든요.”

이도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다르게 표현했다.

“그만큼 탐나는 배역이기도 하죠.”

유태일은 피식 웃었다.

“시나리오는 회사로 보내놨으니까 내일 전달받으면 된다. 네가 어떻게 소화해 낼지 벌써 흥분되는군.”

박아현은 두 사람을 보며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적나라하게 말하진 않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기대하고 있었다. 천재들 간에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다는 듯이. 이도원은 유태일의 시나리오에 기대하고, 유태일은 이도원의 연기에 기대한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이도원의 옆모습을 보았다.

‘옛날부터 남달랐지.’

이도원에게 번호를 물어보고 일방적인 연락을 계속했던 것도 그런 알 수 없는 끌림이었다. 그는 언제나 남들과는 다르다는 듯이 은은한 향을 풍겼다. 그리고 마침내 연기를 시작했을 때 독보적인 분위기로 좌중을 압도한다.

‘동경이겠지.’

그건 박아현이 배우로서 이도원에게 품고 있는 감정의 정체였다.

< 군계일학 (9) > 끝


0